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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다샤 Aug 15. 2020

수상한 흥신소

[박상은 스토리 ②]"암스트롱이 달 착륙할 때 난 고문받고 있었다"



▲  "보안대 수사관들은 내가 월북하려고 한 사실 없다고 얘기해도 막무가내에요. 오히려 "이 빨갱이 새끼가 정신을 못차렸구만"하며 수사관 여럿이 달려들어 저를 더 때리는 거예요. 아휴, 정신없이 맞았죠." 당시 박상은씨는 때로는 몇 시간을, 때로는 밤새 구타를 당하며 10여 일을 보냈다.

ⓒ 권우성



15사단 보안대에서 춘천보안대로... 바뀐 건 없었다



희미하게 정신이 돌아왔다.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여기가 어디였는지 한동안 기억나지 않았다. 그렇게 몇 초가 흘렀을까? 자신이 탈영했다가 길을 잘못들어 최○○ 상병을 만났고 그곳에서 길을 물은 일이 기억났다. 그리고 보안대 수사관들에게 연행되어 왔던 것과 자신이 누워 있는 이곳이 15사단 보안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보안대 수사관들은 내가 월북을 하려고 탈영한 것 아니냐며 바른대로 말하라고 강요하며 구타를 했어요. 그런 적 없다, 월북하려고 한 사실 없다고 얘기해도 막무가내에요. 오히려 '이 빨갱이 새끼가 정신을 못차렸구만'하며 수사관 여럿이 달려들어 저를 더 때리는 거예요. 아휴, 정신없이 맞았죠."



때로는 몇 시간을, 때로는 밤새 구타를 당하며 10여 일을 보냈다. 그 기간 몇 차례 정신을 잃었는지 모른다. 심각한 타박상은 물론이고 무릎을 잘못 맞아 왼쪽 다리 무릎이 깨지기도 했다. 



"재판 다 받고 대구교도소로 이감을 했어요. 거기서 마당에서 운동을 하려는데 무릎에서 딱 소리가 나면서 엄청난 통증이 밀려오는 거예요. 의무과에 가보니 제 무릎을 덮고 있던 슬개골 뼈가 두 조각으로 부러졌지 뭐예요. 보안대에서 조사받을 때 이미 슬개골 쪽에 통증이 있었는데 참고 있다가 그렇게 부러져 버린 거죠. 얼마나 맞았으면..."



10여 일이 지난 어느날 그는 들것에 실려 차에 태워졌다. 그를 태운 지프가 한참을 달려 간 곳은 춘천보안대였다. 그곳에서의 조사 역시 15사단 보안대에서 받은 조사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15사단에서 고문받으며 허위로 작성된 조서를 바탕으로 조사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그곳에서 세 사람을 만났다.



"춘천보안대에 끌려가서도 곤죽이 되게 맞고 있던 어느 날 제가 근무하고 있던 부대의 중대장(당시 계급은 대위)이 방문을 했어요. 아마도 그 중대장 역시 조사를 받기 위해 방문했던 것 같아요. 그 중대장이 저더러 성실하게 근무하던 병사가 왜 이렇게 되었느냐고 물어보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경위를 차근차근 설명했죠. 제 이야기를 다 듣고 나더니 자기가 수사관들에게 이야기 잘 했으니 잘 해결돼서 나오면 좋겠다는 말을 하고 가 버렸어요. 그리고 며칠 후 이○○ 선임하사가 찾아왔는데 '고소하다', '잘 되었다'는 듯이 얘기를 하더라고요. 사람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고문이 심해졌다





▲  수사관들은 박상은씨를 움직이지 못하게 묶고는 손톱 밑에 핀을 꽂고, 거기에 전깃줄을 감아 전류를 흘려보냈다. 당시 엄청난 고통에 몸부림쳤지만 고문을 피할 방법은 없었다. 그것으로 끝나지도 않았다.

ⓒ 권우성




그가 가장 심각한 고문을 받았던 것은 북한과 관련한 내용을 추궁받을 때였다. 박상은씨가 강화에 살던 1959년도에 '사라'호 라는 강력한 태풍이 몰아친 적이 있었다. 그 태풍으로 조업하고 있던 어선 중 몇 척이 북한쪽 영해로 휩쓸려 올라가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때 납북되었다가 돌아온 어부들로부터 북한과 관련한 이야기를 들은 바가 없느냐는 추궁이 집중되었다. 



"보안대 수사관들이 아주 더러워요. 북한이 살기 좋다고 하더냐, 무슨 음식을 주더냐 등등의 이야기를 묻는데 그런 사실이 없으니 그런 적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잖아요. 나는 그런 사람들을 만난 적도 없고, 객지에서 여러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내용을 잘 모른다고 했더니 수사관들이 '야, 이 새끼야. 북한에서 쌀밥을 줬다든지 보리밥을 줬다든지, 소고깃국을 줬다든지, 시래깃국을 줬다든지, 뭐 있을 것 아냐'하며 뭐라도 들은 것이 없느냐는 추궁을 하면서 조서를 쓴 겁니다. 제가 그런 조서는 인정할 수 없다고 하니까. 아휴..."



수사관들은 그를 움직이지 못하게 묶고는 손톱 밑에 핀을 꽂았다. 고통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그곳에 전깃줄을 감아 전류를 흘려보냈다. 당시 엄청난 고통에 몸부림쳤지만 고문을 피할 방법은 없었다.



"얼마나 고통이 심한지 몰라. 손톱 밑에 작은 가시만 박혀도 힘든데, 쇠바늘을 꽂아서 전기를 흘려보내니 차라리 죽는게 낫겠다 싶을 정도로 힘들더라고. 전기가 흐를 때마다 고통에 몸부림쳤는데 그때 엄지손가락을 찔렸던 흉터가 아직도 문신같이 남아 있어요."



고문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고문에 몸부림치며 저항하자 그를 책상과 책상 사이에 걸친 목대에 바비큐 하듯 묶어 놓고 얼굴에 하얀 수건을 씌운 후 뜨뜻미지근한 액체(매운 맛의 우동향이 나는)를 뿌렸다. 숨을 쉴 수가 없고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재채기가 나기도 했다. 그렇게 며칠간 계속된 고문으로 입안이 다 터져버려 음식을 먹을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그는 물만 마셔댔다.



훈련소 입소 동기 문씨의 등장... 회유



"며칠 지나 얼굴과 입 안의 부기가 가라앉자 수갑을 채워 식당으로 데려가더라고요. 걷는 것도 힘들어서 고개를 푹 숙이고 식당에 들어가는데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는 거예요. 얼굴을 들어 이름 부르는 쪽으로 쳐다보니 훈련소 입소 동기인 '문○○'이더라고요."



보안대에서 훈련소 동기를 보자 너무 반가웠다. 보안대에 어떻게 와 있느냐고 묻자, 문○○은 '통신병으로 이곳에 파견되어 왔다'는 대답을 했다. 박상은을 식당으로 데려가던 보안대 수사관이 누군지 아느냐고 묻길래 군대 동기라고 대답했다. 수사관은 그러냐고만 대답했다.



"그날 저녁에 제가 있던 조사실로 낮에 만난 문00을 데려왔어요. 그러더니 저와 문○○ 손에 수갑을 채워 함께 내무반 구석에서 자도록 했어요. 그전까지는 계속 혼자 지냈는데 같이 재우니 이상하잖아요.



그날 저녁 문○○이 잔뜩 부어 있는 제 몸을 물수건으로 계속 닦아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여기 이렇게 있으면 죽는다. 그냥 거짓말로 시인하고 검찰에 가서 그때 네 주장을 말하면 된다. 여기서 죽으면 개죽음이다'라고 말하는 거예요. 저는 문○○에게 '야, 내가 하지도 않은 일을 했다고 하면서 빨갱이로 몰아가는데 어떻게 시인을 하느냐'고 대답했죠. 그러자 문○○이 '시인하면 길어야 5, 6개월인데 여기 있으면 죽어'라고 말하는 거예요. 이건 완전히 보안대 수사관들 회유하는 말하고 똑같은 말로 나를 회유하는 거죠."



협박 "너 죽이는 건 쉬운 일이야!"



군대 동기를 내세워 회유하려는 보안대 수사관들의 시도가 별 소득이 없자 이번에는 박상은을 데리고 춘천 시내에 있는 봉의산 꼭대기에 올라갔다. 그곳에서 수사관들이 손으로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자 비행기 활주로가 보였다. 수사관들이 박상은에게 무슨 비행장인지 아느냐고 해서 모른다고 하자 미군비행장이라고 알려주었다. 그리고 그 비행장에서 보이는 비행기의 종류 또한 모두 알려주었다. 



"그렇게 비행장을 보여주고 보안대 조사실에 들어와서는 제가 그 비행장 기밀을 북한에 알려주려 했다는 내용으로 조서를 꾸미는 겁니다. 아니다, 그런 적 없다고 하니까 수사관들이 '이 새끼 아직도 정신 못차렸구만, 너 죽이는 건 쉬운 일이야. 남해까지는 멀어서 안되겠고 동해에 수장시켜 줄까? 네 까짓것 하나 죽어도 쥐도 새도 모르고 네 가족도 몰라'라며 협박하며 고문을 또 하고..."



박상은은 그곳에서 받은 고문의 횟수만 15~16회 정도로 기억한다. 왼쪽 다리는 극심하게 부어서 걸을 수 없을 정도가 되었고 옷에 피가 묻어나자 그 다리는 제외하고 고문을 하기도 했다.



TV에서는 달 착륙 뉴스가 흘러나오고




▲  "헌병대 독방에 감금되어 있는데 간수석 위에 작은 텔레비전이 틀어져 있었어요. 텔레비전에서는 닐 암스트롱이 달에 착륙(1969. 7. 20)했다는 뉴스 장면이 나오고 있었어요." 어떤 곳의 문명은 인간을 달에 보냈지만, 어떤 곳의 문명은 인간을 고문해 범죄를 조작하고 있었다.

ⓒ kbs 화면 캡처




하루는 서울에 다녀왔는데 덕수궁 쪽 방면의 벽돌건물이었다. 



"그곳 빈방에서 한참을 혼자 있었는데 벽 너머 옆방에서 '대충 처리하자', '죽이든 살리든 춘천보안대'에서 알아서 하겠지' 등등의 말소리가 들렸습니다." 



밥도 주지 않고 저녁까지 두었다가 다시 차를 타고 춘천보안대로 돌아왔다. 군검찰인가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그렇게 체포된 지 50여 일이 지난 어느 날 그는 2군단 헌병대로 이송되었다. 



"헌병대 독방에 감금되어 있는데 간수석 위에 작은 텔레비전이 틀어져 있었어요. 텔레비전에서는 닐 암스트롱이 달에 착륙(1969. 7. 20)했다는 뉴스 장면이 나오고 있었어요."



인간의 문명은 인간을 달에 보내는 시대에 이르렀지만 대한민국은 전기고문을 통해 범죄를 조작하는 야만의 시대를 살고 있었다. 



"헌병대에서 10일 정도 있다 보니 군검사(김원준 검사)가 불러요. 보안대 조서를 들고 질문을 하길래 다 사실이 아니라고 했죠. 그랬더니 검사라는 놈이 각목같은 걸로 30분 넘게 때리더라고요. '네가 안 한 얘기가 조서로 쓰였단 말이야? 여기 찍혀 있는 지문이 네 지문 아니야?'라며 때리는데 여기서도 틀렸구나 생각했죠."



보안대나 헌병대나... 사형 구형, 무기 선고... "진실 밝혀질 날이 올까요?"



헌병대에 머물며 재판에 나가게 되었다. 피고인들을 몇 줄로 앉혀놓고 검사가 하나하나 이름을 부르며 구형을 했고 박상은에게는 사형을 구형했다. 그 후 40여 분 정도 휴정이 있고 난 뒤 선고를 했는데 박상은에게는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그는 무기징역형의 뜻을 잘 몰랐다. 그 후 그는 남한산성에 있는 육군교도소로 이감되어 그곳에서 항소심과 대법원 재판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범죄사실과 형량은 변하지 않았다. 



"20여 년간 억울한 징역살이를 살고 나와 늦게 가정을 꾸렸어요. 범죄자로 고통 받았던 그 시간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겠어요? 재심을 해서 진실이 밝혀지고 저와 저의 가족이 떳떳하게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갈 수 있는 날이 올 수 있을까요? 그런 날이 올까요?"




▲  재심으로 진실이 밝혀지고, 오랜 세월 박상은씨와 가족이 겪은 고통은 나을 수 있을까. 그런 날이 올까.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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