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의 판타지를 벗어나는 일

by 엄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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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타자의 욕망이

내 욕망이 되어버린 판타지 속에서

‘자기계발’로 훈련된 ‘나’는

어쩌면 더는 내가 아닐지도 모른다."

_ 이승원, 『우리는 왜 쉬지 못하는가』 123쪽


"어휴, 극강의 E이신가 봐요. 왜 이렇게 약속이 많으세요." 평일 낮 시간이 아니면 식사 약속을 안 잡는 나인데, 지난주에는 저녁 약속까지 있었던 나를 본 동료의 한 마디. "아니, 제가 만나자는 사람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하는 성격이라서요." 생각해보니 주말에도 전 직장 선배를 5년 만에 만나기로 했다. 평소 거절을 꽤나 잘하는 편인데 최근에는 웬일인지 하나같이 보고 싶은 사람들의 연락이 잦았다.


MBTI 검사를 하면 외향형이 나오긴 하나, 사람들이 지나치게 많이 모이는 공간은 극도로 꺼린다. 셋 만남이 딱 좋다. 네 명까지는 괜찮은데 이유를 따지자면 만나는 동안 잠깐씩 딴청을 해도 괜찮기 때문이다.


가끔 나라는 사람의 특징을 골몰히 따져본다. 취향 확고한 편, 느린 결정 싫어함, 시간을 허투루 보낼 때 스스로를 한심하게 여김, 뭐든지 잘 안 까먹는 편, 머릿속에 늘 해야 할 일들을 리마인드 함. (참 피곤하게 산다) 마흔 개 정도를 주르륵 읊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문득 생각에 잠긴다. 생계형으로 다듬어진 성격인가 타고난 기질인가. 아무도 요구하지 않은 지나친 약속 결벽증(누군가와 한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해)은 어떻게 생겨났는지, 가끔은 풀어지고 싶은데 쉽지 않다.


멍을 때리기 위해, 생각의 갈피를 끊어내기 위해 유일하게 적극적으로 하는 행위는 낮잠 청하기. 잠을 자는 이유는 딱 하나다. 말짱한 정신으로 다시 노동의 세계로 들어가야 하기 때문. 나는 왜 쉬지 못하는가, 왜 쉼 자체를 온전히 누리지 못하고 이조차도 생산적인 행위로 정의하고자 할까. 극단의 효율을 추구하지 않으면 누가 잡아먹기라도 할 듯 스스로를 달달 볶는 나는 때때로 축지법을 배우고 싶은 생각을 한다. (왜?)


지금은 아쉽게도 막을 내린 〈술꾼독서토론회〉 에피소드를 다시 본다. 『우리는 왜 쉬지 못하는가』 이승원 저자를 비롯한 게스트들이 초대 술꾼으로 등장해 자신들의 버킷리스트를 꺼내 놓는다. 3년 전 영상인데도 왜 재밌나. 나랑 닮은 사연들의 등장 때문일까. 누군가의 욕망을 대리 수행하는 인간이 되지 않는 일, 자기계발의 판타지를 벗어나는 것, 과연 올해 여름에는 할 수 있을지. 가만가만 나를 다독인다.




행간과 여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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