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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봉주 변호사 Apr 06. 2024

책 <박찬욱의 몽타주> 리뷰

박찬욱 감독론(매우 주관적인)

소제목으로 박찬욱 감독론이라고 거창하게 썼지만, 솔직하게 말하면 전혀 그럴 수준은 되지 못한다.

우연히 <박찬욱의 몽타주>라는 책을 읽게 됐지만 생각해 보면 또 전적으로 우연은 아니다(내가 읽은 건 2005년 출판의 구판이라서 책 이미지도 젊은 시절의 그것으로 했다). 내가 박찬욱 감독한테 관심이 있었기에 전자책 도서관의 수많은 도서 목록 중 그 책을 클릭한 것이니까. 박찬욱 감독에 대한 설명은 불필요하다. 굳이 그의 엄청난 경력을 검색해서 여기에 옮기지 않아도 현재 기준 동시대 가장 유명하고 성공하고 잘 나가는 감독을 꼽으라고 하면, 박 또는 봉(박찬욱과 봉준호) 두 감독을 꼽는 것에 큰 이견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유명하고 대단한 감독임에도 나는 명색이 영화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치곤 그의 영화를 많이 본 편이 아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 왜 그런지 생각해 보니 원초적인 수준에서 떠오르는 이유는 그의 영화 속 장면들이 너무 잔인하다는 점이었다. 단적으로 말해서 나는 칼보다 총이 그나마 보기 편하고, 외설적인 게 극도의 더러움보다는 그나마 덜 불편한 사람이다. 잔상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 게 유독 잘 남는 나의 성격 또는 성향은 내가 고른 게 아니라 그냥 내가 그렇다는 걸 깨달아서 영화를 선택할 때 그런 점이 작용하는 것이다.


박찬욱 감독한테 관심이 생긴 것은 <헤어질 결심>을 두 번째로 본 이후다. 가장 최근작을 보고 관심이 생겼다고 하니 듣기에 따라서는 누구나 아는 유명한 감독에 대한 아는 채로 보여서 좀 어처구니가 없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여하튼 <헤어질 결심>으로 박 감독한테 입문한 나는 소위 역주행을 시작하면서 그의 작품이나 발자취를 한 개씩 찾아봤는데, 나는 또 기질상 시의성을 매우 중시해서 최근순으로 알아가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최근 발자취 위주로 찾아가다가 <헤어질 결심>에 대한 인터뷰나 영상들 중에서 흥미로운 것을 몇 개 보게 됐다.


책 리뷰라고 해놓고 책 내용은 한 줄도 안 쓰고 내 생각만 쓰고 있는 게 좀 안 맞는 것 같지만, 이러한 내 생각 자체가 그 책을 읽은 후 그에 대한 내 감정과 생각이 새로 생겨나고 덧대어지면서, 그러한 인상이 책 밖에서 내가 찾아본 그의 발자취에 대한 생각에 영향을 미쳤기에 엄밀하게 말하면 지금 쓰는 나의 생각이 모두 책에 대한 감상기라고 할 수 있다.


박찬욱 감독이 <헤어질 결심>에 대해 칸 영화제에서 몇 문장으로 영화를 소개한 영상이 있다. 정확한 워딩은 아니고 그 취지만 옮기자면, <헤어질 결심>은 로맨스지만 19금 장면이 없고 또 잔인한 장면도 없으니 그동안 본인 영화가 불편했던 사람들도 편하게 볼 수 있다는 내용으로 기억한다. 영어 통역 때문 에라도 어쩔 수 없이 짧게 줄여서 말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단지 몇 개의 문장만으로도 매우 와닿는 감독 본인의 영화 소개였다. 박찬욱 감독이 영화에서 어떤 부분을 포인트로 왜 집어서 소개했는지 그 진의가 이 책을 읽었기에 더 이해됐달까.


비슷한 느낌을 받은 경험이 또 있다. 내가 수많은 영화 평론가 중에서 취향이 비슷하다고 느껴 그의 소개작만은 신뢰하는 이동진 평론가와 박찬욱 감독의 인터뷰였다. <헤어질 결심>은 15세 관람가를 받았는데 박찬욱 감독 작품으로서는 이례적이라서 이에 대해 이동진 평론가가 질문을 했다. 그런데 솔직하게 말하면 이동진 평론가의 평소 센스에 비하면 이 질문은 센스가 꽝이었고 그럼에도 박찬욱 감독의 대답은 우문현답이었다.


이동진 평론가는 질문에서 <헤어질 결심>이 15세 관람가라서 영화가 더 넓은 관객층한테 열려 있지만 그럼에도 고등학생들이 매우 많이 관람할 것 같지는 않다고 말했다. 말 그대로 '15세 관람가'를 그저 문리적 해석만 한 것이다. 솔직히 조금 병맛 같은 질문이었는데, 그럼에도 박찬욱 감독의 대답은 통찰력이 빛났다. 박찬욱 감독은 15세 관람가를 받은 것의 진정한 의미는 고등학생한테까지 관람이 열렸다는 것보다는, 그 자체로 이 영화는 그동안 박찬욱 감독의 영화에 입문하는 데 있어 어떤 표현의 수위나 그런 부분 때문에 불편했던 관객들한테 이 영화는 그 정도는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고 그들까지 보게 만드는 점이라고 했다. 진짜 백 퍼센트 정확한 지적이고 통찰력이다. 그게 바로 나 같은 관객이다. 그의 작품이 궁금한데도 어떤 불편한 지점 때문에 입문을 주저했던 나 같은 관객이 '아 <헤어질 결심>은 안심하고 볼 수 있구나' 하게 만드는 효과. 그 인터뷰에서 박찬욱 감독의 이 대답 하나만으로도 나는 그의 말재주, 글재주, 센스 모든 것에 감동했고 반했다.


박찬욱 감독은 <헤어질 결심>의 공동 각본가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면 그는 뛰어난 감독이면서 글도 매우 잘 쓰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책은 정확하진 않은데 2000년대 초반 몇 년 동안 박찬욱 감독이 쓴 연재 칼럼, 에세이, 인터뷰, 영화평, 단편적인 글 등을 모아서 낸 것이다. 그리고 중요한 점은 <공동경비구역 JSA>가 성공한 후에 쓴 글들이다. 이건 매우 중요하다. 영화감독한테 있어서 첫 번째로 성공한 작품의 전후로 그의 생각이나 경험이 매우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 한 권을 읽었다고 그에 대해 다 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지만, 그럼에도 박찬욱 감독의 기질이나 작품에 대한 생각, 가치관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더 깊이 이해하게 됐다고는 말할 수 있다. 사람에 대한 이해는 그에 대해 더 알고 싶게 만드는 힘이 있다. 그래서 그의 발자취를 최근순부터 역주행한 것이다.


이 책 속의 글들은 지금 기준으로 박찬욱 감독이 20여 년 전에 쓴 글이다. 20년이라는 기간은 사람이 변하고 전혀 다른 사람이 되고도 충분한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 내용, 생각이 지금도 똑같다거나 유지된다고 볼 수는 없다. 그래서 글 중에는 박찬욱 감독의 자기애가 너무 강하게 드러나는 표현도 있고 괜한 멋스러움을 장착한 표현도 꽤 있지만, 현재에 대한 부담 없이, 그 모든 게 그 자체로 재미있고 유쾌하고 인상 깊었다.


아래는 내가 책에서 유독 인상 깊었던 문장들을 몇 개 뽑은 것이다. 문장의 앞 뒤 맥락이 있는 글도 있고, 특정 영화에 대한 그의 생각이거나, 내가 그냥 좋아서 뽑은 것이다.




살다 보면 누구나 인생이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안 풀린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의 선의에 반해 작용하는 운명의 힘, 거기에 맞서 싸우다 스러져간 사람들.


이 문장은 인생에 대한 생각을 표현한 문장이 맘에 들어서 뽑은 것이다.



처음으로 할리우드 B무비의 영향에서 벗어나려고 했던 작품이죠. 아주 의식적으로 노력했습니다. 이 작품의 성격이 그런 걸 요구했던 탓도 있지만 B스러운 영화는 사람들이 존중해주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우습게 보는 거죠. 따라서 <공동경비구역>처럼 가능하면 많은 이들에게 가능하면 감동적으로 전해주고 싶은 이야기를 가진 영화는, 그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웰메이드 방식으로 만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즉, '그렇게 해야 당신들이 내 얘기를 귀 기울여 듣겠다면 그렇게 해주겠다'입니다. 그건 한번 마음먹기가 어렵지, 하려고만 하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니까요. 이제까지의 행보로 보아 앞으로 내 영화 인생은 -닐 조던이나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선례를 좇아- 성격이 완전히 다른 두 세계, 즉 메인스트림과 인디펜던트를 넘나드는 쪽으로 전개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공동경비구역>이 대성공한 후에 그 영화에 대한 박찬욱 감독의 생각이다. 잔인한 장면이 힘든 나도 이 영화는 그 당시 극장에서 봤다. 그의 의도가 적중한 게 맞다.  '그렇게 해야 당신들이 내 얘기를 귀 기울여 듣겠다면 그렇게 해주겠다' 특히 이 말이 너무 인상 깊었고 어떤 느낌을 주었다.



나를 죽이려고 애썼습니다. 표현보다는 소통을, 소수 마니아보다는 다수 대중을, 자의식보다는 테마를, 연출보다는 연기를, 스타일보다는 감정을, 미학보다는 정치학을 중시하고,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B가 아니라 A가 되게 하려고 했죠. 그렇게 감독의 존재를 영화에서 최대한 지우려고 치열하게 노력한 데 대해, 결과와 상관없이 자랑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이것도 <공동경비구역>에 대한 글이다. 솔직하게 이 글은 문장 자체에서 의도적인 멋스러움이 느껴지기도 했지만(만약 구두로 인터뷰한다고 생각해 보면, 저 문장 속 어휘를 똑같이 입으로 말했을까 하는 의구심이다), 그럼에도 그냥 맘에 들었다. 이렇게 표현할 수 있는 자의식이 오히려 부러웠다.



관객들에게 꼭 전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기 때문에, 한 명이라도 더, 조금이라도 더 감동적으로 봐줬으면 좋겠다는 마음 때문에, 그들을 당황시킬 수 있는 어떤 예술적 시도도 하기 싫었습니다. 그저 흥행에 성공해야겠다는 욕심과는 다릅니다. 결론은 같더라도 동기가 달라요. 맘에 없는 아부가 아니라 절실한 부탁입니다. 예전 영화들이 '내'가 하고 싶은 얘기였다면 이 영화는 '당신'한테 들려주고 싶은 얘깁니다. 그러니 당신이 좋아할 말투와 태도를 택하는 건 너무나 당연하 노릇입니다.


이것도 역시 <공동경비구역>에 대한 글이다. 박찬욱 감독의 이러한 절실한 부탁을 읽으니 정말 그 영화가 지금 와서 더 이해되더라는 것이다.



만나보니, 나보다 나이가 어리다는 사실이 퍽 마음에 들었습니다. 중요한 일도 때로는 그런 식으로 흘러가는 게 인생입니다.


이건 특정 영화(정확하진 않은데 <올드보이> 같다)에 대한 영화 스탭 중 특정인에 대해 어떻게 같이 일하게 됐는지 설명해 준 내용으로 기억한다. 인생의 중요한 일을 결정하는 방식이 마음에 들었다.



이 책을 읽으면 최소한 박찬욱 감독의 향후 작품은 계속 보고 싶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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