[ 박상은 스토리 ①] 50년 전 화천 사방거리에서 무슨일이?
▲ 50년 전 그날, 잘못된 과거의 일을 바로잡겠다는 일념으로 고통스러운 기억을 강제소환한 박상은씨.
ⓒ 권우성
강원도 화천군 산양리. 휴전선이 보이고 군사분계선의 긴장감이 팽팽했던 이곳에 박상은(72)씨가 섰다. 소위 '사방거리'라고 불리는 이곳을 50년 만에 다시 찾은 것이다. 여기서 박씨는 군 생활을 했고, 끔찍한 사건을 겪었다. 이제 잘못된 과거의 일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박씨는 고통스러운 기억을 강제로 소환했다.
"북한으로 가려 했다는 거예요, 제가. 뭘 알고 북한에 가려고 하겠어요. 단지 선임하사에게 구타 당하고 자살하려고 나왔던 건데."
50년 전
박씨가 사방거리에 서서 옛 기억을 떠올렸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그는 고향 강화도에서 안 해 본 일이 없었다. 예식장 청소, 술집 웨이터, 고기잡이 선원, 취로사업(생계 지원 사업)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그러다가 입대를 한 뒤 첫 휴가 때 집에 돌아오니 집안 사정이 말이 아니었다.
"1969년 2월 겨울에 휴가받고 집에 와 보니 아버지가 홀로 계시는데 땔감이 없어서 그 엄동설한에 방 안에서 꼼짝도 못 하고 덜덜 떨고 계시더라고요. 얼마나 기가 막혀요. 생활 자재도 없어서 반은 굶고 사시는데 억장이 무너지더라고요. 휴가 기간 20일 내내 산에 올라가 나무를 해서 겨우내 아버지가 쓰실 땔감을 해다가 놓았어요. 그러고는 제가 가지고 있던 500원을 아버지께 드리고 왔어요. 그렇게 가난할 때니까요."
박씨는 부대로 돌아갈 차비가 빠듯했다. 청량리역에서 헌병을 만났다. 소지품을 내놓으라고 하더니 500원짜리 지폐만 집어갔다. 춘천으로 향하는 기차에 무임승차했다. 승무원이 표를 검사했다. 35원 차비가 없어 쩔쩔매는데, 한 아주머니가 나타나 대신 차비를 내줬다. 서럽고 고마운 마음에 쏟아지려는 눈물을 입술 앙 다물어 참았다.
춘천에서 선임하사 이아무개를 만났다. '휴가 다녀오냐, 그러면 밥을 사라'라고 했다. 박씨는 주머니에 돈이 없었다. '다음 기회에 대접하겠다'라고 했다. 선임하사 이아무개는 툴툴대며 돌아섰다. 돈 한 푼 없던 박씨는 자신이 근무하는 7사단 쪽으로 향하는 차를 얻어 타고 부대에 복귀했다.
"그날 밥을 샀어야 하는데 밥을 사지 않은 것이 문제가 된 거예요. 그때부터 선임하사가 나를 괴롭히는데 방법도 여러 가지였어요. 월남을 지원하라고 하거나, 장기 하사로 복무하라고 하루에도 몇 번씩 괴롭혔어요. 그리고 내 차례도 아닌데 걸핏하면 5분 대기조를 세웠죠. 그래도 버텼죠. 어쩌겠어요."
박씨는 선임하사의 괴롭힘 속에 힘겨운 군 생활을 하며 하루하루를 버텨냈다. 그리고 지난 1969년 5월 1일 춘천에서 탄약을 받던 그날, 마침내 일이 터지고 말았다.
그날 새벽의 구타
▲ 고작 빨래 때문에 시작된 구타는 1시간 정도 계속됐다. 온 몸에도, 마음에도 피멍이 든 박상은씨는 억울한 누명으로 영창갈 위기에 처하자 탈영 후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다.
ⓒ 권우성
"우리가 포병부대라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춘천으로 탄약을 받으러 나가야 해요. 우리 부대가 비무장지대 가까이 있어서 춘천까지 나갔다 오려면 아침 일찍 출발해야 하거든요. 그날도 새벽 4시경에 출발했던 것 같아요. 나하고 운전병, 하사 한 명 이렇게 셋이 갔어요.
탄약을 받으러 춘천에 있는 부대에 갔는데 군대가 완전히 부패한 거예요. 탄약을 일찍 받으려면 탄약 지급하는 병사들에게 뇌물이라도 줘야 하더라고요. 근데 우린 뭐가 없으니 마냥 뒤로 밀리는 거지요. 그래서 해가 떨어진 뒤에야 보급을 받을 수 있었어요. 탄약을 보급받고 보니 저녁이 되어서 근처 식당에 들러 식사를 하고 돌아오게 된 거죠. 돌아오는 길에 배가 고파 생라면을 깨 먹으며 돌아왔는데 부대 들어오니 새벽 2시경이 되었더라고요."
부대에 돌아와 선임하사 이아무개에게 귀대 보고를 하는데 잔뜩 화가 나 있었다. 탄약 수령을 위해 춘천에 다녀온 사이 사령관이 순시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탄약고에 누군가 널어놓은 빨래가 문제가 됐다고 했다.
"선임하사가 막 귀대한 나를 불러요. 그러더니 나더러 왜 탄약고에 빨래를 널어놓았느냐는 거죠. 탄약 받으러 갔다 온 내가 무슨 빨래를 했겠어요. 그래서 안 했다고 하니 변명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 문제 때문에 자기가 군기교육대에 가게 생겼다며 막 뭐라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아니 그럼 널어놓은 빨래의 명찰들을 보면 알 것 아니냐, 군복 명찰을 보면 내 빨래가 아니라는 것이 확인될 것 아니냐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그 말은 묵살 당하고 곡괭이 자루로 막 구타를 하는 거예요."
곡괭이 자루로 시작한 구타는 1시간 정도 계속됐다. 박씨는 구타 당하는 내내 빨래 사건은 핑계였고, 결국 이전부터 불만을 가졌던 선임하사의 감정이 폭발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온 몸에 피멍이 들었고, 말을 하지 못할 정도의 상처를 입었다. 한 시간여의 구타가 끝나고 절뚝거리며 내무반으로 들어갔지만 분한 마음에 잠이 오지 않았다. 박씨가 분노로 잠을 이루지 못하던 그때 당직근무를 서던 고참의 요청으로 근무교대를 하게 됐다.
누명 써 영창갈 판... 죽을 마음으로 탈영
"당직근무를 서려고 행정실에 들어가니 제 이름이 써 있는 서류가 있는 걸 봤어요. 자세히 보니 빨래 사건을 저의 책임으로 물어 15일간 징계 영창을 보낸다는 내용이었어요. 누가 작성했느냐고 하니 선임하사 이아무개가 작성했다는 겁니다. 너무도 억울한 마음에 '죽지 않으면 아버지를 모시고 잘 살 것이다'라는 쪽지를 적어 가슴에 품고 선임하사에게 복수할 생각을 하게 된 거죠. 소총을 소지한 채 하사관실을 찾아가 선임하사도 없애고 저도 자살할 생각이었어요. "
그러나 박씨는 끝내 실행하지 못했다. 자주 부대에 찾아오던 선임하사의 자녀들 생각에 복수하려던 마음을 접게 됐다. 그는 다시 행정실로 돌아와 근무 병사들을 교대시키고 홀로 죽을 마음으로 부대를 이탈해 700고지 골짜기 사잇길로 걸어갔다.
"전날부터 잠을 자지 못해 길을 따라 걷는데 너무 졸린 거예요. 해가 뜨고 기온도 오르니 더 졸리더라고요. 그래서 근처 산소에서 눈을 붙였지요. 한참을 자고 일어나니 해가 벌써 뉘엿뉘엿 지더라고요. 대낮에 계속 잠든 거죠. 700고지에서 20여 분 정도 내려가니 웬 민가에 구멍가게가 나왔어요.
거기서 술이 든 커다란 병과 어포, 주전부리를 구해 좀 전에 잠을 잤던 산소로 다시 올라왔어요. 그리고 그곳에서 술을 반 이상을 마셨어요. 독한 소주를 그렇게 마셨으니 당연히 취하죠. 그리고 그때 술김에 가져갔던 칼빈 소총으로 여러 차례 죽으려는 시도를 했어요. 방아쇠를 입에다 대고 당기려고 여러 번 시도를 했는데 그때마다 아버지 얼굴이 떠올라 실행을 못하는 거예요. 부모님 생각, 서러운 내 처지 이런 생각을 하니 하염없이 눈물만 나는 거예요. 울기만 엄청 울었어요."
15사단 소초의 최 일병
박씨는 산소에 있으면 부대원들에게 발견될까 봐 근처 숲속으로 들어가 나무 둥치에 기대어 쉬기로 했다. 긴장과 술기운이 겹쳐 그는 또다시 잠이 들었다. 그리고 다시 깨어보니 이미 사방은 컴컴하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칠흑같은 어둠이었다. 갈 곳이 없는 자신의 처지를 깨달은 그는 다시 부대로 복귀하기로 마음먹었다. 시야가 어두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자기 생각에 부대 방향이라고 생각했던 곳으로 길을 옮겼다.
"내가 그곳에서 살아본 적도 없고, 또 부대 밖을 자주 나오지도 못해서 어디가 어딘지 몰랐어요. 그러니 길을 잘못 들었던 거죠. 한참을 가다 보니 뻘처럼 발밑이 축축해지는데도 나오고 가시철망 같은 것도 보이더라고요. 부대 가는 방향이 맞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뭐라도 사람이 있는 곳이 나오면 길을 물어 찾아가면 되겠다 싶었어요. 가다가 초소를 발견했으나 사람이 없는 빈 초소더라고요. 또 더 걸어가니 슬라브 같은 것으로 된 집이 나와요. 그런데 거기 가도 사람이 없어요. 그 집 좌측에 건물이 하나 있어서 다가가니 뭔가가 웅크리고 있는 것 같아 나무를 두드리니 자고 있던 군인이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총을 들이대는 거예요."
기겁한 군인에게 박씨는 자신의 소속을 말하며 길을 잃어 밤새 헤맸다며 사정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자신의 부대로 복귀하려고 하니 도와달라고 요청을 했다. 사정 이야기를 들은 최○○ 일병은 총을 내리고 따라오라며 내무반으로 안내해 주었다. 그 내무반에 들어가니 낯선 군인이 무장한 채 들어오는 것을 보고 한바탕 소란이 일어났다. 내무반에 있는 군인들이 경계하며 안내해 준 최○○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최00은 고참들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제야 박씨는 그곳이 자신이 근무하던 7사단 바로 옆 15사단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보안대 수사관들 입에서 나온 뜻밖의 말 "빨갱이 새끼"
"내복 차림의 군인들이 저의 몸을 수색하고는 내무반에 앉혀 놓았습니다. 내무반의 군인이 저에게 가만히 있으라는 얘기를 하고 여러 군데로 전화를 넣었습니다. 1시간쯤 후 지프 한 대가 도착하자, 차에서 내린 몇 명이 저의 신체를 검사하고 질문을 했습니다.
일련의 과정이 끝나자 갑자기 제 팔을 뒤로 묶어 차에 태우더라고요. 저야 탈영병이니까 그런가 보다 했죠. (부대를) 나올 때 보니 들어갈 때 왼쪽에 보였던 길가의 모래주머니가 우측에 보였고, 계속 나오다가 10분도 채 안 돼서 사거리가 나왔습니다. 거기서 우측으로 돌아서 10분 정도 나오니까 오른쪽에 굵기가 종아리 정도 되는 나무가 엄청 많이 심어져 있는 곳을 지났습니다. 거기서 왼쪽으로 약간 오르막길 같은 곳을 지나면서 10분 정도 달려 도착해 보니 15사단 보안대였습니다. 전체적으로 약 30~40분 정도 걸렸던 것 같습니다.
저를 데려갔던 사람들은 운전수 1명과 수사관 3명이었는데 수사관 3명은 군복은 입었지만 명찰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도착한 보안대에서 조서를 쓰며 사정을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보안대 조사가 이상하더라고요. 제가 월북하려고 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런 것이 아니라 고참 구타 때문에 자살하려고 했다가 복귀 중에 길을 잃은 것이라고 항변했더니, 아이고 참."
보안대 수사관들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튀어나왔다.
"빨갱이 새끼가, 북한으로 탈출하려고 했다가 잡혀 놓고서는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는구만."
그는 북한으로 탈영하려 했던 범인으로 몰리고 있었다.
"그게 제일 억울하죠. 그것 때문에 무기징역을 받고 근 20년 가까이 옥살이를 했으니. 탈영한 거야 죄가 되지만 내가 20년을 살 만큼 죄를 짓지는 않았어요. 고참 구타에 못 이겨 죽으려고 한 건데, 차라리 그때 죽어 버렸으면 평생 이런 마음고생 안 할 텐데."
20년 옥살이... 50년만의 재심 신청... 최 일병을 찾아라
▲ 억울한 50년의 세월을 보상받기 위해 2018년 4월 10일 박상은씨는 서울서부지방법원에 재심을 신청했다. 그는 2월 15일까지 자신의 억울함을 증명해줄 많은 이들을 찾아내 진실을 확인해야 한다.
ⓒ 권우성
지난해 4월 10일 박씨는 서울서부지방법원에 재심을 신청했다. 그리고 지금 15사단 초소에서 만났던 최○○을 찾고 있다. 그가 자신이 월북을 시도하지 않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리라는 생각에서다. 재심이 열리는 서부지원 담당 재판부 역시 지난 1월 9일 열린 심문기일에서 최○○의 진술이 더 보강돼야 재심개시의 이유가 분명해질 수 있다는 취지의 의견을 피력했다.
그는 억울함을 증명해 줄 많은 이들을 2월 15일까지 찾아내야 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진실을 확인해야 한다. 그의 진실투쟁기는 이제부터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