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화반 열면 제가 매주 와인 가져올게요."
서촌그책방 평일 저녁, 입문반 수업이 끝나고 뒤풀이를 하러 간 치맥집에서 K는 말했다. 나는 "하하하, 좋아요"라고 대꾸했지만 속으로 생각했다. 아니, 인원이 여덟 명이 넘는데 매주 와인을 어떻게 가져온다는 거지? 이탈리아 여행에서 와인을 도대체 몇 병을 들고 올 계획이길래. (아.. 놀랍다) 그래도 반가웠다. 내 수업을 연이어 들어준다는 건, 수업이 나쁘지 않았다는 방증 아니겠는가!
매주 목요일 저녁 서촌의 작은 한옥 책방의 불을 밝힌 수강생들은 "그럼 저도 들을래요"라고 화답했지만, 과연 몇 명이나 연이어 들을지 나는 예상할 수 없었다.
딱 한 달 후 K는 카톡을 보내왔다. "작가님 안녕하세요! 퇴근은 하셨지요? 외람되지만 미리 여쭈어봅니다. 6월 심화반은 대략 스케줄을 정하셨을까요?" 나도 내 스케줄이 궁금했지만 서촌그책방 대표님의 느긋한(아니고, 바쁘신 일정 때문에) 연락으로 인해 확정이 되지 않은 상태. 나는 슬쩍 책방 대표님께 재촉 아닌 재촉을 했다. "대표님, 저 화요일 저녁으로 일정 픽스해도 될까요? 아무래도 책방 휴무일에 진행하면 서로 더 편할 것 같아서요. 제가 작은 방에서는 불편해서 수업을 못하겠더라고요." (책상 크기에 매우 예민한 나란 사람... )
두 달 후, "안 들으면 안 될 것 같아서요"라는 말과 함께 여덟 명 중 여섯 명이 심화반에 등록했다. 매주 과제 마감이 부담스러워 하루 전날까지 망설였다는 사람을 포함해. 마냥 반가웠지만 나는 또 속으로 의심했다. 혹시 와인 때문에 다들 재수강한 거 아닐까. 음... 나는 와인을 능가할 만한 수업을 할 수 있을까. 그래도 고마웠다. (설마 와인 때문에'만' 등록하진 않을 테니까)
심화반 공지가 뜨자마자 바로 등록한 K. 얼마 후 카톡이 또 하나 날라왔다.
"작가님 안녕하세요! 첫 수업에도 와인 가지고 가도 될까요? ㅎㅎㅎ"
첫 수업은 K의 와인 덕분에 마치 뒤풀이처럼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마무리했고, K는 말했다. "수업에 방해되지 않도록 와인 양은 잘 조절하겠습니다. 와인 마시느라 끝내는 시간이 너무 늦어지지 않도록 할게요."
와인이란 무엇인가. 나는 원체 물을 안 마시는 편이라 음수량이 무척 적다. 생맥주 500cc도 굉장히 오랜 시간에 걸쳐 마시는 음주량. 와인을 처음 마시게 된 건 아마도 20대 중반 여성지 에디터로 일할 때였는데, 당시 자주 봐야만 했던 사람이 와인을 무척 좋아했다. (그래서 나는 와인에 관해 잘 아는 척하는 사람을 싫어하게 됐는데) 마흔이 넘은 지금, 갑자기 K 때문에 와인을 공부하고 싶은 지경이 됐다. 누가 좋아하느냐에 따라 술에 관한 기호도 달라질 수 있구나, 놀라웠다.
심화반 5강 수업 전, 수강생들과 투표를 했다. "우리 반에서 인터뷰하고 싶은 단 한 명의 사람을 뽑아, 각자 질문지를 준비해 인터뷰해보면 어떨까요?" 두근두근. 누군가에게 궁금한 대상이 된다는 일, 얼마나 기분 좋고 감사한 일인가. 무기명 투표로 진행한 설문에 K는 3표를 얻어 인터뷰이가 됐다. 나는 K의 인스타그램 피드를 보다 그의 (퇴직 전) 정체를 조금 일찍 알게 됐는데, 웬일! 인터뷰 당일 다수의 수강생들이 K의 정체를 밝혀냈다. 소소한 인터뷰 수업이라고 생각했는데 기자 정신을 갖고 인터뷰이의 정보를 샅샅이 찾아본 수강생들에게 나는 무척 감탄했다.
인터뷰이가 되본 경험이 많았던 K. 매주 그가 와인과 함께 싸온 체리, 블루베리, 샤인머스켓처럼 K는 선명했다. 어떤 일에도 과장하는 법이 없는 사람, 딱 느끼는 만큼만 표현하는 사람, 겪은 것만 이야기하는 사람이었다. 누군가 말문을 먼저 열면 하염없이 기다릴 줄 아는 사람, 자신이 이야기의 중심이 되지 않아도 흔쾌한 사람이었다.
<작업으로 말하는 사람들>이라는 책이 있다. 디자인스튜디오 '일상의실천'을 운영하는 김어진 디자이너가 쓴 젊은 작업가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10년 전에 나온 책인데 제목이 좋아 오래 기억에 남는 책을 얼마 전 도서관에서 다시 만났다. K의 삶이 그런 것 같다. 행동으로 말하는 사람. 말이 실천이 되는 사람. 가진 것이 있다면 나누는 사람. 유심할 때와 무심해야 할 때를 잘 분별하고 선택하는 K와 오래 만나고 싶다.
#서촌그책방에서만난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