펼치지 못한 플랭카드-보성간첩단 사건 1
“아버지가 눈이 안보이시는 분인데 간첩을 했다는 거예요. 얼마나 기가 막혀요.”
마포 역 근처 카페에서 만난 망 정종희 씨의 따님은 아버지에 대한 억울함을 그렇게 호소했다.
“아버지는 한국전쟁 당시 토벌군의 총탄에 맞아 두 눈을 잃어서 저렇게 고생만하다가 그렇게 세상을 떠나셨어요.”
그는 실명(失明)했지만 마음만은 잃지 않았다. 그는 앞이 보이지 않지만 늘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참여했다. 고향 보성에서 서울까지 촛불집회에 참여할 만큼 왕성하게 활동했던 그는 결국 다친 눈으로 인해 쓰러져야 했다.
“아버지는 전남 보성의 제법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어요. 큰 조카 정해룡은 해방 당시 여운형 선생이 이끈 근로인민당 중앙위원을 지냈고, 작은 조카 정해진은 서울시 인민위원회 선전부장을 맡다가 1950년 9.28 서울 수복 때 월북을 했나 봐요. 1967년에 정해진이 집으로 찾아왔는데 그때 잠깐 만난 이유로 1980년에 국가안전기획부(이하 안기부)에 연행되셨어요. 어찌나 모진 고문을 받으셨는지 몰라요. 아버지는 결국 간첩으로 조작되어 징역 12년을 선고 받았고, 큰 조카의 아들 정춘상은 사형을 당하는 고초를 겪었지요.”
“앞도 못 보는 아버지가 6.25때 사라졌던 조카가 간첩질을 하란다고 무전을 듣고 해독을 해줬다는 거예요. 나중에 아버지가 출소해서 간첩으로 조작된 이야기를 간간히 해주시는데 마음이 너무 아픈 거예요. ‘안기부에 있을 때 제일 무서운 것이 어디서 날아오는지도 모르는 주먹과 각목이 나를 막 때리더라’고 하시는 거예요. 앞도 못 보는 사람이 날아오는 주먹을 피하겠어요? 그러니 날아오는 주먹과 발길질을 고스란히 다 몸으로 받아내신 것이죠.”
두 눈을 실명한 정종희 씨가 광주교도소에 수감되자, 그곳에 있던 보안수들이 무슨 일로 들어왔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정종희 씨가 무전간첩죄로 들어왔다고 하자, 그곳의 보안수 재소자들이 혀를 찼다고 한다. 이제는 간첩을 만들다만들다 앞 못 보는 사람을 간첩으로 만든다며 정말 해도 너무한다고 분통을 터트렸다고 한다.
▲ 선고 후 변호사와 이야기를 나누는 유족. 이날의 선고에 유족은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 변상철
왜 이렇게 까지 억울한 일을 그냥 묻어두고 살았느냐는 질문에 따님은 무서웠다고 한다.
“나는 아버지가 간첩이라는 이유로 엄청나게 주눅 들어 살아야 했어요. 시댁과 남편에게 한마디 말도 못하고 죄인처럼 죽어지냈어요. 집안에 무슨 일이 생기면 그게 다 저 때문에 생긴 일같았거든요. 큰 오빠는 교직에 있었는데 혹시라도 교직을 그만둘까봐 아무소리도 못하고 지냈죠. 남동생도 마찬가지고요. 그러니 어디서 나 억울하네 하는 소리를 할 수 있었겠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그녀는 생각했다고 한다. 앞도 보지 못하는 상태에서 수십일간 중앙정보부에서 모진 고문을 통해 ‘간첩’, ‘빨갱이’가 되어 결국 그 억울함을 풀지 못하고 돌아가신 아버지의 억울함을 풀어봐야겠다고. 그리고 이 일로 파탄 난 가족과 형제들의 명예를 회복해보고 싶다는 마음에서 그녀는 이렇게 용기 내어 세상에 나오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보성에서 초등학교 다닐 때 학교 끝날 시간이 되면 아버지는 늘 마을 어귀에 나와 우리를 기다리고 계셨어요. 우리가 오면 한껏 안아주시고, 손을 잡고 함께 집에 가시던 마음 따뜻한 분이셨어요. 눈이 보이지 않았지만 늘 누구에게 의지하지 않고 본인 일은 본인이 스스로 해결하려고 하셨죠. 눈이 보이지 않는 분이 도끼로 나무를 쪼개고, 상을 차리고, 물건을 정리하고, 만들고 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으시는 자주적인 분이셨어요. 저는 아버지가 한 번도 장애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아버지가 보지 못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던 분이셨거든요. 그런 아버지가 범죄자라고 나는 생각하지 않아요. 나라가 분단되어 이산된 가족이 겪어야하는 아픔이잖아요. 분단된 나라에 살지 않았다면 우리 아버지같은 분이 왜 범죄자가 되시겠어요.”
그렇게 그녀의 재심은 시작되었다. 그녀는 재심을 위한 안기부의 수사기록과 재판기록을 구하기로 했다. 우리는 재심을 위해 사건의 조작근거를 찾던 중 「국정원과거사건진실규명을통한발전위원회보고서」에 등장하는 사람 하나를 찾았다. 바로 ‘도원 1호’
국정원과거사건진실규명을통한발전위원회 보고서 중 ‘학원․ 간첩편 Ⅳ’에 의하면 ‘도원 1호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 1980년대 초반에 월북자 가족 사건이 잇달아 발생한 것은 ‘도원 1호’라는 북한의 고위공작원의 등장과 깊다. ‘도원1호’는 북한의 부부장급 고위공작원으로 그를 체포한 것은 남쪽의 대공활동에서 가장 성공적인 공작으로 평가된다.(276페이지)
- 10.26사건 이후에 군 고위장성 출신으로 우방국의 대사로 나가있던 사람을 포섭하기 위해 2명의 고위공작원을 잠입시켰다가 역공작에 걸려 두 명 모두 체포되어 한국으로 송환된 일이 발생했는데, 그 중 전향한 ‘도원 1호’는 놀라운 기억력의 소유자로서, 북의 대남사업과 관련하여 아주 고급의 정보를 엄청난 양으로 제공하여 이 정보가 단초가 되어 남파가능성이 높은 월북자들과 그들의 연고자들에 대한 내사가 광범위하게 진행된 것이라고 한다. 진실위는 문서조사에서 1980년도에 ‘월북자 연고인 조사’나 ‘월북 및 행불자 명단’ 작성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진 것은 확인할 수 있었으나, 개개인에 대한 자료만 찾았을 뿐 월북자 전체에 대한 조사계획이나 결고보고서는 발견하지 못하였다(277페이지)
▲ 무죄 선고가 날 경우를 대비해 준비했던 현수막, 결국 이 현수막을 펼치지 못했다.
ⓒ 변상철
그렇다. 실제 ‘도원 1호’의 제보로 인해 1980년대 남한에서는 공안의 광풍이 불었다. 진도의 ‘석달윤 일가 간첩사건’, 같은 진도의 ‘박동운 일가 간첩사건’, 그리고 보성의 ‘보성 간첩단 사건’ 등이 ‘도원 1호’의 기억력에 의존해 벌인 사건이었다. ‘놀라운 기억력의 소유자’ ‘도원 1호’의 제보에 의해 수십 명의 연행자와 구속자, 그리고 실형 선고자가 나왔다. 그리고 김정인, 정춘상 등 사형을 선고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사람들도 생겨났다.
그러나 안기부에서 그렇게 치켜세운 ‘놀라운 기억력의 소유자’ ‘도원 1호’의 제보에 의해 벌어진 사건들은 시간이 지나며 하나 둘씩 금이 가기 시작했다.
먼저 진도간첩단 사건의 2건, 즉 박동운 일가 간첩사건과 석달윤 간첩사건이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원회)에서의 조사를 통해 고문 조작되었음이 확인된 것이다. 박동운 사건의 경우 북에 다녀오지도 않은 박동운을 북에 다녀왔다고 허위조작하면서 심각한 고문을 자행했던 것이다. 석달윤 사건 역시1980년 8월 석달윤을 연행하여 50일간 고문하면서 간첩으로 조작, 18년간 억울한 옥살이를 해야 했다. 당시 고문은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운 고문들이었다.
진실화해위원회의 이러한 조사를 통해 석달윤 등 간첩사건은 2007. 6. 26.에, 박동운 일간 간첩단 사건은 2009. 1. 5.에 각각 진실규명 결정이 되었다. 석달윤사건은 2009. 1. 22. 무죄가 확정되었고, 박동운 사건 역시 2009. 11. 13. 법원으로부터 무죄가 확정되었다.
1980년 당시 도원1호의 제보에 의해 시작되었다는 이 사건 역시 1960년대에 남파된 조카를 만났다는 사실을 확대하여 간첩으로 조작한 것이다. 심지어 정종희는 앞을 못보는 상황이라 당시 북에서 내려왔다는 조카를 눈으로 확인한 적도 없다. 그러나 그는 간첩이 되었다.
박동운을 조사했던 안기부 수사관 중 유00 수사관은 진실화해위원회 조사에서
- 먼저 연행한 후 조사하고 나서 송치단계에서 수사서류를 작성하다보니 이렇게 (서류가)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공사건의 경우 법적 요건을 맞춰 수사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역용공작, 회유공작 등 설득하는 기간이 상당히 되기 때문에 그 기간에는 조사가 이뤄지지 않는 거죠. 그러다 보니 구속기간을 따져가며 간첩사건을 한다는 것은 무리라고 볼수 있는 것이죠.(「진실화해위원회 제6차보고서 04권」 중 434쪽)
라고 진술하였고,
정종희를 심문한 적이 있는 이00 수사관은 박동운 조사와 관련하여
- 당시는 영장 없이 중요한 죄가 있다고 인정되는 피의자에 대해서는 그냥 데리고 와서 수사를 한 후 구속 여부를 결정하였고, 수사관행상으로 끌고왔다기보다는 데리고 왔다는 말이 맞을 것이며, 그렇게 오랫동안 데리고 수사를 하는 것이 관행이었고 간첩 수사가 어려운 수사라 기간이 오래 걸리기도 하였을 것입니다.(「진실화해위원회 제6차보고서 04권」 중 434쪽)
라고 진술하여 불법 연행이 있었음을 시인하고 있다.
가혹행위와 관련하여
박동운 사건에 참여햇던 이홍식은
- 당시에 중정에서 조사를 하면서 손끝 하나 안 건드리고 조사하는 사람이 어디 있었겠습니까. 막말로 당시에 피의자를 때리거나 한는 것을 보더라도 함부로 대꾸하지 못할 시절이었습니다. 상부에서 저에게 때리라고 시켰으면 거부할 시절이 안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명단에 포함되어 있다면 폭행에 다 같은 책임을 져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 처음 수사국에 와서 선배들이 간첩을 조사할 때 때리거나 하는 조사를 불가피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당시 피의자의 건강상태를 점검한 후 상처가 깊은 경우 의무실에 배당된 담당 의무관에게 치료를 하도록 합니다. 또한 멍을 지우기 위해 뜨거운 목욕을 시켜주기도 하고, 가벼운 상처의 경우 수사관들이 안티프라민 정도를 발라주었을 것입니다.
라며 고문사실을 인정했다.
이러한 명백한 진술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망 정종희는 진실화해위원회나 재심을 신청하지 못했다. 간첩가족이라는 사회적 편견, 차별의 시선이 두려웠고, 진실화해위원회나 법원에 재심을 신청해도 진실이 밝혀지거나 무죄를 받는다는 확실한 보장이 없었기에 다시 상처를 건드리지 말자는 심정으로 재심을 주저했던 것이다. 그러나 같은 시기 벌어진 박동운, 석달윤 사건이 재심에서 무죄를 받으면서 용기를 냈다고 한다.
▲ 피고인을 고문했던 관여 검사, 수사관이 재판에 참여했음에도 공정한 재판이 될 수 있을까?
ⓒ 변상철
그러나 지난 8월 13일 재심 재판부는 이해할 수 없는 판결을 선고했다.
“재심개시 이후 이 법정에서 ‘피고인이 원심 법정에서 재판을 받을 당시에 피고인에게 허위 자백을 강요하고 가혹행위를 가한 수사검사가 직접 공판검사로 법정에 출석함으로서 피고인과 공동 피고인들로 하여금 심리적 압박을 느끼게 하였고, 위 공판검사가 반말과 고압적인 말투로 위협적인 분위기를 조성하였으며, 이에 더하여 공판기일에 10여명의 중앙정보부 수사관이 배석하는 등 고문으로 인한 심리적 압박감이나 정신적 강압 상태가 재심 개시 전 이 법정에서 이루어진 진술 당시까지 계속되었다”는 변호인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재판부는 재심 선고에서 망 정종희를 징역 3년 6월으로 선고하였다. 고문을 했던 수사관이 법정에 배석한다면 어떻게 임의성있는 이야기를 재판에서 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에 더해 중앙정보부 수사관과 사전에 잘 알고 있던 검사가 반말과 고압적인 말투로 물어본다면 어느 피고인이 제대로 된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재판의 공정성이나 진술의 임의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이번 판결로 유족은 다시 한 번 울어야 했다.
결국 유족은 준비해 간 현수막을 펼치지 못했다. 그러나 펼치지 못했을 뿐 포기한 것은 아니다. 재판부의 판단이 얼마나 어리석은 판단인지 꼭 보여주겠다고 한다. 그리고 꼭 펼치지 못한 현수막을 크게 걸어 세상 사람들에게 진실을 알리겠다고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