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주택의 꿈 , 부탄의 아름다운 풍경 )
자그마한 시골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를 다닐 때까지 큰 도시를 가본 적이 없는 시골생활에 익숙했던 나였다. 작은 논두렁을 지나 친구 집엘 가야 했고, 비가 오면 진흙 길을 검은 고무신 신고 다녀야 하는 것은 언제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도 차가 다니는 큰길에 나가면 많은 차들을 볼 수 있었지만, 작은 동네까지 차가 온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나마 외갓집이 우리 동네보다 조금 큰 도시였지만, 외가에 갈 때도 버스를 타고 중간에서 내려 걸어갔기에 도시를 구경하기는 언제나 힘들었다.
시골생활에 익숙한 나는 초등학교를 들어가서 깜짝 놀란 것은 다름 아닌 운동장의 크기였다. 세상에서 평평하고도 제일 넓은 땅은 우리 동네에서 아이들과 매일 뛰어노는 동네 마당인지 알았는데, 세상에 이렇게 평평하고 큰 땅이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동네의 부자라는 사람의 논을 봐도 이 정도보다 크지 않은데, 한쪽 끝에서 저쪽 끝이 보이지 않으니 말이다. 이렇게 하여 시작한 초등학교 시절은 깜짝 놀라는 일의 연속이었다.
멀리서 학교를 다니는 덕에 언제나 시간에 쫓기며 살아야 했다. 비가 와도 할 수 없이 걸어서 가야 했고, 걸어가야 하는 학교길에 우산만 있어도 대단한 자랑거리였다. 허접한 비닐을 쓰고 비를 피해야 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먼 학교를 걸어 다녀야 하기에 뜀박질하는 것은 그냥 할 수 없이 하는 일이었다. 시작시간에 늦지 않으려면 달리기를 잘할 수밖에 없었다. 천부적인 소질이 없는 한, 모두는 달리기를 잘해야만 하는 시골살이였다. 이렇게 하여 시작한 달리기에 대한 추억은 시작된다.
한 학년에 두 학급씩이지만 대략, 한 학급이 60여 명이 되는 제법 커다란 시골학교를 다녔다. 조막만 한 것들이 책상에 앉아 공부를 한다는 것도 대단했지만, 먹을 것이 부족했던 시절의 학교생활이란 어렵고도 고단한 생활이었다. 시골에서 그런대로 살아가는 집이었기에 근근이 도시락은 싸가지고 다녔지만 많은 친구들은 그렇지 못했다. 도시락을 가지고 오지 못하는 친구들도 많았고, 가방이 없던 시절이었으니 보자기에 책을 싸서 어깨에 둘러메고 다녀야 했다. 간혹 부잣집 아이이거나 외지에서 전학을 온 아이들은 가방을 들고 다녔는데 언제나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집안이 어려워 도시락을 가지고 다니지 못하는 친구들이 많았던 시기였기에 학교에서는 어려운 학생들을 중심으로 강냉이 죽이 제공되었던 시절이었다. 물론 국가적인 지원이 있었겠지만 노랗게 생긴 죽을 커다란 커다란 통에 가지고 오면, 아이들이 길게 줄을 서서 죽을 받아가곤 했다. 하지만 도시락을 가지고 올 수 있는 집으로 분류되어 나는 강냉이 죽을 먹을 수 없었다. 노랗게 생긴 강냉이 죽이 먹고 싶어 친구들에게 한 숟가락씩 얻어먹으며 다니던 그런 학교 시절이다.
모두가 어렵지만 즐거운 학교생활을 하던 중, 학교에서는 달리기 선수를 선발한다는 소식과 함께 모든 아이들에게 달리기를 시키는 것이 아닌가? 지금 생각해보면 크지도 않은 운동장에서 달리기를 했지만, 운동장을 돌아오는 과정은 엄청나게 힘이 들었고, 어찌 된 일인지 내가 달리기 선수로 뽑힌 것이었다. 그렇게 잘 뛴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먼 학교길을 오갔던 덕분에 선수로 선발되어, 생전 입어 보지도 못했던 화려한 운동복을 얻어 입고 달리기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선수로 선발된 세명의 친구들과 함께 달리기 연습을 하고 달리기 대회를 하러 가는 날이 되었다. 면단위로 면대항 체육대회를 하는 군민체육대회가 열리던 날, 면사무소에서 마련한 트럭 뒤에 실려 대도시로 출전하는 날이 된 것이다. 이것이 난생처음 큰 도시를 만나게 된 최초의 날이 된 것이다. 덜컹대는 트럭 뒤에 실려 대도시로 나가는 과정은 마음이 설레고 무엇이 있을까라는 궁금증으로 뒤꿈치를 들어 도시 구경에 신경을 써야 했다.
트럭에 실려 도착한 큰 운동장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한쪽에서는 많은 장사꾼들이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있다. 어린 촌놈에게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체육대회를 하고, 그렇게 많은 사람이 모인 것을 보는 것이 처음이었으며 그렇게 큰 도시를 가본 것도 처음이었다. 힘겹게 달리기 대회를 하여 3위로 입상하고 돌아온 그 날은 어려가지를 많은 생각하게 해 주었다. 그렇게 큰 도시가 있고, 그렇게 많은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을 알려준 사건이었으니 말이다.
시골에서 이렇게 태어나고 살아온 난, 애초부터 촌놈이었다. 촌 생활이 어려서부터 몸에 익숙해졌고 생각이 그리 형성되었기에 천상 촌놈일 수밖에 없다. 성장하여 큰 도시로 진출이 되었지만, 살아가는 고향은 언제나 시골에 근간을 두고 있었다. 도시생활은 언제나 남의 생활 같았고, 언제나 시골집을 그리며 타지 생활을 해 나갔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시작된 도시생활은 늘 나에겐 어설프게 생각되었고, 언제나 도시로부터 탈출을 생각했지만 그렇게 만만하지 않았다. 우선은 직장이 그랬고, 아이들 교육이 그랬으며 돈도 없어 그럭저럭 도시생활을 이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원래부터가 촌놈이기에, 도시에서의 탈출을 위해 시골생활에 관심을 서서히 갖게 되었는데, 여러 가지의 난관이 있어 선뜻 나서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시골살이를 그냥 포기하기는 삶이 너무 서운해 전원주택 마련을 위해 움직인 것이 거의 20여 년이 되었다. 오랜 세월 동안의 생각과 고민이 아쉬워 시간 나는 대로 서적을 찾고, 몸소 찾아 나서길 또 10여 년이 되었다. 언제나처럼 삶의 과정이 쉬울 리가 있겠는가? 게다가 앞으로의 삶을 결정할 수 있는 보금자리를 찾는다는 것은 쉬울 리가 없고, 세상은 호락호락하게 힘을 덜어주지 않아 더 힘겨웠다.
전원 살이를 포기하는 것은 그동안의 노력이 아깝기도 하고, 내가 살아온 삶에도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 꾸준히 노력을 했지만, 그리 쉽게 만날 수는 없었다. 오랫동안 해 보고 싶었던 전원 살이를 쉽게 포기할 수는 없기에, 오늘도 나에게 어울리는 작은 집을 찾아 헤맸다. 살고 있는 도시 주변은 자전거를 타고 곳곳을 다니며 적당한 택지를 구하려고 했다. 하지만 적당한 택지는 나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입지조건과 가격이 적당한 곳이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