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나의 올드 오크>를 보고
영화는 인상적인 도입부로 시작한다. 어딘가 불만에 가득찬 사람들의 모습이 담긴 사진들의 나열. 그너머에는 그 시선을 배척하는 목소리가 이어진다. 곧이어 시선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카메라를 든 주인공 야라. 그녀의 카메라는 한 남성에 의해 탈취당한다. 카메라로 계속해 장난을 치는 남성. 처음 보는 야라에게 셀피를 찍자는 강요에 둘은 실랑이를 시작한다. 그렇게 번진 작은 몸싸움으로 카메라는 바닥으로 추락하고 고장이 난다.
주인공 야라의 카메라는 극중에 등장하는 인물들만큼이나 중요한 존재이다. 고장난 카메라로 인해 영화의 또다른 주인공인 야라와 TJ와의 관계는 시작된다. TJ는 고장난 카메라에 절망한 야라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민다. TJ는 마을의 역사를 기록하는데 쓰인 카메라를 야라에게 주려 한다. 그러나 야라에게 그 카메라의 존재는 유일무이하다. 그 사실을 알게 된 TJ는 자신의 카메라를 팔아서 야라의 카메라를 고쳐준다. 그렇게 야라의 카메라는 다시금 생명을 얻는다.
보수적인 중장년층이 절대다수를 이루는 마을에 난민으로 자리 잡은 야라. 그녀의 시작은 쉽지 않다. 오래된 편견에 물들지 않은 아이들은 야라와 가까운 관계를 이루기도 하지만, ‘어른’들은 쉽게 야라에게 마음을 내주지 않는다. 그러나 카메라는 야라에게 기회를 준다. 운동회로 보이는 행사에 참여한 야라는 한 아이의 사진을 찍고, 그 사진은 어머니에게 닿는다. 사진의 따뜻함에 감명을 받은 어머니는 마을회관 같은 미용실에 야라를 불러 사진 촬영을 요청한다. 그렇게 조금씩 야라는 마을의 일원이 된다.
그렇다면 카메라는, 사진은 무엇인가. 사진은 원래 돈 있는 자들의 전유물이었다. 사진 이전의 회화를 생각해보자. 지금까지 미술관에서 볼 수 있는 초상화들에 그려진 인물들은 대부분 귀족들이다. 자신의 존재를 어떻게든 남기고자 하는 욕망은 캔버스에 새겨졌다. 자본주의의 부흥과 사진술의 발명은 이러한 판도를 바꿔놓았다. 상대적으로 적은 비용과 시간이 드는 사진의 탄생에 부르주아들은 열광했다. 그렇게 사진은 시작되었다.
그리고 가장 좋아하는 사진 한 장을 이야기하고 싶다. 존경해마지 않는 인물인 아녜스 바르다의 사진. 사진에 찍히는 자들이 돈 있고 힘 있는 자들이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사진을 찍는 자라고 해서 다르겠는가. 당시에 피사체가 되던 자들에는 비할 바 아니더라도, 그들 또한 모종의 권력을 가진 자들이었다. 사진은 오랜 기간 남성의 것이었다. 그러나 아녜스 바르다는 달랐다. 우리에게 ‘누벨바그의 어머니’로 알려진 아녜스 바르다는 사진 작가였다. 그녀의 사진 작가로서의 삶은 잘 알지 못하지만, 작디 작은 체구로 자신의 상체만한 카메라를 다루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잊을 수 없는 이미지다. 이후 아녜스 바르다는 영화 감독으로서의 커리어를 시작했고, 기념비적인 작품들을 내놓았다. <노래하는 여자 노래하지 않는 여자>가 떠오른다. 1971년 프랑스에서는 “나는 낙태했다”는 선언과 함께 임신중단 합법화 운동이 있었다. 당시 함께 목소리를 냈던 아녜스 바르다는 목소리를 내는 데 그치지 않고, 세상을 바꿀 작품을 남겼다. 그리고 2000년의 <이삭 줍는 사람들과 나>. 카메라는 대중들에게도 쉽게 주어지는 도구가 되었다. 그리고 캠코더는 경량화되어 노년의 여성도 한 손으로 들고 다닐 수 있는 물건이 되었다. 그렇게 아녜스 바르다는 여성으로서 노년이 된 자신의 역사를, 세상의 역사를 기록한다. 어쩌면 아녜스 바르다는 이미지의 영화의 역사다.
부르주아 백인 여성인 아녜스 바르다와 야라를 동등한 선에 놓고 비교할 수는 없다. 현대의 난민인 야라는 아녜스 바르다와는 온전히 다른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녀들에게 카메라가 있다는 점만은 분명히 같다. 그리고 이미지로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라는 지점 또한 다르지 않다. 야라는 수용소의 고통스러운 환경 속에서도 카메라를 놓지 않은 사람이다. 사람들과 유대를 만들었을 야라의 사진도 소중하다. 하지만 야라가 뾰족한 시선을 잃지 않길 바란다. 오프닝 시퀀스의 사진이 좋았다. ‘난민’을 배척하는 ‘원주민’들의 야만적인 모습. 그 순간을 still image로 봐서 좋았다. Moving image가 줄 수 없는 것을 still image가 해내기도 한다. 그 남성이 야라의 카메라를 빼앗은 것도 은연 중에 시선의 권력을 파악했기 때문이리라. 시선이 약자에게 주어진 순간, 전복의 힘을 가진다. 이제 그녀의 카메라에 담길 온갖 순간들이 세상을 바꿔나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