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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OE May 19. 2023

가정폭력의 끝, 죽거나 죽이거나

영화 <킬링 로맨스>를 보고

당대의 뉴 컬트 영화였던 <남자 사용설명서>를 만들었던 그가 이번에는 <킬링 로맨스>로 돌아왔다. <남자 사용설명서>가 숙맥인 여성과 마초적인 동시에 지질한 남성을 주인공으로 삼아 사랑과 폭력의 경계에서 웃음을 유발했다면, 이번 작품은 가정 폭력을 다룬 제대로 된 여성주의 영화다.


가정폭력의 끝은 ‘죽거나 죽이거나’이다. 피해 당사자가 아닌 이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이혼하면 되지 않는가. 그러나 가부장적 사회에서 가정 폭력 피해자 여성에게 이혼이란 쉽지 않은 선택지다. 가부장적 집안에서 여성에겐 경제권이 없을 확률이 높다. 이에 더해 가부장적 남성들은 여성들을 끊임없이 가스라이팅한다. 이로 인해 여성들은 자신을 무력한 존재로 인식하게 되고 평범한 이혼은 어려워진다. 그렇다면 경찰에 신고를 하면 되지 않나 싶을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한국을 너무 얕보는 거다. 아직 한국의 많은 경찰들은 가정 내의 문제는 가정에서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훈방조치를 한다. 이런 상황이 닥쳤을 때 남편은 아내에게 더 큰 폭력을 행사할 확률이 높다. 실제로 이런 폭력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는 사례는 끊임없이 보고 되어왔다. 그렇기에 죽거나, 죽고 싶지 않다면 죽이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의식이 강하고, 여래를 소유하는데 만족감을 느끼는 조나단은 어떠한가. 조나단은 이혼을 배신으로 여긴다. 여래에게 행하는 폭력은 장난스러워 보이나, 자신을 배신하면 죽이고 마는 조나단에게서 어떻게 쉽게 벗어날 수 있겠는가. 그렇기에 여래는 조나단을 죽이기로 결심한다. 이 작품은 이를 성공시키기 위해 나아가는 이야기다.


이원석 감독의 특장점은 어떤 상황에도 웃음을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점이라, 이런 묵직한 주제를 담은 작품에서도 웃음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를 돕겠다며 나선 명우의 무능함과 뮤지컬 시퀀스에서 웃지 않을 사람은 흔치 않다. 특히 이선균이 커피프린스에서 부르던 달콤한 노래를 부르던 걸 떠올린다면 메타성 때문에라도 웃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그가 부르는 노래는 달콤한 세레나데가 아니라, 가스라이팅을 위한 주술에 가까움에도 말이다.


이런 소재를 가볍게 다룬다는 것은 어찌 보면 위험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원석 감독은 선을 지키며 판을 흔드는 감독이다. 조력자 남성의 무력함은 여래의 주체성을 남기는 힘이 되며, 뜬금 없는 뮤지컬 넘버는 마냥 우스워보일 수 있으나 그 노래에 담긴 메시지들은 여래의 능력이자 삶을 버텨내는 힘이다.


메시지와 전개만 훌륭한 것이 아니다. 누가 봐도 씨네필인 이 감독은 다양한 고전 작품을 <킬링 로맨스>에 흥미롭게 녹여냈다. 나는 이 작품을 보며 크게 세 고전 영화를 떠올렸다. 먼저 모두가 얘기하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 대한 이야기는 넘어가겠다. 그 다음으로 떠올린 영화들이 중요하다. 조력자 명우가 건너편 집의 여래의 존재를 깨달은 뒤 망원경으로 그녀의 모습을 살피는 것은 히치콕의 <이창>을 닮았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레퍼런스는 조지 큐커의 <가스등>이라고 생각했다. 명우와 여래가 힘을 합치기로 결심한 뒤 나누는 대화는 유리창에 글씨를 써서 서로에게 보여줌으로써 가능해지며, 이때 두 사람은 끊임없이 불빛을 껐다켰다 한다. ‘가스라이팅‘이라는 용어의 기원이 되기도 한 영화 <가스등>은 가스등을 이용하여 남편이 아내의 의식까지 통제해가는 모습을 그린 영화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여래도 사전적 의미의 ‘가스라이팅’을 당하고 있는 대상이다. 하지만 그녀는 불빛을 이용해 해방의 길로 나아간다는 점에서 <가스등>의 인용이 흥미롭다고 생각했다.


이 작품은 레이어가 겹겹이 쌓여 정말 재밌는 영화였다. 여성주의 영화로서 봐도 재밌고, 뮤지컬 영화로 봐도 재밌고, 레퍼런스를 찾으며 봐도 재밌다. 또한 어쩌다 보니 이하늬 배우의 작품을 찾아본 적이 없는데, 너무 잘하셔서 황홀할 정도였다.


공장에서 찍어낸 듯한 한국 영화가 가득한 시대에 보물 같은 영화. 기타 박스오피스 상위권에 오른 영화들의 미친 점유율과, 익숙한 전개들을 보고 편안함을 얻는 관객들의 선택을 받지는 못했지만 누군가에게는 정말 길이길이 명작으로 남을 작품. 아직 서울에선 상영하니 많이들 보러 가주시고, 안 된다면 vod 관람이라도 적극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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