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과 존재와 시간
장마가 끝나고 폭염이 시작되었다. 해가 지고도 열기가 가시지 않는다. 아이 어린이집 방학도 시작되었다. 일주일간 아이와 24시간 붙어 있다. 아이는 내가 책상 앞에 앉으면 다른 방에서 놀고 있다가 손에 든 장난감을 팽개치고 즉시 서재로 달려와 내 무릎에 앉는다. 내 연필을 가져가 낙서를 하고 노트북의 키보드를 마구 두드린다. 아이는 엄마에게 자신의 존재를 한순간도 잊지 말 것을 명한다. 아이의 세계는 엄마고, 엄마라는 세계 속 세계-내-존재는 아이다. 아이는 나를 통해 자기 자신의 존재를 확인한다.
-90쪽, 도대체 인식함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유일하게 인식하고 있는 그 존재자에게만 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인간사물이라는 존재자에게도 인식함은 눈앞에 있지 않다. 어쨌든 인식함을, 이를테면 신체적인 속성처럼 외면적으로 확정할 수는 없다. 인식함이 이제 이 존재자에게 속하고는 있는데 외적인 성질이 아닌 이상, 그것은 분명히 ‘내면에’ 있어야 한다.
아이는 엄마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인식한다. 엄마는 아이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는가? 애초에 인식함이란 무엇인가? ‘인식함’이라는 개념의 낯섦에 당황하기에 앞서 ‘인간사물’이라는 단어가 신경이 쓰인다. 아이가 잠시 낮잠에 든 틈을 타 연필로 단어를 가둔다. 인간사물, 숨 쉬는 책상, 말을 거는 의자, 나는 말하는 의자라고 스스로의 존재를 인식하는 건 광기다. 소설의 소재가 될 수는 있겠다. 오늘도 어제와 같은 하루였다, 연일 최고기온이 갱신되는 폭염주의보의 하루, 어제와 같이 책상 앞에 앉은 나는 책상이 숨을 쉬는 것을 발견했다, 이런 글은 얼마든지 쓸 수 있다. 다만 나는 책상도 의자도 아닌 책상 앞 의자에 앉아 있는 인간이다.
-91쪽, 현상적 실상-즉 인식함은 세계-내-존재의 한 존재양식이다.
굵게 강조된 문장에 밑줄을 긋고 별을 그린다. 별이 존재한다. 내가 존재한다. 내가 나를 인식한다는 것 자체가 존재한다는 뜻이다. 나는 나다! 그래서 나는 존재한다! 뻔한 문장을 쓰는 순간조차 즐겁다. 엄마로 존재하기를 잠시 중단하고 나 자신으로 존재하고 있는, 까지 쓰다 소리가 들려 아이 방으로 간다. 잠든 아이가 뒤척이다 누르면 소리가 나는 인형을 발로 건드렸다. 꽥 소리에도 아이는 깊게 잠들어 있다.
-92쪽, 인지함은 어떤 것을 어떤 것으로 말함과 논의함이라는 수행양식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가장 넓은 의미의 해석함의 토대 위에서 인지함은 규정함이 된다. 인지된 것과 규정된 것은 문장으로 발언되고, 그렇게 발언된 것으로서 간직되고 보존될 수 있다.
나의 인지함이 문장으로 발언되고 간직되고 보존된다. 지금 쓰고 있는 이 글과 같이. 아이가 잠시 잠든 사이 엄마로 규정되던 내 존재를 일시정지하고 읽고 쓰는 현존재로 다시 쓰는 과정을 통해 스스로 나를 규정하는 작업을 수행한다. 아이에게 나는 엄마로 규정되고, 남편에게 나는 아내로 서술되고, 내가 속한 단체에선 한 명의 회원으로 이름이 불리고, 내 부모님에게 나는 아이가 되는 과정 속에서, 내 존재가 끊임없이 해석되고 논의되며 규정되는 건 당연하지만 그 규정이 일방적이거나 지나치게 단순할 때 피로감을 느낀다.
나는 가능한 나의 존재입지(93쪽)를 스스로 획득하고 싶다. 그래서 읽고 쓰는 걸 멈출 수 없다. 읽으면서 나를 논의할 문장을 구체적으로 다듬는 방법을 습득한다. 쓰면서 나 자신을 규정하는 문장을 정확하게 서술하려 애쓴다. 나는 스스로 집필되는 한 권의 책이다. 매일 홀로 남는 시간을 찾아내 책상 앞에 앉아 문장과 문장 사이 공백으로 숨을 쉬고 페이지와 페이지 사이 틈으로 노래하는 일종의 사물인간이다. 유일한 작가이자 독자인 나는 꿋꿋하게 책을 완성하기 위해 작업한다.
잠에서 깬 아이가 나를 부른다. 재규정된 나는 책을 덮고 아이에게 간다.
집, 방학, 93쪽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