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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wooRan Nov 16. 2021

버지니아 울프와 함께한 시간들

[울프 일기] 완독 한 오늘로 올해 100 읽기 목표를 달성했다. 동시에 ‘버지니아 울프 소설 통독하기목표 역시 일단락되었다. 프루스트를 읽다가 문득 '버지니아 울프도 읽어야지 않나?' 하는 충동에서 시작된 계획이었다. 에세이를 제외한 아홉 권의 장편소설과 단편소설집  권을  번씩 읽는  2년이 걸렸다. 그녀에 대해 뭔가를   있을  같다가도 막막하다. 전공자도 아닌 '의식의 흐름 기법'하나 겨우 아는 아마추어 독자가 감히 버지니아 울프에 대해 논하겠다니? 그래서  독후감 대신 그녀를 읽었던 순간들을 기록한 사진을 모았다.  글은  삶에 채색된 색유리가 놓이듯 버지니아 울프가 끼어든 시간의 조각을 모아둔 스테인드글라스다.



여기에 무언가 확실한 것, 무언가 실재하는 것이 있다. 그래서 한밤중의 공포 어린 꿈에서 깨어나, 서둘러 불을 켜고, 서랍장을 숭배하면서, 견고함을 숭배하면서, 현실을 숭배하면서, 우리 외에 어떤 다른 존재를 증거하는 비개인적인 세계를 숭배하면서, 조용히 누워 있다. 그것이 우리가 확신하고 싶은 것이다...
 
- 버지니아 울프 <벽 위에 난 자국>


2019년 10월

스스로에게 주는 생일선물로 각인을 새긴 비츠 가죽 노트 커버를 받아 들고 서울숲으로 갔다. 돗자리를 깔고 누워 과자를 까먹듯 단편소설을 하나씩 읽어나갔다. 엎드린 자세로 읽고 싶었지만 출산예정일까지   남은 뱃속 아기가 발차기를 했다. 아이를 낳고 키우며 소설을   있을까? 어떤 소설을   있을까? 까마득한 질문을 듣고 그녀가 .  위에  자국 하나로도 소설을   있어, 세상 모든 것이  소설이야.  머리  구름 속에 숨겨진 무언가로 소설 하나는 충분히   있지, 머릿속이 바빠지자 뱃속 아기도 따라서 춤을 추었다.



잠시 후 그녀는 자기 존재의 의식을 스스로 되살리기 위해서 집게손가락을 들어 올렸다가 의자의 팔걸이에 툭 떨어뜨렸다. 다음 순간 그녀는 아침에, 세상의 한가운데서, 안락의자에 앉아 있어야만 한다는 사실에 말할 수 없이 기이한 느낌이 들었다.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물건들을 옮기면서 집 안에서 움직이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였나? 그리고 인생, 그것은 무엇이었나? 비록 방 안에 있는 가구는 남아 있지만 그녀는 때가 되면 사라지는 것처럼, 인생은 표면 위로 스쳐지나 사라져버리는 빛과 같은 것이었다.
 
- 버지니아 울프 [출항]


2020년 10월

    생일날에 단골 카페에서 글뤼바인을 홀짝이는  발밑에 고양이가,  테이블 위엔 [출항] 놓여 있었다.  장편 소설 제목이 ‘출항이라 망망대해로 출발하는 느낌이지만, 주인공 레이철은 소설의 끝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연인이자 남편을 만나 결혼을 앞둔 와중에 들이닥친 죽음은 묘하게 비극이라기보다 해방처럼 느껴진다. 독립해서 살아갈  없었던 당시의 여성들, 아버지에서 남편으로 보호자가 바뀌는 것뿐인 삶에서 죽음은 뜻밖의 탈출구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녀는 그렇게 빛이 되어 사라졌다. 그리고...



하지만 그녀는 숲으로 난 길과 별처럼 빛나는 꽃들을 향해 그리고 수학 기호가 깔끔하게 적힌 지면으로 번갈아 마음을 쏟았다. 그녀의 마음이 이러할 때, 그녀에게 결혼은 자신이 바라는 것을 얻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할 아치형 통로에 불과한 것처럼 보였다.
 
-버지니아 울프 [밤과 낮]


2020년 12월

아홉 권의 장편  가장  분량의  번째 소설은 뜻밖에 술술 읽히는데, 안정적인(?) 사각 관계를 형성한 남 2 여 2의 얽히고설킨 연애 스토리에 결혼으로 완결되는 익숙하기 때문이다. 집에서 크로와상 생지로 크로플을 만들어 먹으며 부지런히 읽었다. 고전적인 플롯 아래 가끔씩 번뜩이는 특유의 의식의 흐름 묘사가 앞으로 쓰일 소설을 예고한다.



어떤 경우에라도 삶이란 그림자의 행렬일 뿐인데, 그런데 왜 이다지도 우리는 그 그림자를 열렬히 껴안는지, 그리고 그들이 떨어져 나가 그림자가 되는 것을 그렇게 고통에 차서 바라보는지. 그리고 왜, 만일 이것이, 이것보다 더한 것이 진실이라면, 왜 우리는 아직도 창문 모퉁이에 서서 이 갑작스러운 영상, 즉 의자에 앉아 있는 그 젊은이가 이 세상에 있는 어떤 것보다 더 실재적이고 가장 견고하며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사람이라는 것에 이다지도 놀라는 것인가?-왜 진정으로? 왜냐하면 이 순간이 지나고 나면 우리는 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를 거면서도.
 
- 버지니아 울프 [제이콥의 방]


2021년 1월

전통적인 소설이라   있는  권의 장편을 지나 버지니아 울프 특유의 스타일이 확립되기  과도기적인 소설, 읽기 힘들어 다른 책과 함께 번갈아 가며 보았다. '제이콥의 ' 중심으로 스토리가 모여야 하지만 중심축이 희미하고 연약하여 소설이 자주 휘청인다.  책을 읽었던 시기는 연말 코로나 확진자 폭증으로 카페 출입이 불가능하고 외출을   없었던 나날이었다. 온전히 나로 존재할  있는 중심축이 끊임없이 흔들리던 상황의 영향이 독서에도 미쳤을 것이라고 이제 생각한다.

그럼에도 읽었다. 버텼다.



돌이킬  없는 시간의 종소리가 겹겹이 묵직한 원을 그리며 공증으로 흩어져 간다. 우린  바보라니까, 그녀는 빅토리아 스트리트를 건너며 생각했다.  그렇게 삶을 사랑하는지, 어떻게 삶을 그렇게 보는지, 삶을 꿈꾸고 자기 둘레에 쌓아 올렸다가는 뒤엎 버리고  순간 새로 창조하는지, 하늘이나 아실 일이다. 더없이 누추한 여인들, 남의  문간에 앉아 있는, 비참하기 짝이 없는 이들도(자신의 몰락을 마시는 거지) 마찬가지야.  사람들도 인생을 사랑하거든. 바로  때문에 의회 법으로도 다스릴  없는 거야. 사람들의  속에, 경쾌한, 묵직한, 터벅대는 발걸음 속에, 아우성과 소란 속에, 마차, 자동차, 버스, 짐차, 지척거리며 돌아다니는 샌드위치맨, 관악대, 손풍금 속에, 승리의 함성과 찌르릉 소리, 머리 위를 날아가는 비행기의 묘하게 높은 여음 속에, 들어 있었다. 그녀가 사랑하는 것이, 삶이, 런던이, 유월의  순간이.
 
- 버지니아 울프 [댈러웨이 부인]

2021년 2월

몇 년 전에 처음 읽었을 땐 그리 와닿지 않던 소설이었다. 제대로 읽으니 [댈러웨이 부인]이 도달한 성취가 이제야 보인다. 댈러웨이 부인이라는 굳건한 중심축이 소설을 응집하고, 파티로 상징되는 '삶'을 사랑하는 부인과 전쟁으로 인한 우울로 자살을 선택하는 '죽음'의 셉티머스가 교차되는 서술은 현실의 일면을 명확히 보여준다. 삶과 죽음이 교차되며 나아가는 인생, 그럼에도 우리가 삶을 사랑하는 이유는? 카페가 다시 열리고 조금씩 상황이 나아지면서 가장 좋아하는 카페에 자리를 잡고 앉아 커피를 마시며 댈러웨이 부인의 목소리를 필사하는 순간을 나는 잊을 수 없다.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이 그 질문의 전부였다? 간단한 질문이다. 가는 세월과 더불어 우리를 죄어오는 질문이다. 아마도 이 질문에 대한 위대한 계시 같은 것은 결코 찾아온 적이 없을 것이었다. 대신에 작은 일상의 기적들, 조명들, 깜깜한 가운데 예기치 않게 켜진 성냥불과 같은 순간은 있었는데, 지금이 그중의 하나라고 하겠다. 이것, 저것 그리고 또 다른 것, 부인이 그것들을 통합하고 있나니, 부인이 "인생이 여기에 정지한다"라고 말하고 있나니, 부인이 그림을 통해서 순간을 영원한 것으로 만들고 있었는데 (다른 영역에서 릴리 자신이 순간을 영원한 것으로 만들려고 노력했듯이)-이것은 진실로 계시의 성격을 띤 것이었다.

- 버지니아 울프 [등대로]


2021년 3월  

[댈러웨이 부인] 댈러웨이 부인과 마찬가지로 [등대로] 누름돌은 등대다. 그리고 등대가 비추는 ,  빛을 잠시나마 정지시키는 램지 부인의 존재감,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지 묻는 질문은 너무나 거대하고 등대의 빛을 잡아두려는 헛된 시도처럼 느껴지지만, 깨달음은 작은 성냥불에서 예기치 않게 온다. 순간을 영원한 것으로 만드는 노력, 버지니아 울프가 소설을 통해 시도했던 수많은 노력의 이유. 사실상 의식의 흐름 기법이란 '순간을 영원한 것으로 잡아두기' 아닌가? 지금의 순간이 맥주 한 잔에 담기고 페이지를 넘기며 천천히 음미했다.



남자 올랜도와 여자 올랜도의 사진을 비교해 보면, 그 두 사람은 의심할 바 없이 동일 인물이지만 어딘가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된다. 남자의 손은 거리낌 없이 칼을 잡고 있지만 여자의 손은 어깨에서 미끄러지지 않도록 공단 숄을 붙잡는 데 사용되어야 한다. 남자는 세상이 자신이 사용하도록 만들어졌고 자신의 기호에 맞게 형성된 것처럼 세상을 똑바로 직시한다. 그에 반해 여자는 미묘한 눈으로, 심지어 의혹을 품은 눈으로 세상을 곁눈질한다. 그들이 똑같은 옷을 입었더라면, 그들의 세계관은 동일했을 것이다.

 -버지니아 울프 [올랜도]


2021년 4월

그녀의 가장 실험적인 소설 [파도] 나아가기  잠시 쉬어가는 , 물론 쉽지 않은 작품이고, 스토리는 흥미롭다. 몇백 년의 삶을 영위하면서 남자에서 여자로 변하는  혹은 그녀, 올랜도라는 인간은 그대로인데 성별이 바뀌었다는 이유로 많은 것을 잃는다. 바지에서 드레스로 옷이 바뀌자 생각의 틀이 바뀌는 순간의 묘사는 섬뜩하다. 개인적으로 소설보다 틸다 스윈턴 주연의 영화가 인상적이라 책을 읽는 내내 머릿속에서 틸다 스윈턴의 얼굴을 한 올랜도가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아무런 목적이 없어. 야심이 없어. 보편적인 충동을 따라 흘러가게 내버려 둘 거야. 정신의 표면은 지나가는 것을 비추는 엷은 회색의 시냇물과 같이 흘러가는 거야. 내 과거도, 코도, 눈 색깔도, 대저 내가 나 자신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단지 위급한 순간에 교차점이나 보도의 커브에서 육체를 보존하고 싶은 욕망이 솟아나서 나를 꽉 붙잡고 여기 버스 앞에 세운다. 우리는 삶에 집착하고 있는 듯하다.

- 버지니아 울프 [파도]


2021년 6월

개인적으로 버지니아 울프의 대표작을 뽑는다면 [등대로] [파도] 되지 않을까, 전혀 다른 스타일을 완성한  권의 걸작. 각오하고 읽었음에도  난해함에 초반엔 많이 헤맸다. 5월과 6 늦봄의 날씨를 만끽하며 주말마다 돗자리와 캠핑 의자를 챙겨 공원으로 소풍을 갔다.  트인 공원에서 바람에 몸을 맡기며 소설의 파도를 탔다. 전통적인 플롯이 해체되고 주요 등장인물들은 연극배우처럼 교대로 독백을 하고 이야기 중간에 자연 묘사가 삽입된다. 자연의 시간이 목적 없이 흘러가듯 인간의 시간 역시 흘러가버릴  있기에, 우리는 필사적으로 '' 잡아 고정한다. 자칫하면 삶의 파도에 휩쓸려 버릴  있으니까, '' 잃어버릴  있으니까. 하지만 그게  나쁜 것일까?



이 삶은 너무 짧고 너무 부서져 버렸어. 우리는 아무것도 알지 못해, 심지어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그녀는 생각했다. 우리는 단지 이제 막 이해하기 시작한 거야, 여기저기에서. 로즈가 손을 오목하게 말아 귀에 갖다 대었던 것처럼 그녀는 두 손을 무릎 위에 오목하게 말았다. 그녀는 두 손을 오목하게 하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 이 순간을 담고 싶다고 느꼈다. 이 순간을 머물게 하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더욱 더 가득 채우고 싶었다. 이 순간이 이해와 더불어 완전해지고, 환해지고, 깊어져서 빛날 때까지.

- 버지니아 울프 [세월]


2021년 9월

1880년부터 시작되어 현재까지 흐른 시간의 덩어리 속에 오목한 손으로 퍼낸 몇몇 순간들, 버지니아 울프 스타일의 완성이자 절정, 만약 그녀가 [세월] 이후로  권의 소설을  썼더라면? 만약은 허무하고 그녀가 남기고  질문에 대답할 사람은 우리다. 2019 9월에   읽었고 그때의 감정 때문에 '버지니아 울프 읽기' 계획이 시작될  있었다. 인간은 모든 시간을 가질 수 없기에 순간을 손에 담아보려 노력한다. 가장 시간의 흐름을 체감하는 가을과  어울리는 작품.



플롯이 상관있나? 그녀는 자세를 바꾸며 오른쪽 어깨 너머로 보았다. 플롯은 감정을 일으키기 위해서만 존재한다. 단지 두 가지의 감정만이 있다. 사랑 그리고 증오.

- 버지니아 울프 [막간]

2021년 11월

[제이콥의 ]-[파도]-[막간]으로 이어지는 그녀의 실험소설들, 여기서는 시골 저택에서 공연되는 연극과 인물들의 교차 서술과 파편화된 플롯, 문득 엿보이는 어설픈 부분들은 퇴고의 부족 때문일까. 연극의 막과  사이에서 새어 나오는 생각들, 다음 연극이 시작되기 전 그녀는 강으로 걸어 들어갔다.



의식의 흐름이라는 개념을 접하면 지금 이 순간에 떠오르는 모든 생각을 놓치지 않고 적어두는 기법을 흔히 생각한다. 그렇게 [율리시스]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방대해지고 작가가 마음만 먹으면 계속해서 소설이 이어질 수 있다. 이와 달리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들이 다소 짧은 분량으로 응집된 건, 그녀가 확립한 의식의 흐름 스타일이란 무한한 시간의 흐름 중 한 ‘순간’을 잡아채어 고정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렇게 이해했다. 망각 속에 사라질 2년의 시간 속에서 그녀가 기억하게 만든 순간들은 책 속 밑줄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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