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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구마 Jun 30. 2019

#1: 씨앗 가꾸는 여자의 돈키호테 밭

곡성 변현단 농부

사람이 다니는 좁은 길 바로 옆으로 불쑥 자라 오른 풀. 들쭉날쭉한 키. 심은 배열도 삐뚤빼뚤. 전남 곡성 농부 변현단 씨의 밭은 자연스러웠다.  


"이것도 직접 씨앗을 뿌려 키우신 건가요? 잡초 아니고요?"(나)  
"아하하, 이건 우리 토종 콩이예요. 충남에서 가져온 거고요. 이 바로 옆에 심은 건 다른 지역에서 가져온 토종 콩."(변현단 농부)  

그 전에 알던 밭과는 달라 보였다. 같은 품종의 작물이 군대처럼 일렬로 늘어서 있는 게 원래 생각했던 밭. 하지만 변현단 농부의 밭은 여기 이 작물 툭, 저기 저 작물 툭. 좀 산만하고 대신 더 자유분방한 느낌이 들었다. 비유하자면 탱크로 무장한 현대식 군대가 아니라 오합지졸 돈키호테들의 모임 같았다.



"어디에 뭘 심었는지 다 기억하세요?"(나)  
"그럼요. 적어 놓기도 하고. 그리고 보면 알아요."(변 농부)

안내하겠다고 나선 변 농부를 따라 토종 옥수수와 밀, 고구마를 심은 작은 밭을 지났다. 다 토종 옥수수며 밀이지만 품종에 따라 자라는 모양이 제각각이었다. 키가 다르고 잎이 벌어진 형태도 달랐다. 2000평 땅에 300개가 넘는 품종이 딱 몇 개씩만 자라고 있었는데, '작물 박물관' 같았다. 변 농부는 자주색 꽃을 피운 풀 앞에 멈춰 섰다.  

"이게 토종 완두예요. 자주색이 아주 예쁘죠. 보통 완두 꽃하고 다르잖아요." (변 농부)
"아…"  
"(웃으며) 완두를 잘 몰라서 그렇구나. 보세요. 이건 흰색인데, 이건 이렇게 자주색. 완두라고 똑같은 완두가 아니죠(웃음). 이렇게나 (작물 종류가) 다양해요. 그런데 다른 곳에선 한 품종으로 일원화해 심어서 우리가 하나밖에 모르는 거고요."




변 농부의 '특별한 밭.' 여길 찾으려고 고생을 했다. 전남 석곡면 하송리. 변 농부가 사는 곳은 마을에서도 한참을 산길을 타고 올라 올라간 자리에 있었다. 산 속 황토집. 그리고 집을 둘러싸고 있는 특별한 밭. 황토집 앞으로 또 뒤로 온갖 작물들이 제 모습 그대로 자라고 있었다.  

"직접 지은 거예요. 친구들하고 손수 나무 세우고 황토를 발랐죠. 여섯 달 정도 걸렸어요. (옆에 있는 동료를 가리키며)이 친구가 집 지을 때 같이 했죠."  



변 농부는 농사법은 물론 농사의 목적이 다른 농부들과는 다르다. 자신이 스스로 먹기 위해, 또 토종씨앗을 채종하고 지키기 위해 농사를 짓는다.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구한 씨앗을 심어 키워서 숫자를 늘린다. 이렇게 얻은 씨앗은 또 토종씨앗을 찾는 농부들에게 다시 보낸다.  

"토종 씨앗이 뭐예요?"
"학문적으론 원래 1세대 이상 내려온 씨앗을 토종이라 하는데, 그건 너무 길잖아요. 일반적으론 우리 땅에서 자라온 씨앗, 그래서 우리나라의 기후와 풍토에 익숙해진 씨앗. 한 마디로 이 땅에 적응한 종자죠."
"그게 왜 중요한 건가요."
"지금까지 단기적으로 돈을 버는 농사를 많이 지어왔는데 그러면 멀리 못 봐요. 긴 세월을 보는 게 아니에요. 종자 회사들이 확 개량을 해서 종자를 내놓는데, 세대가 이어지지 못하거든요. 터미네이터 종자라고 해서 싹을 틔울 수 없는 걸 써요. 씨앗이 기후와 토양에 적응할 시간을 주지 않는 거예요. 토종씨앗은 다릅니다. 이 땅에서 세대를 거듭하며 살아남은 씨앗이에요. 지속 가능한 씨앗."

변 농부는 토종씨앗을 수집하고 나누는 모임인 <토종씨드림>의 상임이사다. 토종씨드림 창립을 주도했고, 그동안 수 천 종의 토종씨앗을 수집해왔다. 씨드림은 씨드와 드림의 합성어로 씨를 드린다는 의미도 있다. 2009년 9명으로 시작했는데 지금 회원이 1만4000명이 넘는다.



"종자회사에서 개량한 종자가 더 발전된 건 아닌가요?"
"우리 배추는 전통적으로 녹색인 게 더 많았어요. 그런 배추들은 9월에 심어도 됐거든요. 속이 꽉꽉 차고 벌레들이 안 꼈어요. 우리 땅에 맞게 종자가 그렇게 적응됐어요. 농부들이 농사 짓기도 쉽죠. 그런데 지금 개량된 노란 배추는 일찍 심는데, 벌레가 가장 왕성할 때 심어요. 벌레와 투쟁을 해야 해요. 키우기 어려워지고 농약도 써야 하고 벌레와의 전쟁을 해야 하고. 그렇게 되는 거예요. 무도 예전엔 더 맵고 달았어요. 그런데 단맛만 나게 개량하면서 요즘 무는 단맛만 나요. 매운 맛을 잃어버렸어요. 그래서 토종 씨앗은 곧 '다양성'이기도 해요."

변 농부는 전국을 다 발로 돌아다니면서 토종씨앗 지도를 만들었다. 어느 지역의 어떤 농부가 어떤 종류의 종자를 갖고 있는지 조사한다. 토종씨앗의 특징을 분석하고 재배법, 요리법까지 연구한다.



이번엔 논을 보러 갔다. 아직 모내기 전이었다. 논 하면 넓은 직사각형 공간에 물을 찰랑찰랑 채워 놓은 것을 생각했었는데, 변 농부의 논은 작았고, 모양도 좀 삐뚤었다. 따로 키우고 있는 벼 모종도 다 토종이었다. 토종인데, 품종만 수 십 가지다. 똑같은 품종의 벼가 대량으로 심은 논만 보다가 다품종 벼를 보니 신기했다.  


"이게 정말 다 다른 토종 벼라고요?"(나)  
"달라요. 보시면 지금 키도 다 다르잖아요."(변 농부)  

토종씨앗은 곧 다양성이라는 변 농부의 말이 좀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지역마다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는 땅과 환경, 그리고 그것에 특화된 각자의 씨앗들. 같은 종자라 해도 서울 신촌과 전남 곡성에 심으면 토양과 기후가 달라서 농사 결과도 다르게 나온다. 농가의 선택에 따라 다양한 씨앗과 농사법으로 퍼져가게 되는데 이게 바로 토종의 원리다. "보통 옛날 방식으로 농사를 짓는 할머니들이 (토종씨앗을) 갖고 계세요. 예전 씨앗들이죠. 같은 작물이라도 어디서 가져온 씨앗이냐에 따라 특징이 다 달라요. 당연히 맛도 다르고요."



"토종씨앗은 농사짓기가 더 힘들지 않나요? 병해충에도 약하고…."

"그렇지 않다니까요. 적응했기 때문에 아주 강해요. 별다른 약을 치지 않고 비료를 주지 않아도 잘 자라요."  

변 농부의 '뒷간'은 황토집에서 얼마간 떨어져 있다. 용변을 보고 삽으로 떠서 그 위에 재를 뿌리면 빠르게 발효가 되면서 천연 퇴비로 변한다. 뒷간에서 냄새는 전혀 나지 않았다. "보세요. 냄새 안 나잖아요. 깨끗해요." 예전 방식이다. 옛날 농부들은 뒷간에서 퇴비를 만들고, 그걸로 작물을 키웠다. 작물을 수확해 음식으로 해먹은 뒤 다시 뒷간에 가는 방식. 순환적이다.



변 농부의 밭 작물 사이는 풀로 덮여 있었다. 비닐 멀칭을 하는 대신 이렇게 한다고 했다. 풀을 덮어 온도와 습도를 조절하는 방식이다. 다른 곳에선 비닐로 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렇게 하면 빗물이 스며들지 못한다. "토종 씨앗은 그에 알맞는 농사법이 있어요. 나는 다 예전 방식으로 지어요." 변 농부는 예초기를 빼고선 아예 농기계를 쓰지 않는다. 손이나 작은 기구로 한다.


토종 씨앗으로 키운 작물은 먹는 것도 예전 방식으로 먹어야 맛있다고 했다. 농사법이 그렇듯이 요리도 해 먹는 방식이 있다는 것이다. 옛날 고구마는 그냥 삶아야 맛있다. 변 농부는 이렇게 잘 해 먹는 것도 공부한다. "옛날 감자는 새참으로 많이 먹었잖아요. 식은 상태로 먹어야 쫄깃쫄깃 맛있어요. 전통 조리법도 복원하고 있어요. 좋은 걸 잘 키워서 잘 해 먹어야죠."




"와. 이게 다 씨앗들인가요?"

"그럼요. 채종한 것들, 수집한 것들. 이걸 전국에 있는 농부들과 나눠요. 냉장 저장고엔 더 많아요."  

창고에 들어서자 종자로 꽉 차 있는 선반이 보였다. 콩만 해도 수 십 가지. 투명한 통에 나뉘어 담겨있는 종자들은 종이를 붙여 어느 지역 종자인지 표시했다. 상온 보관해도 되는 씨앗들은 이 저장 창고에 보관하고 냉장이 필요한 경우 따로 보관한다고 했다. 같은 콩인데도 씨앗의 모양이 눈에 띄게 달랐다. "보관의 의미도 있고. 더 중요한 건 나눔이죠. 씨앗은 땅에 심어 자라야 의미가 있잖아요."              



그가 전국 토종씨앗 지도를 만드는 것도 나눔을 위해서다. 전국을 다니면서 토종씨앗을 모으고 유래와 특성을 기록하는 작업이다. 작년에 1차 지도를 완성했다. "완전 '노가다'였죠. 발로 뛰면서 조사하고, 기록하고. 올해는 작년보다는 쉬워질 거예요. 작년에 밑그림을 다 그려놨고, 이젠 업데이트하는 식으로 가면 되니까요."
"그런 식으로 씨앗을 여기에 가져와서 모으는 건가요?"
"여기에 모은다기보다…. 모은 뒤에 전국의 농부들에게 보내는 겁니다. 씨앗의 주인은 농부니까요."

변 농부는 수집한 씨앗들을 나누느라 정신이 없다고 했다. 이날도 오전까지 택배 작업을 했단다. 씨드림의 드림이 드린다의 드림이기도 한 이유다. 이렇게 씨앗들은 전국으로 뻗어가고 농부의 손으로 옮겨지고 거기서 또 땅에 뿌리를 박고 자란다.

변 농부는 "씨앗은 농부의 손으로 땅으로 심겨야 제 역할을 다하는 것"이라고 했다. 씨앗의 다양성이 보전되려면 집중이 아니라 분산돼야 한다는 게 그의 철학이다. 흩어져야 살아난다는 뜻 같았다. 토종씨드림이 전국을 다니며 씨앗을 수집하지만 소유하지 않는 것도 그래서라고 했다. 농부의 씨앗을 빌려와 증식하고 나눌 뿐이다.



씨앗 지도 작업이 단순히 지역별 농가를 기록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농가별 네트워크를 만드는 일로 이어진 것도 그래서다. 씨앗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지도를 보고 연락해 찾아갈 수 있다. "씨앗이 재배되는 현장을 보고 서로 정보도 나누는 거죠." 씨드림은 작목별 네트워크도 운영한다. 예를 들면 콩 농부 네트워크에서 모임을 갖고 토종 콩 씨앗을 가져와서 서로 나누는 것이다.  

"토종씨앗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많은가요?"  
"아무래도 요즘 귀농 생각하시는 분들 중에 토종씨앗으로 전통농사를 짓고 싶어하시는 분들이 많아요."
"왜일까요."
"이제 바뀌어가는 것 같아요. 풍요의 시대, 이젠 양적인 부분보다 질적인 부분을 찾기 시작한 것이고. 농사도 소득 중심에서 이제 귀농하는 이유가 다른 걸로 바뀌는 거예요. '그동안 자본주의 사회에서 열심히 살았잖아. 이제는 좀 다르게 살자.' 심리적으로 빈곤해진 사람들이 귀농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아졌고 그렇다면 토종으로, 토종의 철학으로 한번 해보자는 것이죠."  


변 농부는 토종씨앗과 전통농사가 단순한 농업이 아니라 삶의 방식이라고 했다. "단기차익만 노리는 게 아니라는 것, 그래서 이기적이지 않은 거예요. 나 뿐 아니라 이 땅과 생태계 전반적인 것들과 함께 가자는 겁니다."






그는 다시 '다양성'을 이야기했다. "씨앗이 다양하면 가뭄이 들이닥쳐도 한번에 다 망하는 게 아니잖아요. 다양하면 지속적일 수밖에 없어요. 지금까지 농부들이 우리 땅에 맞는 것들을 토착화 시켜 왔는데, 우리도 꼭 나의 세대가 아니라 다음 세대를 위해 지켜나가자는 거예요."

그래서 변 농부는 '농사를 짓는 방식은 어떤 사유체계, 사물을 바라보는 눈'이라고 생각한단다. "농사를 짓다보니 알게 되는 게 참 많아요. 토마토를 열 그루 심었는데, 열 자식 다 달라요. 거기서 자식과 관계에 대한 깨달음도 얻고. 또 질소비료를 많이 주니까 토마토 몸이 커지기만 하고. 사람이랑 비슷하잖아요. 이런 경험들이 참 중요해요."



변 농부가 토종씨앗을 지켜가는 방식은 그가 세상을 대하는 방식과 닮았다. 그는 2005년 경기 성남시에서 10여명의 기초생활수급자 여성들과 도시 농장인 <연두농장>을 꾸려 7년간 운영했다. 기초수급 여성 자립의 방식으로 농사를 택했다.

그 때 풀을 베지 않는 '잡초 농법'을 시작했다. 잡초를 보는 눈을 다르게 한 것이다. "그 때 잡초를 가지고 요리법도 만들고 약으로도 쓰고 이것저것 많이 했어요. 어쩌면 우리가 잡초를 바라봤던 시선이 사회에서도 비슷하지 않았나. '넌 잡초야!'라고 하면 뽑아버리는…."

그가 성남 농장을 접고 곡성으로 내려온 이후 사람들이 알음알음 변 농부를 찾아오는 것도 이렇게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 공감하는 사람이 많아서인 듯 했다. 지금 변 농부는 토종씨드림에서 찾아온 동료와 함께 살고 있다.

돈을 벌기 위한 농사가 아니라 내가 내 씨앗으로 필요한 작물을 자유롭게 원하는 대로 재배하는 것, 양적인 생산을 늘리는 것보다는 다양성을 지켜가는 것, 많이 벌고 많이 쓰는 삶보다는 꼭 필요한 만큼 벌고 필요한 만큼 쓰는 삶. "작은 혁명이죠. 혁명이 따로 있는 게 아니에요. 단순히 토종씨앗과 농사만의 문제가 아니라 나와 내 주변의 삶을 얼마나 건강하게 꾸려가는 지의 이야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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