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은 스토리 ③] 증거와 증인 찾아 삼만리
▲ "너무 억울하고 원통하지만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지 몰라서 수십 년을 그냥 억울한 채로 살았어요." 2011년 늦은 가을 만난 박상은씨는 자신의 사연을 쏟아냈다.
ⓒ 권우성
연신내역 근처에 대조신한의원. 이곳이 박상은씨가 사는 곳이다. 박씨를 처음 알게 된 것은 2011년 늦은 가을이었다. 어린이집에 다니고 있던 막내딸 하원을 시키던 중 전화가 왔다.
"안녕하세요. 김○일씨 아시죠? 그 사람하고 저하고 대구교도소에 함께 있었는데 자기도 변 선생 만나서 간첩 딱지 뗐다며 저에게 전화번호를 알려줬어요. 혹시 시간 되시면 좀 만날 수 있나요?"
연신내역에 도착해 찾아간 곳은 대조공원 맞은편에 위치한 한의원이었다. 그곳 맨 위층 가정집에 머물고 있던 박씨는 나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차 한 잔을 내놓자마자 억울한 그의 사연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너무 억울하고 원통하지만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지 몰라서 수십 년을 그냥 억울한 채로 살았어요. 부대 선임이 하도 때리고 괴롭혀서 죽으려고 탈영한 것이 북한으로 넘어간 것으로 꾸며졌어요."
50년 전 사건... 빈약한 기록
그는 억울해 했다. 그의 억울한 사연을 듣고난 뒤 우선 해야 할 일을 정리해 보았다. 먼저 국가기록원과 국방부 군검찰수사단에 그의 기록이 있는지 확인하도록 부탁했다. 몇 개월 동안 그의 기록을 찾아 보았으나, 찾을 수 있는 기록은 박씨가 수감되어 있던 대구교도소의 수감기록과 국방부에 보관되어 있던 그의 판결문뿐이었다. 군 수사기록은 이미 수십년 전에 폐기된 뒤였다.
"기록이 없으니 어쩌죠? 기록을 보면 제가 억울하다는 점을 다 확인할 수 있을텐데..."
그는 절망하고 있었다. 그가 건넨 판결문과 수용자기록을 검토해 보았다. 그곳에 그를 체포했다는 최○○, 그를 구타했다는 선임하사 이○○ 등이 기재되어 있었다. 그러나 최○○, 이○○의 소재를 알 길이 없었다. 고문이 있었다고 하나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기록과 사람뿐이었다.
나 "혹시 15사단이나 춘천보안대에서 조사받을 때 같은 부대원을 만나거나 아는 사람을 만난 적 없나요? 그런 사람이 있었다면 고문이나 불법구금을 증언해 줄 수 있을 텐데요."
박 "춘천 보안대에서 만난 사람이 이○○이하고 최○○이었는데 그 사람들 모두 어디 사는지 알지 못하니 어떻게 하겠어요. 그 사람들 주소라도 알면 찾아가서 사실대로 증언해 달라고 바지라도 붙잡고 부탁이라도 해볼텐데..."
나 "가족 중에서 조사를 받은 분들은 없나요?"
박 "가족 중에서 조사받은 사람은 없어요. 아, 그러고 보니 우리 조카 최용○이가 나 때문에 조사를 받고 고생했다는 말을 했다는데 그 놈한테 가서 한번 물어 볼까요?"
설득
▲ "저는 그 일을 잊고 살려고 무지하게 노력하며 살았어요. 잊고 살아요, 제발." 조카는 기억하기를 거부했다. 박상은씨는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고, 그저 진실을 듣고 싶을 뿐이라고 오랫동안 설득했다.
ⓒ 권우성
그는 조카 최용○을 곧바로 만났다. 최용○은 신부전증을 앓고 있어 투석치료를 해야 하는 병을 앓고 있었다. 조카 집에서 가까운 곱창전골 집에 들어간 그는 조카에게 어렵게 말을 꺼냈다. 조카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조카 역시 어렵게 말을 꺼냈다.
"저 사실 그 기억 다시는 하고 싶지 않아요. 저는 그 일을 잊고 살려고 무지하게 노력하며 살았어요. 왜 이제 와서 그 이야기를 다시 꺼내는지 모르겠네요. 조용히 잊고 살아요. 제발."
그는 기억하기를 거부했다. 박상은씨는 그런 조카를 설득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누구를 괴롭히기 위한 것도 아니라, 그저 진실을 듣고 싶을 뿐이라고 그를 설득했다. 오랜 설득 끝에 그의 과거를 이끌어내는데 성공했다.
"난 그 얘기만 하면 치가 떨려. 아유. 하루는 집에 있는데 사람들이 찾아왔어. 그러면서 그냥 잡아가더라고. 처음에는 강화에 있는 헌병대로 데려갔다가 인천 신포동에 있는 보안대로 끌고 가더라고. 거기서 일주일 조사를 받았어. 그러고는 또 헌병대 수사실(CID)로 끌려갔어. CID 그 지하실에 들어가니까 이 새끼들이 뭐라 그러냐면, 여기가 어딘지 아느냐고, 그러면서 괴롭히는데 아휴..." (최용○ 녹취록 중)
CID에서 그가 추궁받았던 내용은 박상은에게 북한의 이야기를 전했느냐는 것이었다.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는 계속해서 구타를 당했다고 한다.
아직 충분치 않은 증거
그와의 대화는 녹취록으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보안대에서 박상은씨가 고문을 받았다는 증거가 부족했다. 그와 만날 때마다 그는 항상 춘천 보안대에서 만났던 문○○ 군대 동기를 이야기 했다. 그러나 그 역시 집 주소를 알지 못했다.
박 "문○○이 주소를 알면 참 좋은데, 문○○이가 나하고 며칠 동안 수갑 차고 있으면서 내가 고문 받았던 걸 알고 있거든."
나 "그러게요. 뭐라도 기억나는 게 없으세요?"
박 "그러게. 기억 나는 게 별로 없어. 훈련소에서 같이 훈련받을 때 동인천인가 그쪽 시장에서 방앗간을 한다는 말만 들었어."
그것뿐이었다. 동인천 부근 시장. 방앗간. 문씨... 인터넷으로 동인천 부근 시장을 검색해 보니 송현동 중앙시장이 있는 것을 확인했다. 가보기로 했다. 혹시 시장에 가면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
동인천역에서 내려 중앙시장으로 향했다. 지하철 선로를 따라 길게 시장이 형성되어 있었다. 역에서 나와 시장 초입에 있는 옷가게에 들렀다. 그리고 이곳에서 가장 오래 장사한 가게가 어디냐고 물어 보았다. 무슨 일이냐고 옷가게 주인이 물었다.
"혹시 여기 방앗간 하시던 분 중에 문씨 성을 가진 분이 운영하시던 방앗간이 있나요?"
그랬더니 그 아주머니는 "아 문○○이가 하던 방앗간 찾나 보네, 근데 거긴 왜? 벌써 없어졌는데?"라고 하는 것이었다. 생각보다 쉽게 찾았다. 그 방앗간은 주인이 바뀌어 다른 사람이 운영하고 있었지만 문○○의 연락처를 알고 있었다. 박상은씨가 문○○ 군대 동기로 그의 연락처를 알려달라고 부탁했더니 그의 연락처를 알려주었다. 박상은씨에게 문○○의 연락처를 찾았다는 말을 전했다.
드디어 증인을 찾았지만... 소극적인 증언
▲ 동인천 부근 시장. 방앗간. 문씨... 마침내 드디어 증인을 찾았다.
ⓒ 박장식
그는 곧바로 그와 연락해 만났다. 그러나 그는 보안대에서 만났던 그에게 진술하기를 꺼려했다. 결국 의미 있는 말을 듣지 못했다. 내가 전화해 보기로 했다. 전화를 받은 그는 한참을 주저했다.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던 그는 결국 이런 말을 했다.
"훈련소 퇴소 후 통신부대로 자대 배치를 받았습니다. 그러다가 통신부대 부대원 중 10여 명이 보안부대로 파견되었죠. 어느날 수송부에 있던 고참이 저에게 찾아와 제 동기가 잡혀 왔다는 겁니다. 그 고참이 박상은이가 제 훈련소 동기라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어요. 식당에서 박상은을 봤어요. 보안부대에서 박상은과 저 단둘이 잠을 자도록 했어요. 한 3일간 그랬던 것 같습니다.
잠을 잘 때 꼭 수갑을 채워 잠을 재웠습니다. 잠을 잘 때 나눴던 대화는 주로 서로의 안부를 묻고 박상은에게 조사 잘 받으라고 말했던 것 정도였어요. 박상은이가 저에게 억울하다고 말했다는데, 저는 사실 그런 기억이 나지 않아요."
그는 고문을 직접 목격하지 못했고, 왜 고참이 박상은과 잠을 재웠는지 그 이유를 끝내 말해주지 않았다. 그러나 박상은이 3일 이상 수갑을 찬 채 잠을 잤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적어도 3일간 불법구금 된 상태에서 강압적 수사를 받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즈음에 또 한 명의 귀중한 증인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는 이현우로, 같은 시기 남한산성에서 구금되어 있던 군인이었다. 그는 박상은씨가 수감되기 한 달 전에 먼저 수감되어 있던 사람으로 박상은씨가 보안대 수사관의 가혹행위로 인해 여기저기 상처를 입었던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다.
여기에 더해 기록 하나를 찾아낼 수 있었다. 바로 <2003년도 인권실태 조사보고서>(413쪽 국가인권위원회 발간)에 박상은씨의 고문 사례가 기록되어 있었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⓼ 수사관들이 작성한 조서에 무인을 찍으라며 갖은 고문 – 박상은 사례
나는 보안대로 넘겨졌으며 15사단 보안대에서 3일간 모진 고문을 당해야 했으며 춘천보안대에 이첩되어서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별별 고문을 당해야만 했다. 그들은 내가 알아듣지도 못할 말들을 했다. 낙서(군대에서 자살을 기도하면서 쓴 낙서로 "아버님 불효를 용서하시오, 나는 어디론가 멀리 가버리고 싶군요. 죽지 않고 살 수만 있다면 아버님께 효도하고 싶다")를 한 것을 보니 '월북하여 죽지 않고 산다면 무력 도발하는 김일성이 환갑을 청와대에서 하는데 그때 내려와서 아버님께 효도한다는 뜻'이라며 근 한 달이 넘도록 지하실에 넣어놓고 고문을 했다.
그리고 "고향에서 사라호 태풍 때 납북되었던 사람들에게 무슨 말을 들었냐"는 것이다. 나는 아무 말 들은 사실이 없다고 말했다. 사실 들은 말도 없었고. 그런데 자기들 멋대로 조서를 꾸미고 나는 하지도 않은 또한 모르는 일들을 자기들이 비행기장이며 미사일 있는 데를 가리키며 이런 것들을 "김일성에게 정보제공하려고 했지"하며 시인하라며 그리고 자기 멋대로 작성한 조서에 무인을 찍으라며 갖은 고문을 하는 것이었다.
인권위 실태보고서에 자신의 사례가 실린 사실은 박상은씨도 몰랐다. 감옥에 있을 때 조카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그 편지가 민가협에 전달돼 인권실태보고서에 실린 것 아닌가 추측할 뿐이다.
긴 재심 싸움이 시작되다
▲ 그렇게 오랜 노력 끝에 박상은씨는 서울서부지방법원에 재심을 신청하게 되었다. 긴 재심 재판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 권우성
이 정도의 기록이 우리가 찾을 수 있는 최선의 증거였다. 비록 원 기록은 존재하지 않지만 몇몇 증인들의 진술과 기록을 바탕으로 재심을 신청하기로 했다. 이제 재심을 도와줄 변호인을 찾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나 이런 정도의 증거만을 가지고 재심을 도와줄 변호인을 과연 찾을 수 있을까? 아니 재심을 해 보겠다고 나서는 변호인이 있을까?
법리적 해석이 아닌 공감을 해줄 변호인을 만나고 싶었다. 그런 변호인이라면 분명 부족한 그 무엇을 채워줄 것이라 믿었다. 결국 그렇게 만난 변호인이 바로 '염전노예사건'을 맡고 있던 안산의 원곡법률 사무소였다. 그리고 수개월 논의를 거쳐 결국 서울서부지방법원에 재심을 신청하게 되었다. 그리고 긴 재심 재판의 싸움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