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조용한 희망>
어두운 밤 남자가 깊게 잠이 든 것을 확인한 뒤, 아이를 안고 조용히 집을 떠나는 한 여인. 차가 출발하려는 순간 잠에서 깬 남편이 뛰쳐나와 소리칩니다. 하지만 그녀는 그대로 길을 떠납니다. 그녀는 왜 아이와 급하게 그 집을 떠나야만 했을까요? 총 10화의 드라마 <조용한 희망>은 그녀의 탈출로부터 시작합니다.
무수한 오락영화처럼, 비록 죄는 있지만 미워할 수만은 없는 주인공이 쫓기는 신세에 유쾌하고도 흥미진진한 액션 추적이 이뤄지다가 결국 다 바람대로 되어버리면 마음 편히 재미 삼아 보기 좋으련만, 이 드라마는 전혀 그런 내용이 아닙니다. 어쩌면 제목에서 눈치를 채셨을 수도 있겠습니다. 사실 도망치는 그녀에게는 죄가 없습니다. 그리고 죄 없이 집을 뛰쳐나온 그녀는 갈 곳도 없습니다.
내 이름은 알렉스.
아이 아빠의 정신적 학대를 피해 딸을 데리고 도망쳤다. 이제 나는 여자이자 엄마로서 세상에 정착해 홀로 육아를 하고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 궂은일을 해서라도 반드시.
드라마의 공식 소개입니다. 아주 간결하지요? 실제 플롯도 단순합니다. 요약하자면 그녀가 폭력으로부터 벗어나 자신과 자신만큼이나 소중한 존재들을 지켜나가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10편의 에피소드는 모두 구구절절 처절하기만 합니다.
그녀가 낙태하지 않을 것이라 하자 그때부터 자기 인생을 망쳤다면서 물건을 던지고 욕을 하는 알콜중독자 남편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은 결코 쉬운 선택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이의 머리카락에서 깨진 유리컵의 조각들을 걸러내던 그날 밤, 그녀는 결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그 집을 나와야겠다고요.
출산을 위해 대학 입학도 포기해야만 했고, 몇 년째 아이를 키우느라 어떤 사회적 경력도 갖지 못한 그녀는 ‘그녀에게 주어지는 세상의 유일한 일’ 가사도우미로 남의 집 살림을 통해 돈을 벌러 나섭니다. 그러나 일을 하려면 아이를 맡겨야 하는데, 정부 지원 돌봄 서비스를 받기 위해서는 경제활동을 한다는 증명이 필요합니다. 정부 보조 주택을 받으려 해도 직업 명세서가 필요하고요. 가난도 증명이 필요한데, 아이를 돌보는 게 유일한 일이었던 그녀에게는 그마저도 어려운 일입니다. 그녀의 돌봄노동은 완전 무급이었기 때문입니다.
사회복지사는 그녀에게 가정폭력 쉼터에 들어갈 것을 권하지만 그녀는 그곳은 ‘진짜 학대’를 당한 사람들이 가야 한다며 단칼에 거절합니다. 그 대신 친정엄마에게 아이를 맡기고 가사도우미로 첫 출근을 한 날, 연락이 안 되는 사이 친정엄마는 아이를 남편에게 데려다주고 맙니다. 끔찍한 기억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 아이를 찾아 나온 그녀는 딸과 함께 가정폭력 피해자 쉼터로 들어갑니다. 비록 남편이 자신을 직접 때린 적은 없지만, 경제적 고립과 그로 인한 의존과 종속 그리고 폭언과 폭력적 상황에 노출되었던 정서적 학대 역시도 폭력이었음을 인정하는 과정이었을 것입니다.
쉼터에 아이를 맡기게 된 그녀는 일을 하며 복지 카드도 발급받고 임대아파트도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복지 카드로 식료품을 결제할 때 주변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은 견딜 수 있어도 임대아파트의 벽면 가득한 곰팡이로 아이가 호흡기 질환에 걸려 고통받는 것까지는 견디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또한 죽도록 일해도 점점 더 가난해지는 것보다 그녀를 더욱 괴롭혔던 것은 전남편과의 양육권 소송이었습니다. 낙태를 안 한다며 화를 내던 남편은 이제는 아이를 불안정한 그녀에게 맡길 수 없다고 소송을 걸고, 판사는 남편의 편을 들어줍니다. 그녀는 아이를 되찾고자 학대의 현장을 목격한 유일한 사람, 새 가정을 꾸린 친정아버지에게까지 도움을 요청하지만 그는 자신과 같은 알콜중독자인 남편의 편을 들며 불쌍한 남편의 곁에 있어 주라고 말을 합니다.
그녀에게는 (어쩌면 뻔히 예상되지만, 막상 나에게 다가온다면 받아들이기 너무나도 어려울) 시련들이 쉼 없이 반복됩니다. 쉼터의 활동가는 그녀에게 말합니다. “대개의 여성이 일곱 번은 다시 돌아가죠. 완전히 떠나기 전에요. 대니엘은 이번이 세 번째였고, 난 다섯 번 걸렸어요” 그리고 알렉스도 다시 그 집으로 돌아갑니다. 다른 여성들과 마찬가지로요.
사람들은 가정폭력의 피해자에게 묻습니다. 왜 그를 떠나지 못하냐고요. 마치 떠나지 못한 피해자에게도 책임이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실제로 얼마 전 여성가족부는 ‘2022년 가정폭력 실태조사’를 발표했는데, 우리나라 성인 다섯 명 중 한 명은 ‘가정폭력은 피해자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그 결과 ‘내 잘못도 있다’고 생각하기에 폭력 피해자의 대응과 도움 요청도 2019년보다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동시에 ‘가정폭력은 가정 안에서 해결해야 할 개인적인 문제’라는 응답이 더욱 늘어났다고 합니다. 이런 생각들은 가정폭력의 피해자를 더욱 고립시키며 폭력이 반복되고 심화하는 것을 막기 어렵게 합니다.
이 드라마에는 딸을 돕고 싶어 하면서도 남편의 편을 들어주는 주인공의 아버지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딸에게 도움을 주려 해도 상처를 주고 마는 어머니가 나옵니다. 그들은 과거 가정폭력의 당사자들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자신이 벌인 과오를 기억하지 못하고 어머니는 생존을 위해 폭력의 시간을 외면해 버렸습니다. 하지만 알렉스의 선택은 달랐습니다. 알렉스는 스스로를 폭력의 피해자로 인식하고 자신과 딸을 지키기 위해 용기를 냅니다. 그리고 무력과 자기혐오 그리고 무너지고 의존하고 싶은 유혹들과 싸워나갑니다.
<조용한 희망>은 미국의 연설가이자 작가인 스테파니 랜드의 자전적 에세이를 바탕으로 합니다. 내일의 나는 오늘보다 더 나은 모습일 거라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어떤 비극과 혼란에도 휩쓸리지 않고 글을 쓰면서 자신의 이름을 찾아간 그녀의 삶은 우리에게 사랑, 보호, 가르침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졌던 여러 폭력적인 순간들을 되돌아보게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바로잡을 힘도 우리에게 있다는 용기를 줍니다. 제목은 <조용한 희망>이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스스로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치열하고 처절한 분투기를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 국번 없이 1366. 가정폭력/성폭력/성매매 등으로 긴급한 구조·보호 또는 상담을 필요로 하는 여성은 24시간 언제라도 전화로 피해 상담을 받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