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르트르의 [존재와 무]를 읽기 시작했다
과시용 독서라는 개념이 유행한다. 서점에 대기줄이 생성되고 북커버나 문진 등 각종 독서 아이템이 쏟아진다. 책들이 아름다운 표지를 입고 재출간된다. 대부분의 유행에 뒤처지는 나도 이번만큼은 유행의 선구자가 되어 묵혀 두었던 두꺼운 책들을 꺼내 사진을 찍어 공개하고 가방에 넣어 다닌다. 사르트르의 대표작 [존재와 무]를 잘 보이는 곳에 놓아둔다. 1300페이지의 이 책은 어디를 가도 눈에 띈다.
첫 페이지부터 홀린 듯이 읽어나가며 밑줄을 긋고 메모하느라 정신이 없다. ‘인간의 자유는 인간의 본질에 선행하며, 인간의 본질을 가능케 한다.’(103쪽, 민음사 판) 같은 문장을 받아 적으며 온 마음 다해 감동한다.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는 [존재와 무]와 훨씬 더 잘 맞는 인간인가 봐, 먼저 읽고 올게?
책을 읽고 메모한 포스트잇이 만국기 깃발처럼 [존재와 무]의 책상 사이에서 펄럭인다. 나는 이 책을 읽고 있다, 나는 1300페이지에 제목만 보아도 어려워 보이는 책을 진심으로 즐거워하며 몰입하고 있다, 나는 어렵고 있어 보이는 책을 읽는다, 나는 내가 읽는 책이다, 나는 멋진 사람이다, 나는 ‘존재와 무’다, 나는 한 손에 들기도 버거운 책과 같은 사람이다, 나는 책이다, 나는....과시용 나.
내가 읽는 책이 곧 나다. 내 독서의 시작 지점은 여기다. 도스토예프스키를 들고 다니면 그와 같이 인류에 남을 책을 쓴 그와 같은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페소아의 [불안의 서]를 품에 안고 포르투갈 리스본 거리를 걸으며 나는 다시 태어난 페소아와 같다고 스스로를 의미화했다. 나는 무엇이든 될 수 있고, 그 존재의 책임을 내 손에 든 책에 일임했다. 나라는 존재를 스스로 정의하는 건 아주 어렵고 숨 막히는 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181쪽, 자기에게 들러붙기 위해 지속적으로 유지되는 전체적이고 꾸준한 성실성은 본성상 자기와 결별하기 위한 지속적인 노력이다. 사람들은 자기를 자기에 대한 대상으로 만들려고 하는 행위 자체를 통해 자기로부터 해방된다. 사람들이 그것으로 있는 것에 대해 끊임없이 목록을 작성하는 것은 자신을 끊임없이 다시 부인하는 것이고, 그들이 순수하고 자유로운 시선 이외의 아무것도 아닌 영역으로 도피하는 것이다.
당연하게도 나는 책이 아니다. 나는 나다. 나는 내가 되고자 하는 것과 실제 나 사이의 간극이다. 나는 내가 읽는 책을 100%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다. 사르트르가 설명하는 즉자와 대자의 개념을 나는 이해하지 못한다. 잠이 온다. 책을 펼쳐 든 두 손은 아프고, 내가 감독 중인 자율학습실의 공기는 무겁다. 수능이 2주도 채 남지 않은 아이들이 저마다 문제집을 붙들고 앉아 있다. 이 아이들은 자신의 미래를 꿈꾸는 중이다,라고 함부로 쓸 수 없다. 나는 나에 대해서만 쓸 수 있다.
나는 나와 나 사이의 간극이다.
책을 읽으면서 이 문장을 반복한다.
나는 내가 원하는 나 자신이 될 수 없다. 나는 도스토예프스키와 같은 위대한 작가가 아니다. 나는 페소아와 같은 이명을 호명할 줄 아는 천재가 아니다. 나는 나밖에 될 수 없고 내가 되는 일조차 번번이 실패한다. 이룰 수 없다면 나는 무엇을 붙잡고 삶을 버텨야 하나? 어떤 모의고사를 치러야 본시험에서 좋은 성적으로 합격할 수 있나?
나는 읽는다.
답을 찾기 위해 읽지 않는다. 읽기 자체가 답이다.
나는 존재다.
존재하기 위해 존재하지 않고 존재는 존재다.
나는 이런 문장이 좋다. 이런 걸 좋아하는 내가 진짜 나라고 말할 수 없다. 나는 이 세계에 태어나버렸고, ‘앞이 있다면, 그것은 대자가 세계에서 나타났기 때문’(327쪽)이고, 태어난 이상 시간은 흐르고, 나는 나를 채워야 한다. 이런 문장을 쓰면서 나는 나와 놀이한다. 이런 글을 쓰면서 놀고 싶어서 책을 읽는다. 가방이 터져나가도록 책을 쑤셔 넣고 걸어간다. 나로 향하는 길을 따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