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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aden Apr 30. 2023

보리수나무 아래가 아닌, 1호선에서 깨달은 인생

눈앞의 지하철 하나에 흔들리는 마음에 대하여

지금 청량리, 청량리행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종각역 직장인의 제기동으로 가는 퇴근길. 게이트를 통과하며 청량리행 열차가 온다는 안내음이 들리면 기분이 좋다. 기분 좋은 포인트는 2가지이다. 첫째, 청량리보다 북쪽인 회기~소요산에 사시는 분들께는 죄송하지만, 열차에 사람이 적고 덕분에 퇴근 길이 쾌적하다. 둘째, 역에 도착하자마자 열차를 타기 때문에 낭비되는 시간이 적다. 수도권에서 뚜벅이로 살면 한 달에 50번은 타게 되는 이 지하철에서, 나는 매일 작은 운빨에 나의 기분을 맡긴다.

종각에서 북쪽으로 가는 열차는 동묘앞행/청량리행/광운대행/의정부행/양주행/동두천행/소요산행이 있다.


하지만 매일 퇴근 직후 청량리행 열차가 오지는 않는다. 보통은 조금 기다리면 광운대행이나 소요산행 열차를 탈 수 있다. 재수가 없는 날이면 눈앞에서 청량리행 열차를 놓치고, 다음으로 우리 집에는 가지 않는 동묘행 열차를 그냥 보내며, 이후 사람이 꽉꽉 들어찬 소요산행 열차를 탄다. 하필 비가 온 날이면 사람이 가득한 열차 내 불쾌지수가 n배쯤은 높아지는데, 체감 상 나의 짜증지수는 n의 제곱 정도는 되는 것 같다.


오늘은 퇴근길은 아니었지만 또 지하철에서 짜증이 잔뜩 나버렸다. 텅텅 비어있는 앞 열차를 눈앞에서 놓치고 나니 사람이 가득한 인천행 1호선이 도착했다. 날이 좀 추워서 따뜻하게 입고 우산까지 들고 나왔건만, 열차 안은 덥고 습하며, 공간도 부족했다. 오피스텔 엘리베이터가 중간에 1번만 덜 멈췄더라면, 제기동 역 앞에서 길을 막는 할아버지가 없었더라면부터 주말 아침인데 외출준비 할 때 걸려온 거래처의 전화에까지 원망의 화살이 미쳤다. 작은 불행이 이전에 있었던 아무것도 아닌 사건을 불행한 기억으로 왜곡시키고 있었다.


잠깐 그런데 나는 왜 이렇게 짜증이 나 버린 걸까? 나는 저 지하철을 놓쳐도 약속에 늦지 않음을 알고 있다. 그리고 내가 앞에 지하철을 탔더라도 얻는 것이 크지 않음도 알고 있다. 내가 얻을 수 있는 것은 2가지였다. 약 6분 정도 빠른 도착 그리고 15분 정도 이동을 조금 더 쾌적하게 할 수 있다는 것. 평소 10분 먼저 가려다가 몇십 년 먼저 가니까 조심하라는 과속/졸음운전 슬로건에는 그토록 공감하면서, 6분 늦게 가는 것에 나는 왜 이렇게 화딱지가 난 걸까? 어차피 잠깐이면 다 마를 땀인데, 지옥철 한번 타서 더웠다고 왜 이렇게 짜증을 내고 있는 거지? 이런 생각을 잠시하고 나니 조금은 참을성이 생겼다. 별거 아니었다. 작은 불운일 뿐이었다.


간혹 매일 눈앞에서 지하철을 놓친다며 불평을 늘어놓는 사람이 있다. 뭐 그렇게 느낄 수도 있다. 그게 사실일 수도 있다. 근데 아마 보통은 아닐 것이다. 한 100번쯤 타면 결국 행운과 불행의 비율은 비슷할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매일 눈앞에서 지하철을 놓친다'라는 불행은 누군가 만들어낸 가짜 불행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런 가짜 불행이 다른 기억마저도 왜곡시킬 수 있는 위험성이 있으니 가급적 가짜 불행도 피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약속을 나가는 1호선 안에서 말이다.


네가 남의 불행에 대해 뭘 알아라고 물으신다면 대답해 드리는 게 인지상정... 이 아니라 할 말은 없다. 그래서 지하철이나 타고 편하게 통근하는 사무직 나부랭이가 깊은 슬픔을 가진 분들께 훈수를 두려는 것 아니다. 다만 주위를 둘러봐도, 뉴스 속의 사회를 보아도 마음을 다쳐서 작은 불행하나에도 큰 타격을 받는 사람이 많아 보였다. 그래서 그냥 나 같은 사람은 이런 식으로 불행을 흘려보내고 있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혹시 매일 지하철을 놓칠 만큼 재수가 없는가?

일주일을 타면 행운이 따르는 날이 있을 것이다.


오늘도 눈앞에서 지하철을 놓쳤는가?

그냥 기다리면 올 것이다.


살아가라.

그저 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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