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iwooRan Jul 19. 2021

얼음인 내게 누가 땡을 해 줄까

윤성희 단편집 [날마다 만우절]

학교 복도는 이상할 정도로 서늘하다. 창밖 하늘은 새파랗고 구름은 하얗고 복도는 서늘하다. 시간강사로 일할  공강이면 수업 중인 교실 복도를 왕래하곤 했다. 교사들이 수업하는 소리, 학생들이 대답하고 떠드는 소리, 폭죽처럼 터지는 웃음소리를 들으며 서늘한 복도를 걸었다. 아직  권의 책도 내지 못한 무명의 소설가는 교사도 소설가도  무엇도 아닌 상태였고 때때로 늦은  몰래 울었지만 학교 복도를 걸을 때만큼은 괜찮았다. 아마 학교에 깃든 어떤 힘에 위로받은  아닌가 생각한다. 아직 미래가 결정되지 않은, 가능성만을 가진 아이들이 가득 모여 있는 공간이 가진 . 무엇이든   있다는 위안.


<여름방학>의 병자 씨도 학교를 퇴직한 뒤 아무도 없는 복도를 걸어 다닌 기억을 그리워한다. 네 명의 오빠를 가진 그녀는 오빠들 때문에 병자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고 오빠들 때문에 결혼하려던 남자와 헤어져야 했다. <어제 꾼 꿈>의 애순 씨는 집 근처 유치원에서 열린 동시 발표 대회를 구경하며 울먹인다. 오빠가 죽은 뒤 원치 않는 결혼을 했던 그녀는 남편을 두 번 잃고 자신의 동생과 자식들과 돈 문제로 냉전 상태다. <어느 밤>의 덕선 씨는 남편이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면 밖으로 나가 훔친 킥보드를 타고 동요를 부른다. 운명에 갇혔다는 생각이 들 때 위안을 구하는 작은 몸짓들, 어떤 습관들, 얼음이 되어버린 나의 존재를 구원하려는 안간힘들.


귀여운 어나더커버


따뜻한 신발을 신고 동화 속 주인공을 상상하던 나는 뭐가 되었을까? 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적절한 단어를 떠올려보았다. 딱히 생각나지 않았다. "나는, 음, 나는, 그냥 어른이 되었지." 나는 그렇게 말해보았다. 그리고 차에서 펜을 꺼내와 '내 자리'라고 쓰인 낙서 옆에 새 낙서를 했다. '그래, 니 자리.' 그러고 나자 그냥 어른이 된 나 자신이 그다지 실망스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여섯 번의 깁스>


나는 빨래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걸 보는 게 좋았다. 빨래가 흔들리면 그 주변의 어둠이 환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걸 보고 있으면 잠시나마 착한 사람이 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옥탑방으로 이사를 했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밤>


윤성희 작가님의 목소리는 담담하다. 차분한 목소리로 인간을 습격하는 피치 못할 운명에 대해 이야기한다. 운명은 갑자기 돌진하는 자동차의 형태로 덮쳐 오고(<여섯 번의 깁스><어제  ><네모난 ><눈꺼풀>), 암과 같은 질병의 모습으로 찾아올 때도 있고(<남은 기억>),  안다고 생각했던 가까운 이의 이해할 수 없는 범죄 행각으로 인한 심적인 고통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여름방학><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블랙홀><스위치>). 정류장에 앉아 버스를 기다리고 있을 뿐인 내게 자동차가 돌진할 수도 있다. 나의 엄마가 분노에 차서 마을 잔치 음식에 농약을 뿌리는 사건이 생길 수도 있다. 내게 다정하던 옆집 형이 교도소에 가고,  문제로 가족들이 갈라서고, 장례식장에 가는 일이 잦아진다.


형은 주기율표 외우는 걸 좋아했는데, 화가 날 때마다 그걸 중얼거리면 마음이 차분해진다고 했다. 형이 구속된 뒤에 나는 주기율표를 프린트해서 벽에 붙여놓았다. 왜 그랬을까? 그런 의문이 들 때마다 그걸 들여다보았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밤>


예측할  없고 피할  없는 운명 앞에서 우리는 얼어붙는다. 킥보드를 타다 넘어진 그녀는 몸을 일으킬  없다(<어느 >). 정류장을 덮친 자동차에 치인 나는 혼수상태에 빠져 의식은 있는데 눈꺼풀 하나 움직일 수가 없다(<눈꺼풀>). <여섯 번의 깁스>처럼 깁스를 하거나 <블랙홀>처럼 돌아가신 아버지와 구속된 어머니가 남긴 시골집을 정리하러 찾았다가 일주일 넘게 나오지 못한다. 몸이 굳어서, 다치고 아프고 힘들고 슬프고 어떻게 해도  상태를 벗어날 수가 없다는 절망감 앞에서 우리는 얼음이 된다. 어떻게 해도 눈꺼풀 하나 움직일 수가 없는데,  이상    있죠?


날마다 여름방학


<여름방학>의 병자 씨는 이름을 바꿀 결심을 하고 퇴직 이후의 삶을 '여름방학'이라 명명한다. 그리고 아파트 정문 옆 공원 분수대에서 물놀이를 한다. '여름방학 때는 누구나 물놀이를 하는 법이니까.' <남은 기억>의 나는 아이들에게 명치를 가리키며 물총을 쏴달라 부탁한다. 얼어붙은 가슴을 녹여야 하니까. 조카손녀를 따라 놀이터와 학교 운동장에서 재료를 모아 마녀 수프를 만들고(<어제 꾼 꿈>) 아빠와 나란히 누워 정말 좋았던 삶의 순간을 떠올린다(<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밤>). 서로에게 무해한 거짓말을 하며 웃는 어느 가족의 하루(<날마다 만우절>), 음식을 나눠 먹고 술을 마시고 이야기를 하며 나는 너에게 땡을 외치고 너는 다시 나의 땡을 외치며 웃는다.


딸이 땡을 해주길 기다리면서 나는 종일 소파에 앉아 있었다. 저녁이 되었고 그제야 딸이 내 손을 잡으면서 땡 하고 말했다. 나는 화장실에 가서 시원하게 오줌을 누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아, 가끔 얼음이 되어야겠다고. 나는 청년에게 지금은 술래를 피해 얼음이 된 거라고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곧 누군가 땡 하고 외쳐줄 거라고, 얼음땡 놀이란 그런 거라고. 누군가 땡 하고 말해줘야 집에 갈 수 있는 거라고. 그러자 청년이 웃었다. 흐흐흐, 그렇게 웃었다. 조금 있으면 구급대원이 도착할 거예요. 그러면 제가 땡이라고 말해줄게요. <어느 밤>


완벽히 이해할 수 없어도, 가끔 내게 상처를 입혀도, 그게 싫어 도망치고 싶어도 얼음땡 놀이는 혼자서 할 수 없고 누군가 나의 얼음을 풀어줄 것이다. 같이 가서 내 남편 돈 떼먹은 사기꾼에게 욕도 하고, 같은 장례식장에서 우연히 만나 수육에 소주를 마시고, 가마솥에 백숙을 끓여 옆집 할머니 담금주를 몰래 훔쳐 나눠마시며 가장 그럴듯한 거짓말을 나눈다. 그렇게 영영 꼼짝도 안 할 것 같은 눈꺼풀을 조금씩 들어 올린다. 땡! 이제 집에 갈 수 있어요.


이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릴 수만 있다면 앞으로 뭐든지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나는 역도 선수가 되는 상상을 했다. 내 역기는 봉 양쪽에 동그란 눈꺼풀이 달려 있다. 십 킬로그램짜리 눈꺼풀이. 나는 역도 선수다. 나는 국가대표다. 나는 대회 결승전에 진출했다. 결승전 경기에 나선 나는 0부터 9까지 천천히 숫자를 세면서 심호흡을 한다. 그리고 숨을 멈추고 온 힘을 다해 역기를 든다. <눈꺼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