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 1년간 ‘직주근접(職住近接)이 삶의 질을 얼마나 높이는가?’를 체험했는데, 하루아침에 출근길이 달라졌다. 버스를 타고 3호선, 6호선, 공항철도까지. 지하철 세 번을 갈아타야 직장에 도착한다. 조금이라도 통근 거리를 짧게 하고자 선택한 루트인데, 열차를 놓치면 지옥철에 몸을 맡겨야 한다. 지각을 워낙 경계하는 터라 언제나 서두르는 편인데, 어제는 무려 8시30분에 사무실에 도착했다. 출근시간은 9시인데. 다행히 일찍 연 카페를 발견해 산미가 강한 아메리카노를 한 잔 벌컥 마신 후 직장인 모드에 들어간다. 감정 빼고 이성 착장. 노동은 소중하고 밥벌이는 고귀하니까, 요즘 나의 노동요 장기하의 ‘그건 니 생각이고’를 잠깐 듣고, 몇 통의 뉴스레터를 단시간에 훑고 정확히 8시간, 주어진 몫을 성실히 수행한다.
김훈 작가는 2007년 아주 멋지면서 괴상한 제목의 에세이를 썼다. ‘밥벌이의 지겨움’. 당시 3년 차 직장인이던 나는 노트에 글귀 몇 개를 옮겨 적었다. “밥에는 대책이 없다. 한두 끼를 먹어서 되는 일이 아니라, 죽는 날까지 때가 되면 반드시 먹어야 한다. 이것이 밥이다.” “친구들아, 밥벌이에는 아무 대책이 없다. 그러나 우리들의 목표는 끝끝내 밥벌이가 아니다. 이걸 잊지 말고 또다시 각자 핸드폰을 차고 거리로 나가서 꾸역꾸역 밥을 벌자. 무슨 도리 있겠는가. 아무 도리 없다.” 2015년 ‘라면을 끓이며’로 개정판이 나왔을 때, 나는 얼추 10년 차 직장인이 되어 가고 있었는데 여전히 ‘밥벌이’를 이야기하는 산문에 눈을 빼앗겼다. 그때 남긴 문장은 “진부하게, 꾸역꾸역 이어지는 이 삶의 일상성은 얼마나 경건한 것인가”였다.
왜 인간은 하루에 세 끼를 먹어야 하나. 두 끼만 먹어도 충분할 것 같다는 생각을 매일 하면서도 아이의 삼시 세끼는 반드시 챙기는 엄마가 됐다. 넉넉히는 못 벌어도 열심히 벌어야, 알이 굵은 딸기를 선뜻 고르고 내 코트보다 비싼 블록 장난감도 가끔 사줄 수 있으니, 하고 싶은 말이 생겨도 반만 말하고 ‘내가 힘든 만큼 당신도 어렵겠지’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몇 번의 무례도 애써 모른 체한다.
내 식구에게 밥을 먹이기 위한 노동은 얼마나 신성하고 애틋한가. 나는 소설을 볼 때도, 논픽션을 읽을 때도 밥벌이가 주요한 소재로 등장할 때 눈을 자주 끔벅였다. 김유담 작가의 소설집 ‘돌보는 마음’에 등장하는 한 마디 “아이 키우는 동안 생각 너무 많이 하지 말고 그냥 버티면서 커리어 지켜.” 멋진 여성들의 노동사가 함박눈처럼 쏟아지는 ‘우리가 명함이 없지 일을 안 했냐’는 2022년 나의 올해의 책이었다.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더 잘할 순 없을 것 같아요. 지금은 너무 좋아요. 내가 버니까 친정도 KTX 타고 왔다 갔다 하고 언니 아플 때 반찬도 해서 보내주고 했죠. 내가 벌어서 우리 아저씨 먹이고, 대학 병원도 다니고요. 손녀들한테도 ‘인기 짱’이야. 얼마나 좋아요.”(‘우리가 명함이 없지 일을 안 했냐’)
밥벌이가 난해하고 고되고 치사하고 비루할 때마다 나는 스타벅스에서 휘핑크림을 잔뜩 얹은 프라푸치노 그란데 사이즈를 마시며, 마트에 들러 가장 비싼 과일을 사서 퇴근한다. 마감 세일 같은 건 쳐다보지도 않고 “오늘 겪은 일은 내일의 글감”이라고 되뇌며, 글을 쓰는 인생으로 살게 된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자위한다.
몇 달째 카톡이 계속 울린다. 5년째 ‘직장인으로 살 것인가, 프리랜서로 살 것인가’를 심각하게 고민 중인 대학 친구. 어떻게 그렇게 오랫동안 고민하냐고 나는 채근할 수 없다. 밥벌이는 타인이 함부로 재단하고 판단하고 헤아릴 수 없는 영역이니까. 다만 좋아하는 책 속 한 구절을 슬쩍 건넨다.
“그리 대단한 사람은 없다. 그렇다고 그냥 사는 사람도 없다.”(‘아무튼 인터뷰’)
“길을 잘못 들었다는 생각이 들면 옳은 길을 되찾아 나오면 된다.”(‘카페에서 공부하는 할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