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딘가 '이상한 여자'들

나의 영화사

by SUM

불면증 탓에 어릴 적부터 새벽까지 깨어있는 일이 잦았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어느 날 새벽, 채널을 돌리다 <호타루의 빛>이라는 드라마를 만났다. 난생처음 보는 일본 드라마. 그 드라마에 등장하는 아야세 하루카라는 배우에게 눈길이 갔다. 명확한 이유는 기억나지 않으나, 그냥 마음이 갔다. 이후 그 배우가 나오는 작품들을 모두 찾아보았다. 그 유명한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를 보며 눈물지었고, <백야행>을 보면서는 엉엉 울었다. 그렇게 그 배우를 사랑하게 되었다. 인생은 재밌게 흘러갔다. 내가 나고 자란 전주는 ‘영화의 도시’라고 불리는 곳이었다. 2009년 ‘전주디지털독립영화관’이 생겼고, 그해 6월 아야세 하루카 주연의 <해피 플라이트>가 개봉했다. 갓 중학생이 된 어린 나는 약 20~30분 거리에 있는 영화관에 혼자 걸어갔다. 잘 알려지지도 않은 독립 영화관에서 상영되는 마이너한 영화의 관객은 나 하나뿐이었다.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혼자 그 큰 공간을 점유하며, 즐겁게 영화를 본 기억만은 선명하다. 그 기억이 정말 좋았기에, 그 영화관을 계속 찾았다. 지금 봐도 이해하기 힘든 예술 영화들을 보았고, 영화를 보다 잠들기도 했다. 밤에는 그토록 이루기 힘든 잠인데, 지루한 영화를 보면 스르륵 잠이 들곤 했다. 어느새 영화관은 나에게 집보다도 편안한 안식처가 되었다. 그곳에서 본 많은 영화는 이제는 잊혀졌다. 그럼에도 또 하나 기억에 남는 영화가 있다면 <두 개의 문>일 것이다. 한창 사회에 관심이 많았던 나에게 용산 참사를 섬세하게 다룬 다큐멘터리는 인상 깊게 다가왔다. 상영관을 나오자 라디오 프로그램에 삽입될 인터뷰를 요청받았고, 무언가 많은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난다. 그 다큐멘터리를 보고 나도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막연히 생각했다. 2시간 남짓의 작품이 세상을 보는 관점을 바꾸어 놓을 수도 있다는 게 놀라웠다. 그러나 현실감을 가지고 다시 한번 생각했다. 영화를 직업으로 삼는 일은 가난을 선택하는 일이라고 생각했고, 방송국에 들어가는 것이 현실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시사교양 PD라는 꿈을 꾸게 되었다.


대학을 위해 상경했고 시사교양 PD가 되고자 다큐멘터리 워크숍에 참여했다. 처음으로 만든 다큐멘터리는 허술하기 그지없었다. 인정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그때 영상을 만드는 데는 자질이 없다는 걸 은연중에 알았던 것 같다. 사실 워크숍보다 인상 깊었던 것은 워크숍이 끝난 뒤 함께 작업했던 친구들과 스터디를 위해 본 다큐멘터리였다. 아녜스 바르다의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 이 작품은 내 인생을 바꿔놓았다. 노년의 여성 영화 감독은 사진가, 그리고 영화인으로 평생을 살아온 자신의 삶을 돌아본다. 그녀는 마치 밀레의 <이삭줍는 사람들>처럼 작은 캠코더를 들고 이미지들을 수집한다. 흔히들 촬영을 말하는 사냥 같은 ‘Shoot’보다는 채집에 가까운 시간들. 여성을 비롯한 소수자의 삶을 평생을 기록해 온 그녀는 말년에 이르러서도 그들의 삶을 기록하는 데 주목하며, 노년의 여성이 된 자신의 몸 또한 섬세히 기록한다. 이게 말이 되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작품은 이 작품은 피사체를 함부로 대상화하지 않고 그들의 ‘아이 레벨’로 향하여 그들의 진짜 목소리를 담아내는 작품 같았다. 이 작품은 창작의 꿈에 불을 붙였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거창한 꿈이었기 때문에 아녜스 바르다의 필모를 훑는 것으로 꿈을 보류했다. 어쨌든 잘 보는 사람이 잘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의 원전공은 사회학이었다. 앞서 말했듯 사회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선택한 전공이었다. 그러나 영화에 대한 꿈 또한 진심이었기에 관련 수업을 듣기 시작했다. 당시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영화를 진지하게 생각하게 됐고, 자연스럽게 ‘여성 영화’라는 키워드에 꽂혔다. 고전으로 일컬어지는 작품들부터 개봉작까지 챙겨봤다. 여성을 대상화하지 않고, 그들의 아이레벨로 향해 하나의 인격체로 보는 시선이 담긴 작품들을 만나니 속이 다 시원했다. “여풍이 분다”라는 말에 납득할 수는 없었지만, 2018년이라는 시기는 ‘여성 영화’들이 적잖이 등장하는 시기였다. 변수 같은 작품도 있었다. <아워 바디>라는 작품은 나에게 변수였다. <아워 바디>는 트위터에서 ‘부장 섹스 씬’이 있다며, 불매해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돌았던 작품이다. 자극적인 단어로 인해 작품의 훌륭함은 지워지고, 잠재 관객들은 작품을 찾지 않았다. 그게 싫었던 나는 어떤 지분도 없는 영화를 변호하는 일에 열을 올렸다. 그때 어쩌면 나는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이 되고 싶은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비평 수업을 들으며 본격적으로 <아워 바디>에 대한 글을 쓰기도 했다. 논의의 확장을 위해 레퍼런스를 살피다 로라 멀비의 <시각적 쾌락과 내러티브>라는 기념비적인 논문을 만났다. 그녀가 말하는 ‘male gaze’라는 개념을 떠올리면, <아워 바디>는 분명 불편한 작품이었다. 지속적으로 클로즈업되는 여성의 신체는 이미지적으로 ‘male gaze’를 내포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여성의 욕망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않을까. 주인공 자영이 보는 현주의 몸, 그것이 건강한 신체에 대한 욕망이든 성적인 욕망이든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사실 나는 당시 한국의 ‘여성 영화’가 재미없었다. 여성의 고통을 말하며 평등을 논하는 영화들은 의미 있지만, 솔직히 재밌진 않았다. 물론 과거 남성에게 사랑받는 것이 제1과제로 여겨지던 이야기의 시대를 지나 평등을 논하는 시대로 온 것까진 좋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이야기를 배척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나는 평등만을 논하는 ‘여성 영화’보다 <아워 바디>의 자영 같은 ‘이상한 여자’가 나오는 작품이 좋았다.


이후 내가 재밌다고 생각해 온 ‘이상한 여자’들이 나왔던 영화들을 반추해 보았다. 이경미 월드의 <미쓰 홍당무>와 <비밀은 없다> 같은 작품에 나오는 ‘이상한 여자’가 좋았다. 폴 버호벤의 작품 <엘르>도 떠올랐다. 성폭력을 당한 여자가 그것에 쾌감을 느끼며, 과거 자신의 상처를 톺아보는 작품. 노년의 남성 감독이 이런 작품을 만들어냈다는 것이 놀라웠다. 정가영의 <밤치기>도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다. 정가영은 언제나 ‘한 남자의 사랑을 갈구하는 여자’를 감독이자 배우로서 표현한다. 심지어 그 여자는 구차하고 별로다. 이 작품은 편협한 ‘여성 영화’의 개념에 포섭될 수 없다. 그러나 어떤 여성에게는 그런 욕망도 여전히 실존한다. 남성에게 사랑 받고 싶은 여자는 페미니스트가 아닌가? 몇 년간 이런 질문들을 끊임없이 해왔다. ‘여성 영화’ 이전에 페미니즘이라는 이론을 들고 와봐도 그건 아니지 않나. 결국 여자들도 자기답게 살 수 있게 만들자는 것이 페미니즘 아니던가.


지난 해는 꽤나 재밌는 해였다. <챌린저스>의 타시는 표면적으로는 두 남자와 삼각 관계를 이루는 것으로 보이나, 사람보다도 테니스를 좋아하는 여자였다. <서브스턴스>의 엘리자베스의 욕망도 재밌었다. 이 작품을 비극으로 보는 사람들도 많지만, 희극적인 요소도 분명히 존재한다. 수의 신체를 얻은 엘리자베스가 젊은 남자와 섹스를 하는 순간을 떠올려보자. 그때 수의 몸을 한 엘리자베스가 욕망하는 것은 그 남자가 아니다. 그녀는 자신의 몸에 도취되어 있고, 그저 남자는 자신의 아름다움과 활기를 확인하는 수단에 불과하다. 이 작품은 로라 멀비의 ‘male gaze’ 개념을 적용하면 문제적인 작품일 수 있으나, 서사를 제대로 구축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이미지들이었다고 생각한다. 코랄리 파르자는 ‘male gaze’를 유의미하게 가지고 논 감독이다. 이런 흐름에서 한국의 상업 영화계를 떠올렸을 때 특출난 작품은 없었지만, 독립 영화계에서는 특기할 만한 영화들이 있었다. 영화제 상영에 그쳤기에 많이 이야기가 되지는 않았지만, <지구 최후의 여자>와 <아다 댄스>는 두 편 다 뮤지컬 블랙 코미디로 한국 영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우연인 듯 필연인 듯 영화의 곁에서 영화를 사랑하며 반평생을 살아왔다. 불면증 따위는 모르는 삶을 살았다면, 2009년 전주에 독립영화관이 생기지 않았다면, ’여풍‘이 불었던 시대를 살아내지 않았다면 이 애정은 존재하지 않으려나. 아닐 것이다. 결국 모든 것은 선택이었다. 우연이라 포장해 보려 한 선택들은 나는 이 순간으로 데려다주었다. 사실 지금껏 이야기한 ‘여성 영화’가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뻔한 말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여성’이라는 수식어가 필요 없는 시대를 바란다. 그러나 그 논의를 차치하고서라도, 이제 내가 사랑하는 영화가 어떤 종류의 것인지는 알 것도 같다. ‘이상한 욕망’을 가진 ‘이상한 여자’들이 나오는 영화들이 좋다. 나와 닮은 ‘이상한 여자’ 캐릭터를 보고 공감하고 싶고, 나와 다른 ‘이상한 여자’ 캐릭터를 보고 그들의 삶을 이해하려 노력해 보고 싶다. 그런 영화를 다른 관객들과 함께 즐기고 싶다. 안타깝게도 이런 영화는 투자를 받기 어렵다. 특히 한국에선 더 그렇다. ‘이상한 여자’ 캐릭터를 구축하는 데 있어서의 권위자인 이경미 감독은 <비밀은 없다> 이후로 새로운 장편을 내지 못했고, <밤치기> 이후 <연애 빠진 로맨스>로 상업 장편 데뷔작을 만든 정가영 또한 깜깜무소식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남자’들은 많은데, ‘이상한 여자’는 너무 없다. 그렇기에 <서브스턴스>의 한국 흥행은 반가운 소식이다. ‘이상한 여자‘ 캐릭터의 매력을 다행히도 나만 느끼는 건 아닌 것 같다. 이 숫자는 그녀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은 한국의 관객들이 적지 않다는 증명이다. 영화만큼 대자본이 들어가는 예술이 또 있던가. 돈을 따라서라도 한국 영화계는 변화해야 할 것이다. 이제는 어딘가 ‘이상한 여자’들을 한국 영화에서 많이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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