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성희 단편집 [날마다 만우절]
학교 복도는 이상할 정도로 서늘하다. 창밖 하늘은 새파랗고 구름은 하얗고 복도는 서늘하다. 시간강사로 일할 때 공강이면 수업 중인 교실 복도를 왕래하곤 했다. 교사들이 수업하는 소리, 학생들이 대답하고 떠드는 소리, 폭죽처럼 터지는 웃음소리를 들으며 서늘한 복도를 걸었다. 아직 한 권의 책도 내지 못한 무명의 소설가는 교사도 소설가도 그 무엇도 아닌 상태였고 때때로 늦은 밤 몰래 울었지만 학교 복도를 걸을 때만큼은 괜찮았다. 아마 학교에 깃든 어떤 힘에 위로받은 게 아닌가 생각한다. 아직 미래가 결정되지 않은, 가능성만을 가진 아이들이 가득 모여 있는 공간이 가진 힘.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위안.
<여름방학>의 병자 씨도 학교를 퇴직한 뒤 아무도 없는 복도를 걸어 다닌 기억을 그리워한다. 네 명의 오빠를 가진 그녀는 오빠들 때문에 병자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고 오빠들 때문에 결혼하려던 남자와 헤어져야 했다. <어제 꾼 꿈>의 애순 씨는 집 근처 유치원에서 열린 동시 발표 대회를 구경하며 울먹인다. 오빠가 죽은 뒤 원치 않는 결혼을 했던 그녀는 남편을 두 번 잃고 자신의 동생과 자식들과 돈 문제로 냉전 상태다. <어느 밤>의 덕선 씨는 남편이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면 밖으로 나가 훔친 킥보드를 타고 동요를 부른다. 운명에 갇혔다는 생각이 들 때 위안을 구하는 작은 몸짓들, 어떤 습관들, 얼음이 되어버린 나의 존재를 구원하려는 안간힘들.
따뜻한 신발을 신고 동화 속 주인공을 상상하던 나는 뭐가 되었을까? 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적절한 단어를 떠올려보았다. 딱히 생각나지 않았다. "나는, 음, 나는, 그냥 어른이 되었지." 나는 그렇게 말해보았다. 그리고 차에서 펜을 꺼내와 '내 자리'라고 쓰인 낙서 옆에 새 낙서를 했다. '그래, 니 자리.' 그러고 나자 그냥 어른이 된 나 자신이 그다지 실망스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여섯 번의 깁스>
나는 빨래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걸 보는 게 좋았다. 빨래가 흔들리면 그 주변의 어둠이 환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걸 보고 있으면 잠시나마 착한 사람이 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옥탑방으로 이사를 했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밤>
윤성희 작가님의 목소리는 담담하다. 차분한 목소리로 인간을 습격하는 피치 못할 운명에 대해 이야기한다. 운명은 갑자기 돌진하는 자동차의 형태로 덮쳐 오고(<여섯 번의 깁스><어제 꾼 꿈><네모난 꿈><눈꺼풀>), 암과 같은 질병의 모습으로 찾아올 때도 있고(<남은 기억>), 잘 안다고 생각했던 가까운 이의 이해할 수 없는 범죄 행각으로 인한 심적인 고통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여름방학><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밤><블랙홀><스위치>). 정류장에 앉아 버스를 기다리고 있을 뿐인 내게 자동차가 돌진할 수도 있다. 나의 엄마가 분노에 차서 마을 잔치 음식에 농약을 뿌리는 사건이 생길 수도 있다. 내게 다정하던 옆집 형이 교도소에 가고, 돈 문제로 가족들이 갈라서고, 장례식장에 가는 일이 잦아진다.
형은 주기율표 외우는 걸 좋아했는데, 화가 날 때마다 그걸 중얼거리면 마음이 차분해진다고 했다. 형이 구속된 뒤에 나는 주기율표를 프린트해서 벽에 붙여놓았다. 왜 그랬을까? 그런 의문이 들 때마다 그걸 들여다보았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밤>
예측할 수 없고 피할 수 없는 운명 앞에서 우리는 얼어붙는다. 킥보드를 타다 넘어진 그녀는 몸을 일으킬 수 없다(<어느 밤>). 정류장을 덮친 자동차에 치인 나는 혼수상태에 빠져 의식은 있는데 눈꺼풀 하나 움직일 수가 없다(<눈꺼풀>). <여섯 번의 깁스>처럼 깁스를 하거나 <블랙홀>처럼 돌아가신 아버지와 구속된 어머니가 남긴 시골집을 정리하러 찾았다가 일주일 넘게 나오지 못한다. 몸이 굳어서, 다치고 아프고 힘들고 슬프고 어떻게 해도 이 상태를 벗어날 수가 없다는 절망감 앞에서 우리는 얼음이 된다. 어떻게 해도 눈꺼풀 하나 움직일 수가 없는데, 더 이상 뭘 할 수 있죠?
<여름방학>의 병자 씨는 이름을 바꿀 결심을 하고 퇴직 이후의 삶을 '여름방학'이라 명명한다. 그리고 아파트 정문 옆 공원 분수대에서 물놀이를 한다. '여름방학 때는 누구나 물놀이를 하는 법이니까.' <남은 기억>의 나는 아이들에게 명치를 가리키며 물총을 쏴달라 부탁한다. 얼어붙은 가슴을 녹여야 하니까. 조카손녀를 따라 놀이터와 학교 운동장에서 재료를 모아 마녀 수프를 만들고(<어제 꾼 꿈>) 아빠와 나란히 누워 정말 좋았던 삶의 순간을 떠올린다(<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밤>). 서로에게 무해한 거짓말을 하며 웃는 어느 가족의 하루(<날마다 만우절>), 음식을 나눠 먹고 술을 마시고 이야기를 하며 나는 너에게 땡을 외치고 너는 다시 나의 땡을 외치며 웃는다.
딸이 땡을 해주길 기다리면서 나는 종일 소파에 앉아 있었다. 저녁이 되었고 그제야 딸이 내 손을 잡으면서 땡 하고 말했다. 나는 화장실에 가서 시원하게 오줌을 누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아, 가끔 얼음이 되어야겠다고. 나는 청년에게 지금은 술래를 피해 얼음이 된 거라고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곧 누군가 땡 하고 외쳐줄 거라고, 얼음땡 놀이란 그런 거라고. 누군가 땡 하고 말해줘야 집에 갈 수 있는 거라고. 그러자 청년이 웃었다. 흐흐흐, 그렇게 웃었다. 조금 있으면 구급대원이 도착할 거예요. 그러면 제가 땡이라고 말해줄게요. <어느 밤>
완벽히 이해할 수 없어도, 가끔 내게 상처를 입혀도, 그게 싫어 도망치고 싶어도 얼음땡 놀이는 혼자서 할 수 없고 누군가 나의 얼음을 풀어줄 것이다. 같이 가서 내 남편 돈 떼먹은 사기꾼에게 욕도 하고, 같은 장례식장에서 우연히 만나 수육에 소주를 마시고, 가마솥에 백숙을 끓여 옆집 할머니 담금주를 몰래 훔쳐 나눠마시며 가장 그럴듯한 거짓말을 나눈다. 그렇게 영영 꼼짝도 안 할 것 같은 눈꺼풀을 조금씩 들어 올린다. 땡! 이제 집에 갈 수 있어요.
이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릴 수만 있다면 앞으로 뭐든지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나는 역도 선수가 되는 상상을 했다. 내 역기는 봉 양쪽에 동그란 눈꺼풀이 달려 있다. 십 킬로그램짜리 눈꺼풀이. 나는 역도 선수다. 나는 국가대표다. 나는 대회 결승전에 진출했다. 결승전 경기에 나선 나는 0부터 9까지 천천히 숫자를 세면서 심호흡을 한다. 그리고 숨을 멈추고 온 힘을 다해 역기를 든다. <눈꺼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