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많은 모임들의 귀결)
세월은 모임도 변하게 했다.
세월은 건강을 외치게 했다. 고등학교시절부터 60년 가까이 만났던 친구들, 이젠 그들도 건강이었다. 만남도 멋스러운 술집이나 맛깔스러운 식당이 아닌 근교의 야트막한 산이다. 어느 봄날 분기별 친구들의 모임, 단체 모임방 메시지 내용이다. 상당산성에서 11시부터 한 시간 산행하고 점심을 한다는 소식이다.
상당산 계곡을 따라 돌을 쌓아 올린 상당산성엔 다양한 산행 코스가 있고, 코스에 따라 적당한 시간을 조절할 수 있다. 계절 따라 다양한 꽃이 피고, 먹거리와 볼거리가 가득한 나들이 명소다.
친구들의 모임은 젊음의 일사불란함이 아닌 늙음에 따른 느슨한 일정이다. 조금 가까운 듯하면 두어 시간 산길을 따라 산행을 해도 좋다. 산성을 따라 한 시간 정도 산행을 하거나, 식당으로 직접 와도 되는 모임이다. 개인의 컨디션에 따라 산행을 하면서 식사 시간을 맞추면 된다. 몇 년 전부터 모임의 달라진 풍경이다. 적당한 운동을 하고 저녁 대신 점심을 한다. 어느 선배의 말이 생각난다.
산행을 하던 10여 명의 친구들이 장소에 따라 인원이 달라진단다. 출발지부터 함께 출발하는 사람, 중간에서 합류하는 사람 그리고 식당으로 오는 친구들이 있단다. 각자의 컨디션에 따라 삶을 이어가는 세월임을 알게 한다. 선배들의 일이 어느덧 우리 삶이 되었고, 어느 순간엔 후배들 이야기임은 누구나 알고 있다. 각자의 산행 후에 10여 명의 친구들이 식당에 모였다.
술자리에 평화가 찾아왔다.
술은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거리가 아니다. 소주와 맥주가 섞이고, 연달아 사장님을 부르던 모임이 이젠 막걸리 두어 병이면 충분하다. 술은 같은데 소주는 건강에 좋지 않다며 막걸리를 마셔야 한단다. 그것도 한두 잔이면 족하고, 싫다 하면 되묻지도 않는다. 운전자에겐 술 잔도 주지 않는 술자리에 평화가 찾아온 것이다. 주거니 받거니 억지를 쓰던 세월이 갔고, 세계의 평화가 술자리에도 온 지 오래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 이야깃거리는 당연히 건강이다. 건강이 손주 이야기를 넘어선 것이다. 누구는 허리 수술을 했고, 무릎이 아프다며 어느 병원이 좋다 한다. 건강보험료가 많다 하니 내 병을 고치는 것인데 아까워하지 말라 한다. 건강보험이 아니었으면 병원도 다닐 수 없다는 말, 이젠 건강이 우선이 된 친구들이다.
가야 할 곳은 병원과 약국이고, 돈도 명예도 쓸데없는 것이었다. 희끗희끗한 머리칼이 대세지만, 아직도 어설픈지 염색을 하기도 한다. 젊음은 가난해서 허덕였고, 늙음엔 푸석해진 몸이 슬프다지만 아직은 건재한 고희를 넘긴 친구들이다. 두어 시간 산행도 하고, 당구장을 드나들며 가끔은 자전거로 장거리 나들이도 한다. 고기보다 나물을 찾고, 술맛보다 물맛이 좋다 한다. 이제야 철이 들었음을 세월이 슬쩍 알려주는 사연이다.
배가 불러도 맛있다며 숟가락을 부여잡았다. 배를 두드리며 먹던 음식은 이젠, 오래전의 이야기다. 서둘러 숟가락을 놓는 친구가 한마디 한다. 이젠 배가 부르면 불편해서 살 수가 없다 한다. 적당히 먹는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막걸리 두어 잔에 간단한 점심이 끝났다. 술이 건네지며 끝날 줄 몰랐던 술자리는 오간 데 없다. 다음은 어디로 가야 할까도 고민거리가 아니다. 당연히 주변의 카페로 향하는 어르신들이다.
지켜야 할 건강이 아직 멀었다.
친구들과 들어선 카페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늙음으로 망설였던 카페가 대부분 어르신이다. 어르신을 꺼리며 불편해하던 분위기는 변했다. 늦은 밤에 찾았던 카페, 문을 닫아야 한단다. 안에는 젊은이들이 가득한 커피점이다. 어르신들이 대세이니 카페도 변한 모습에 오래 전의 불편함을 잊게 해 준다. 사장님이 고맙다며 빵 한 접시를 놓고 간다. 깜짝 놀라 웬일이냐 하니, 찾아 주셔서 고맙다며 허리 굽혀 인사를 한다.
이차의 술자리가 이어지고, 다음은 노래방이었다. 다시 술 한잔을 하고 또 해장해야 했다. 오래전의 이야기가 따사한 카페에서 이어진다. 다양한 메뉴판이지만 서슴없이 주문한다. 커피믹스에 진심이었던 친구들의 삶이 달라졌고, 비싸다며 비켜가던 커피집에 단골이다. 아보카도를 주문하고 에스프레소를 찾는다. 스무디가 주문되고 아이스커피가 등장한다. 도저히 상상되지 않던 광경이 펼쳐지고 있다. 술자리가 커피점으로 옮겨지고, 젊음과 다름없는 주문을 한다. 고집스러운 술 노래가 커피 메뉴로 변한 것이다.
세월은 그렇게 변했고, 편안하고 안락한 모습은 부러웠던 외국의 노천카페 풍경이다. 커피 한잔과 맥주 한 잔으로 한나절을 즐기던 그들, 부럽기도 했던 이야기가 노년의 삶이 되었다. 나름대로 삶을 이야기하며 서두름도 없다. 한시도 편한 시간이 없던 친구들이 변한 것이다. 한 친국가 일어선다. 온 길을 되돌아가려면 시간이 걸린다며 길을 서두른다. 각자의 삶으로 돌아가야 하는 고희를 넘긴 친구들, 아직도 건강을 지켜야 할 시간이 많이 남아 있는 어르신들이다.(2026.4.14. 오마이 뉴스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