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좋은생각] 내 욕망의 지도를 들춰내는 것들
한때 유튜브에 재재의 ‘숨.듣.명’이라는 콘텐츠가 인기를 끌었던 적이 있다. 남이 물어보면 자랑스럽게 추천하진 못하지만 알고보니 너도 나도 좋아했던 ‘숨어서 듣는 명곡’이라는 뜻이다. K-팝에 숨듣명이 있다면 로코 매니아인 나에겐 ‘숨어서 보는 내서재’가 있다. 책장 한 가운데 남들 눈에 가장 잘 띄는 자리에 번듯하게 꽂아놓고 손님을 맞이하는 의전용 책 말고 한밤중에 스마트폰 블루 라이트와 싸워가며 혼자 있을 때만 봐야하는 그런 웹소설이나 웹툰 같은 것들 말이다. ‘그 영애가 공작저로 간 사정’, ‘회귀한 공녀는 복수를 꿈꾼다’ 주로 이런 제목을 달고 나와 귀여니 감성을 잇는, 원본은 신데렐라 판타지인 웹 통속소설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장르 문학을 본다고 하지만 이 분야가 여전히 길티 플레저인 이유는 너무 유치해서 차마 보여주기 남부끄러운 제목과 얄팍한 재미만 추구하는 가벼운 내용 탓이 클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솔직한 이유는 이 B급 장르가 너무 적나라하게 내 욕망의 지도를 폭로하기 때문이다. 모든 여자가 예쁠 필요 없다고 말하지만 내가 못생겼다면 열등감으로 보일까봐 나만은 예쁜 상태에서 ‘너는 꼭 안 예뻐도 돼” 여유롭게 말하고 싶은 욕망, 신분제는 폐지됐지만 여전히 계층이 존재하는 불평등한 사회를 나는 위에서 굽어 내려다보며 ‘이건 옳지 않아요’라고 우아하고 고상하게 말하고픈 욕망, 사랑이라는 미명으로 감싸 어떤 순간에도 나를 안온하게 감싸줄 남성 초월자에게 기대고픈 욕망.
언젠가는 반드시 이 부끄러운 이중적인 심리를 농담으로 만들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때마침 기회가 찾아왔고, 2020년 여름 열린 페미니즘 연극제에서 ‘I am a Feminist’라는 주제로 스탠드업 코미디를 하게 되었다. 나는 오랜 숙제인 이 모순을 농담으로 만들어보기로 했다. 어떻게 하면 훈계처럼 들리지 않으면서 최대한 많은 사람에게 공감을 사고 웃길 수 있을까? 한번 수많은 신데렐라 드라마 속 여자, 남자 주인공들이 현실의 인물이라면 어떻게 보일까 비틀어 보기로 했다. 캔디 컨셉에 취해 사는 여자와 그런 여자를 지켜보는 남자. 이 여자에게는 항상 ‘눈물이 차-올라-서 고갤 들어~ 흐르지 못하게 또 살짝 웃어~’ 캔디형 OST가 흐르고, 길고양이를 보면 지나치지 못하고 츄르를 건네는 습성이 있다. 남자는 당연히 젊고 잘생긴 데다 돈도 많은 재벌 3세지만 숨 막히는 집에서 뛰쳐나와 자수성가를 꿈꾸는 인물이다. 그리고 이 현실의 왕자님은 현대에 자수성가할 수 있는 직업은 개발자 뿐이라는 걸 ‘하버드’를 나왔기 때문에 알 수 있었는데, 자신이 성공한 이유는 순전히 자기가 노력한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다행히 관객들은 많이 공감하며 웃어주었다. 미숙한 코미디언인 나에게 주어진 10분짜리 무대에서 고맙게도 킬링 파트가 되어준 농담이다. 하지만 정말 이 농담이 아무에게도 불편하지 않았을까? 누군가는 자신의 욕망을 들킨 것 같아 부끄러웠을 수도, 누군가는 남자를 너무 악의적으로 해석한 게 아니냐며 불편해 할 수도 있다. 이 농담은 나를 희화화하며 아주 순화시킨 농담이지만, 불평등한 세상에서 아직은 누구도 불편하지 않은 농담은 존재할 수 없을 것 같다. 농담은 뭉툭한 화살촉이라 해도 반드시 겨냥하는 대상이 있으니까. 불편하지 않은 농담이란, 불편해야 할 대상은 불편하고 그동안 웃음에서도 너무 많은 수치와 굴욕을 느낀 사람들은 불편하지 않은 농담을 말하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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