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가린>을 보고
이 작품은 건물의 노후화로 인해 철거가 논의되는 가가린 주택단지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삶을 담아내는 영화다. 이 작품이 주목하는 인물은 유리라는 소년, 그는 친구와 함께 시설 보수를 하는 등 가가린 주택단지의 철거를 막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부모에게도 버림 받고 홀로 살아가는 그에게, 그의 집은 그의 삶이고 그의 우주이다.
이런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철거는 막을 수 없었고, 주민들은 퇴거 요청을 받는다. 그러나 갈 곳 없는 유리는 철거민 신세로 건물에 숨어 살게 되고, 이 영화는 그 삶의 모습을 담아내는데 주력한다. 이런 주제의 이야기는 과거에도 있었다. 철거민들의 삶을 다룬 이야기. 교과서에 실려 익숙한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도 철거민의 삶에 대한 이야기다. 인간의 삶에 가장 기본적인 주거권조차 뺏긴 이들의 삶이 희망찰리는 없는 노릇이니 이런 이야기들은 주로 그들의 삶의 절망적인 부분에 집중한다. 그러나 이 영화의 접근법은 조금 다르다. 이 영화는 유리가 가가린 주택단지가 철거를 앞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오히려 자신의 세계를 공고히 하고 지켜내려는 모습에 집중한다.
<가가린>은 흑백의 자료화면으로 시작하는 영화다. “가가린 알아?”라는 질문에 “최초의 우주인요.”라고 대답하는 소년. 그리고 유리 가가린이 직접 가가린 주택단지에 방문하는 모습이 이어진다. 서술적인 설명은 덧붙여지지 않지만, 이 영상은 <가가린>이라는 영화의 제목이 최초의 우주 비행사 가가린과 연관이 되어있다는 것을 명시한다. 그래서일까. 이름조차 ‘유리’인 주인공은 철거가 진행되는 와중에도 아직은 남아있는 자신의 공간을 우주선처럼 꾸며낸다. 유한한 공간, 유한한 시간. 그럼에도 그속에서 그는 자유롭다. 이 자유로움을 표현하기 위해 감독은 더치 틸트를 사용하여 마치 주인공이 무중력 상태에 놓인 듯한 이미지를 연출한다. 더치 앵글은 주로 인물의 불안감을 표현하는데 사용된다고 알고 있었기에, 이 표현 방법이 신선했다.
유리의 삶이 이렇다면, 다른 이들의 삶은 어떠한가. 자료화면이 끝난 다음, 본격적으로 영화가 시작되며 유리는 망원경을 통해 다른 입주민들의 모습을 잠시 살핀다. <이창>과 닮은 유리의 관찰은 획일화된 단지 속에서도 각기 다른 삶을 꾸려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더불어 삽입되는 익스트림 롱샷으로 건물을 비추는 샷은 수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삶을 꾸려나가고 있을 것임을 암시한다. 이런 백그라운드가 초반에 형성되기에, 결국은 찾아오고마는 건물 붕괴의 순간은 유리 한 사람의 우주가 아닌, 입주민 모두의 우주가 무너지는 순간으로 인식된다.
영화를 보며 가가린 주택단지가 궁금해졌다. 오프닝에 등장하는 유리 가가린의 모습 너머의 가가린 주택단지의 모습은 이곳이 실존하는 공간임을 암시한다. 영화의 중반부부터 유리가 홀로 머무르는 공간의 모습이 주로 비춰지며, 세트 촬영이 섞여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나는 이 영화의 뒷이야기가 궁금해졌다.
그래서 보게된 글이 보그의 <‘가가린’, 어떤 영화는 그렇게 삶을 담아 낸다>라는 글이다. 민용준 칼럼니스트가 쓴 이 글에서는 이 영화의 비하인드를 상세히 살펴볼 수 있다. 먼저 이 영화에 등장하는 ‘가가린 주택단지’는 실존하는 곳이었다. 가가린 주택단지가 완성된 1963년, 당시만 해도 프랑스 공산당은 위세 있는 정당이었고, 이때 지어진 가가린 주택단지는 공산당원 공동체의 유토피아를 건설하고자 마련된 터전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가가린 주택단지의 역할은 변했다. 공산당의 위세가 기울고 동시에 그들의 유토피아도 스러져갔다. 스러져가는 유토피아에 관리는 소홀했을 것, 결국 이곳은 가난한 이민자와 하층민을 수용하는 공간으로 변모한다. 그리하여 가가린 주택단지는 실제로 철거 대상 건물이 되고, 이 스토리에 매력을 느낀 두 명의 감독이 이를 영화로 제작한 것이다. 이렇게 현실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픽션에서 가가린 주택단지가 무너지는 순간 모인 이들은 실제로 가가린 주택 단지에 살았던 이들이라고 한다.
현실을 소재로 삼은 영화는 주로 이런 저런 설명을 덧붙여 관객의 이해를 돕는다. 그러나 이 영화에는 그런 설명적인 부분이 없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가가린 주택단지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유리라는 철거민 개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자신의 우주를 잃어버린 유리의 감정선을 따라가며 가가린 주택단지의 사라짐에 대해 함께 슬퍼하게 한다. 그래서 유리는 가가린 주택단지 그 자체를 은유하는 것으로 보인다. 가가린 주택단지는 자신이 가졌던 가장 큰 의미인 유토피아적인 성격의 상실에도 그저 그 자리를 지키며 낡아가는 것밖에 할 수 없다. 그것을 넘어선 감정을 전달하기 위해 유리라는 인물을 개입시킨 것은 영리한 선택이다.
유한한 것들을 사랑한다. 언젠가는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들. 그것이 인간의 기록 욕구를 자극한다고 생각한다. 나 또한 사라질까 두려운 것들을 기록하고 기억하고자 노력하는 사람이다. <가가린>은 그런 기록의 훌륭한 예시이다. 나는 항상 내가 사랑하는 것들이 사라지지 않길 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유한한 법, 그렇기에 나 또한 기록하는 사람으로 살아가고자 한다. 현재의 이 영화의 감상에 대한 기록도 마찬가지다. 이 영화에 대한 감동이 휘발되기 전에 이 글을 쓰고 싶었다. <가가린>은 이런 기록에 대한 욕구를 다시금 일깨우는 영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