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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영노트 Mar 23. 2021

네가 버린 그 일

내 일은 내가 만든다


업무분장이 뒤섞인 팀에서 4년을 꼬박 일했다. 팀장님은 일이 생기면 업무분장을 고려하기보다는 일단 보이는 직원에게 시키시곤 했다. 늘 자리를 지키고 있는 데다가 막 시키기 딱 좋은 신입사원이었던 나에게 그 일의 대부분이 돌아왔고, 내가 본래 맡은 일보다 더 많아졌다. 이럴 거면 업무분장은 왜 하는 건지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았다. 누가 나에게 무슨 일을 담당하냐고 물어보면 하나를 콕 집어서 이야기하기 어려운 그 상황이 불편하고 불만족스러웠다. 이 팀에서는 더 이상 내 정체성을 찾을 수도, 만들어낼 수도 없었다. 게다가 회사 생활이라는 것이 상사를 내 입맛에 맞게 바꿀 수 없는 구조이기에 일단 참고 기다리는 것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5년 차에 대리로 승진하면서 새로운 팀으로 탈출할 기회가 생겼다쥐구멍에도 볕 들 날이 있다더니과연 나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기회를 놓칠세라 전보 신청이 뜨자마자 바로 지원했는데 결국 내가 원하는 팀으로 옮겨갈 수 있었다일하는 장소가 바뀌고함께 일하는 사람이 바뀌고내 직책까지 바뀌니 새로 태어나는 기분이었다묵은 때를 벗겨내듯 그동안의 찌든 시간들은 말끔히 털어내기로 했다마침 새로운 팀에 계셨던 차장님이 교육파견을 가시면서차장님이 하셨던 일들은 자연스럽게 나의 일이 되었다내가 해야 할 일이 명확해지니 내 영역을 제대로 만들어보고 싶은 의지가 불끈 생겼다





 

내가 맡은 일 중의 하나는 ‘안내 사이니지(signage) 관리’였다. ‘사이니지’란 공항 안에 위치한 여러 시설의 위치를 알려주거나 서비스를 안내하기 위한 안내 시설물인데, 관리해야 하는 대상이 꽤 많았다. 공항의 특성상 운영현황이 자주 바뀌기 때문에 안내 문구를 바꾸어야 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글자 한 자만 바뀌어도 교체해야 되는 시설물의 수는 어마어마했고, 매일 여객들이 오고 가는 곳이기에 최대한 신속하게 교체 업무를 끝내야 했으므로 늘 시간에 쫓길 수밖에 없었다. 후배와 함께 그 일을 나누어 진행했었는데, 일이 번거로운 반면 사업비가 낮아 티가 많이 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일을 더 이상 하고 싶어 하지 않았고, 결국 빠지기로 했다. 나는 뭐 바보라서 이렇게 티 나지 않는 일을 하는 줄 아는가. 누군가가 하기 싫은 일을 내가 혼자 도맡아서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감정에 휘둘리기에는 내 의지가 아까웠다. 오히려 이 상황이 어쩌면 나에게 큰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 2021 겨울향기


 

‘사이니지’ 관리 업무의 큰 특징은 정답이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내가 여러 대안을 만들면 그중에서 최적의 대안을 선택해 적용하면 된다. 나의 시선, 나의 생각에서부터 일이 시작되기 때문에 일 전체를 내가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일을 처리할 때 통제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꽤나 큰 장점이다. 일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의 큰 방향성은 유지하되, 나만의 색을 입혀보기로 했다. 손으로 이것저것 그려보고, 정해진 규격 안에서 디자인을 해보고, 공간과 어울리는 색상을 고르고, 시인성이 좋은 위치에 배치를 하는 일련의 과정들이 나에게는 놀이처럼 느껴졌다. 현장에 나가면 아이디어가 샘솟았고, 사무실로 돌아와 정리하는 것도 재미가 있었다. 게다가 사인물 사업 발주를 하고 계약을 맺은 시공사 담당자들과 만나 아이디어를 조율하고 현장에 설치하는 과정도 흥미로웠다. 회사 일이지만 마치 내 사업을 하고 있는 것과 같은 기분이었다. 내 일이라고 생각하니 일에 대한 책임감은 자동 충전되었다. 야간작업이 있는 날에도 어김없이 현장을 지켰고, 어둠이 내린 고요한 공항의 분위기를 온전히 만끽할 수 있는 기쁨도 누렸다. 그렇게 나는 나의 영역을 진하게 만들어냈다.





 

새로운 팀으로 옮겨가며 나의 환경을 바꾸고, 후배가 걷어차 버린 그날을 기회로 삼은 것을 계기로 지금의 나는 정체성을 되찾고 존재감까지 높일 수 있었다. 더불어 일을 대하는 태도까지 다시 점검하며 나의 영역을 탄탄히 다질 수 있었다. 직장에 몸을 담고 일을 하다 보면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불편함을 느끼기도 하고, 나도 모르게 내 영혼을 갉아먹는 존재들에게 나를 내어주기도 한다. 반면에 생각지 못한 기회가 불쑥 찾아와 나를 변화시키기도 하며, 내가 직접 기회를 찾아 나설 수도 있다. 어떻게 들어온 곳인데, 어렵게 들어온 만큼 내 입지를 다지며 즐겁게 일해야 하지 않겠는가. 내가 있는 곳이 어디든지 내 일은 내가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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