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니스트 베커 [죽음의 부정]과 넷플릭스 <지옥>의 상관관계
(*넷플릭스 드라마 <지옥>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일주일 전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 결과가 발표되었고, 같은 날 장편소설을 투고한 출판사로부터 답장이 왔다. 올해 목표했던 두 번째 책 출간은 이렇게 '0'으로 2021년이 종료되었다. 우울할 틈도 없이 아들이 덜 마른빨래들을 바닥에 내던지고 있었고, 강풍에 테라스 분리수거통이 넘어져 나뒹굴었다. 출간 제의도 전부 거절당하고, 공모전도 떨어지고, 창작지원금도 탈락한 지금 세상이 나를 향해 '이제 헛짓거리 그만하고 네 할 일이나 하쇼~' 비웃는 것 같았다. 사실 세상은 나를 비웃지 않는다. 애초에 내게 관심이 없다. 나라는 인간이 존재하는지는 아나? 자연은 인간에게 무관심하고 인간은 그 무관심을 견딜 수 없어한다.
이 땅에 사는 우리는 우주가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우리에게 무엇을 줄 작정인지 알지 못한다. 우리에게는 칸트를 괴롭힌 물음-우리의 의무는 무엇인가, 이 땅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이 없다. 우리는 자신이 누구이고 왜 여기 있는지 까맣게 모른 채 살아가지만 삶에 의미가 있어야만 한다는 것은 안다. 그렇다면 영웅적 행위를 다른 인간에게 위임해 이 행위가 우리에게 영생을 가져다줄 만큼 좋은지 하루하루 알아감으로써 이 말할 수 없는 신비를 당장 떨쳐버리는 것보다 더 자연스러운 것이 어디 있겠는가?
- 어니스트 베커 [죽음의 부정] 254쪽(강조는 인용자)
[죽음의 부정]은 '죽음'을 키워드로 독서 중에 우연히 만난 책이었다. 도서관에서 빌려 읽자마자 책을 주문했다. 삶이 정답지가 뜯어진 문제집이라면 이 책은 정답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해설지에 가깝다. 죽음의 관념, 죽음의 공포는 인간이라는 동물을 무엇보다 사납게 뒤쫓는다. 죽음은 인간 활동의 주된 원동력이다.(같은 책, 저자 서문) 우리가 삶을 영위하기 위한 모든 행동의 기원에 '죽음의 공포'가 숨어 있다. 그 공포는 인간이라는 동물의 독특한 진화과정에서 기인한다. 우리는 동물이지만, 언젠가는 죽어 벌레의 먹잇감이 될 몸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는 생각한다. 그는 상징적 자아이고 이름과 인생사가 있는 피조물이다. 그는 원자와 무한에까지 사유를 뻗을 수 있는 창조자다.(같은 책, 68쪽)
동물은 자신의 죽음을 미리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지만, 인간의 상상력은 인간을 현재에 고정해 두지 않는다. 병으로 앓는 몽롱한 머릿속으로, 지진이나 화산 폭발 같은 자연재해 뉴스를 목도한 눈으로, 가까운 이의 장례식장에 들어서면서 끊임없이 상상한다. 내가 죽으면 어떻게 될까? 이게 끝일까? 내가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해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키운 이 모든 일들이 다 이렇게 '죽기 위해' 한 일인가? 내 존재 의미가 겨우 그 정도뿐이었나?
진짜 세상은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끔찍하다. 세상은 나에게 내가 하찮고 두려움에 떠는 존재이며 늙어서 죽을 거라고 말한다. 환상은 이 모든 것을 바꿔놓는다. 나를 중요하고 우주에 필수적이며 어떤 면에서 불멸인 존재로 만들어준다. - 같은 책, 222쪽
죽음에 대한 공포, 삶의 무의미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면 인간은 삶을 지속할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은 환상을 만들고 자신의 삶의 짐을 의탁할 영웅을 만들어낸다. 영웅은 위대한 가치이자 불멸하는 존재로 죽음을 초월한다. 영웅은 신이었고, 신의 대리인이었고, 왕이었으며,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 전쟁 영웅, 이데올로기, 돈으로 바뀌어 왔다. 종교는 인간의 존재 의미를 '신의 뜻'으로 해석해 주며 신민들을 안심시켰다. 이데올로기 대립이 극대화된 시기에 삶의 의미는 공산주의나 자본주의 둘 중 하나였다. 지금 대다수의 사람들은 돈을 버는 것을 목표로 삶을 정렬한다. 부동산, 주식, 코인 등 각종 투자 이야기가 대화 주제로 빠지지 않는다. 인간은 사회가 제공하는 확고하고 제한된 대안을 통해 보호받으며, 고개를 들어 자신의 길 너머를 보지만 않으면 막연한 안도감을 느끼며 삶을 살아갈 수 있다.(같은 책, 137쪽)
죽음에 대한 공포가 영웅주의로 이어지는 과정이 잘 드러난 작품이 최근 공개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지옥>이다. 어느 날 갑자기 인간들은 천사로부터 지옥행을 통보받고 정해진 날짜와 시간에 지옥의 사자들이 찾아와 고통과 죽음을 선사한다. 지옥행 시연이 전국적으로 공개된 날 일상이 멈춘다. 아무도 출근하지 않고 누구도 집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평화롭다고 생각했던 일상이 무참히 찢어져 숨겨져 있던 실재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버렸다. 나한테도 지옥의 사자가 찾아오지 않을까?
공포가 불러온 혼란 속에서 사람들은 영웅을 찾아낸다. 이럴 줄 알고 미리 준비했다는 듯 나타난 새진리회 의장 정진수는 불안에 떠는 사람들에게 말한다. 지옥행을 고지받은 자들은 모두 죄를 지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마땅히 지옥에 가야 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더 정의로워져야 합니다'. 이것이 신의 뜻입니다. 그는 단숨에 영웅이 되고, 신의 뜻을 전달하는 새 시대의 교황으로 등극한다. 그는 인간들에게 의미를 만들어 준다. 저들의 죽음에 충분한 이유가 있으니 두려워 말고 일상을 영위하라. 내가 너희에게 환상을 가져다 주리라.
우리는 자신이 현실에 대해 근본적으로 부정직함을, 우리가 실제로는 자신의 삶을 통제하지 않음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우리는 자신이 홀로 서지 못함을, 자신을 초월하는 무언가-우리가 깃들어 있으며 우리를 지탱하는 관념과 힘의 체계-에 늘 의존함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이 힘이 늘 뚜렷한 것은 아니다. 공공연히 신이거나 (나보다) 강한 사람일 필요는 없지만,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활동, 열정, 유희에 대한 헌신, 그리고 안락한 거미줄처럼 사람이 자신을 잊고 자신이 스스로의 중심에 자리 잡지 않았다는 사실을 망각하게 하는 삶의 방식이 그런 힘을 가질 수는 있다. 우리 모두는 자기망각적 방식으로 지탱받는 방향으로 이끌린다. -같은 책, 109쪽
하루 한 회씩 6일 간 시청한 <지옥>은 충격적이었다. 웹툰을 먼저 봤음에도 충격적이었다. 영상화된 지옥 시연 장면이 너무나 현실적이라 실제로 밖에서 일어나는 일 같았다.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지옥의 사자들은 죽음 그 자체를 상징한다. 그들이 왜 하필이면 그때 나를 찾아오는지 이유는 없다. 길을 걷다 차에 치이거나 병원에 갔는데 암 말기 선고를 받는 것과 같이 죽음은 아무런 이유도 목적도 없이 들이닥친다.
죽음에게 이유를 달아 전시한 새진리회가 진정한 영웅일까? 드라마를 보면 전혀 그렇게 생각할 수 없다. 새진리회를 창시한 정진수부터가 20년 전 고지를 받고 시연 당일까지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혔던 평범한 인간이었다. 어떻게 인간이 딴 사람에게 신과 같은 '모든 것'이 될 수 있겠는가? 어떤 인간관계도 신성의 짐을 감당할 수 없으며, 그러려고 시도했다가는 양쪽 다 그 나름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같은 책, 269) 우리는 손쉽게 자신의 실존의 짐을 떠넘길 대상을 찾아 두리번거리지만, 그는 신이 아니기에 실패할 수밖에 없고, 그의 실패는 곧 나의 실패다. 새진리회는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만든 지옥 시연의 이유는 완벽하지 않았다. 죄가 없는 선량한 인간도 고지를 받았다. 죽음은 평등하기에 누구나 받을 수 있다는 무작위성을 숨기기 위해 화살촉이라는 폭력을 쓰고, 폭력은 피해자를 양산하며 그들이 선언하는 '정의'와 멀어진다. 상대방이 나의 '모든 것'이라면 그의 모든 결함은 나에게 심각한 위협이 된다.(같은 책, 270쪽)
이 삶을, 실존이라는 무거운 짐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손 놓고 숨만 쉬면서 명줄만 잡고 있어야 할까? 책에서 제시한 해결책 중 하나가 예술이다. 결국 삶의 의미를 타인에게 기대지 않고 스스로 만들어내야 한다면, 창조적인 활동으로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예술 아닌가.
예술이라는 작업은 실존의 문제에 대해-외부 세계의 실존뿐 아니라(공유된 무엇에도 의존할 수 없는, 고통스럽도록 분리된 존재인) 자신의 존재에 대해-창의적 유형이 내놓는 이상적 답이다. 그는 극단적 개별화, 지독히 고통스러운 고립의 부담에 답해야 한다. 그는 자신의 고유한 재능을 발휘해 불멸을 얻는 법을 알고 싶어 한다. 그의 창조적 작업은 그의 영웅주의를 표현하는 동시에 정당화한다. 랑크 말마따나 '사적 종교'인 것이다. 창조적 작업의 고유함은 그에게 개인적 불멸을 선사한다. 이것은 그 자신의 '너머'이지 남들의 '너머'가 아니다. - 같은 책, 277쪽
<지옥>의 클라이맥스에서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기가 고지를 받고, 3일 뒤 시연에서 아기를 감싼 부모의 힘으로 처음으로 고지받은 인간이 살아남았다. 기적과도 같은 현상 앞에서 사람들은 새진리회를 거부하고(아기를 잡으러 온 사제들을 체포한다) 살아남은 아기를 보호한다. 시즌 2의 중심인물이 될 이 아기가 새로운 영웅이자 메시아로 정진수의 자리를 차지할지, 또 다른 창조적인 역할을 맡게 될지는 기다려 봐야 할 일이다. 지옥의 사자들 앞에서 우리 인간은 어떻게 나의 삶을 지켜야 하나? 이 드라마 자체가 죽음-삶의 실존적인 문제에 대한 연상호 감독의 창의적인 답이라고 할 수 있다. 정답이 아닐지라도 성실하게 채운 시험지의 답안.
드라마를 다 본 뒤 [죽음의 부정]을 한 번 더 읽었다. 책상 위에 책을 올려놓고 일주일 넘게 손도 대지 않았던 노트를 펼쳤다. 매일 한 장씩 채운 노트 안 세계가 잠시 멈춘 그대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 문장을 쓰자 주인공이 한 발 앞으로 나아간다. 두 문장에서 시간이 흐르기 시작한다. 정해진 분량만큼 하루의 작업량을 채운다. 매일 한 장씩 쓰면 한 달에 30장이고 세 달이면 새 장편소설 초고 하나는 충분히 완성할 수 있다. 새 원고로 새롭게 투고하고 지원하고 책을 만들 수 있다. 내가 쓴 소설이 나의 존재를 정당화한다. 이것이 나만의 답이다.
하지만 인간은 그저 한가로이 노니는 원형질의 눈먼 덩어리가 아니라 이름을 가진 존재요, 단지 물질이 아니라 상징과 꿈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피조물이다. 그의 자기가치감은 상징적으로 구성되며 그가 소중히 여기는 자기애는 상징을 먹고 산다. 상징은 자신의 가치에 대한 추상적 관념이요, 공기 중과 마음속과 종이 위에서 소리와 말과 이미지로 이루어지는 관념이다. 이는 유기체적 활동에 대한, 또한 통합과 확장의 쾌락에 대한 인간의 자연적 열망을 상징의 영역에서, 따라서 영원불멸토록 무한히 충족할 수 있다는 뜻이다. 하나의 유기체는 물리적 팔다리를 움직이지 않고서도 세계와 시간의 차원으로 확장될 수 있다. 숨을 헐떡이며 죽어가면서도 영원을 내면에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같은 책, 3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