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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dsmupet May 27. 2022

또 비밀이야?

호스피스 아로마테라피 일지


내가 만약 시한부 선고를 받는다면, 그때 나의 가족이 그 사실을 나에게 비밀로 한다면, 나는 어떨까?

용납할 수 없을 것 같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찾아오는 몸의 변화나 통증은 나를 두려움 속으로 끌고 갈 것이다. 안 그래도 통증에 민감해서 작은 상처에도 호들갑을 떠는 나에게 이유를 알 수 없는 증상들은 최악이다. 나는 '이래서 이런 거야'라는 설명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람이다. 뭐든 확인을 해야 직성이 풀린다.

그런데 이런 나도 언젠가는 변할까? 세월이 가면 누가 나에게 그런 얘기를 할세라 도망치게 될까? 아무것도 모르는 게 가장 좋은 것이 되어버릴까?


오늘 만난 환자는 90대 할머니였다. 사회복지사님이 '환자분께서는 당신이 암인걸 모르신다'라고 귀띔해주었다. '암'의 'ㅇ'자도 꺼내지 말아 달라는 당부인 것이다. 출발 채비를 하며 그에게 물었다.  


"오늘 만날 분은 90대 할머니인데 가족들이 할머니에게 암이라는 걸 숨기고 계신대. 자기 죽음인데, 자기가 알아야 하는 거 아닐까?"


그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90이 넘으셨다면, 암이라는 사실을 알고 '내가 이런 몹쓸 병에 걸려서 죽는구나'라고 생각하며 남은 시간을 보낼 필요가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몸에 나타나는 증상들을 노화가 진행되며 나타나는 현상이겠거니 생각하며 남은 생을 보내시는 게 어쩌면 더 좋을 수도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듣고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두려움에 잡아먹히지만 않는다면.


할머니는 평생 병원 한번 가본 적 없는 건강한 분이었다고 한다. 그러니 갑자기 암 말기라는 걸 알게 되면 충격이 클 것이라고 가족들은 판단한 듯했다. 할머니는 '내가 원래 건강한 사람이라 병원 한번 간 적이 없는데, 배가 너무 아파. 배만 안 아프면 살 것 같아'라는 말을 자주 하셨다고 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보면 어디가 아픈 분이라고는 전혀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정정하셨다고 한다. 바로 어젯밤까지도! 하지만 암세포는 사람의 마음이 어떻든 상관없이 제 할 일을 할 뿐이니, 할머니의 시간은 예전보다 더 빨리 흐르고 있었다.


"엄마가 몸에 손도 못 대게 하시더니 이제는 의식도 없고 숨 쉬는 것도 너무 힘들어하세요. 어제 주무시기 전까지만 해도 정정하셨어요. 말씀도 잘하시고, 웃고, 떠들고 하셨는데 아침부터 갑자기 이러시네요."

울음이 터진 딸을 두 팔로 감싸 안고 할머니의 모습을 살폈다. 임종에 한 발짝 다가가신 듯하여 잠시 고민했다. 내가 해드릴 수 있는 게 있는 걸까? 사회복지사님도 놀라서 얼른 병원에 전화를 했다. 수녀님이 곧 출발하신다고 하니 남은 시간은 우리의 몫이었다.


몸에 손도 못 대게 하신다니 향기만 맡게 해 드릴까 하다 이불속으로 슬쩍 손을 넣어 발을 만져 보았다. 아무런 반응이 없어서 라벤더 에센셜 오일과 재스민 에센셜 오일을 블렌딩 하여 발에 발라주었다. 발끝이 얼음장이었다. 한참을 만지니 발에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할머니의 눈도 초점을 찾았다. 여전히 숨 쉬는 게 힘들어 보였지만 고개를 움직이며 딸들과 눈을 맞추셨다.


아침에 손주가 울면서 학교에 갔다고 한다. 할머니가 자기를 못 알아본다고.

할머니가 키우다시피 한 손주라 둘의 사이가 각별해서, 손주의 걱정과 슬픔이 무척 큰 상태라고 한다. 두 발을 모두 마사지해드린 후 손에 에센셜 오일을 바르며 할머니에게 "손주가 집에 오면 이름 불러주셔야죠"라고 말씀드리니 눈이 커지신다. 할머니의 반응을 보고 수녀님이 딸들에게 제안을 하셨다.  


"할머니 시간이 이제는 정말 얼마 남지 않았으니 학교에 체험학습 신청하고 손주가 할머니와 온종일 보낼 수 있게 해주는 게 어떨까요?"

딸들이 선뜻 대답하지 못한다. '우리는 어른이니까 괜찮지만' 아직 어린애한테 죽음의 과정을 가까이서 경험하게 한다는 것에 대한 걱정과 거부감이었다.


"우리 엄마의 임종을 딸인 내가 못 본다면 어떨 것 같아요?"

수녀님의 한마디가 결정적이었다. 우리 엄마 임종을 누가 못 보게 한단 말인가! 말도 안 되는 일이잖아. 손주에게는 할머니가 엄마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임종을 앞둔 할머니와 이별을 앞둔 아이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사랑해서 보여주기 싫은 것, 감추고 싶은 것들이 있다. 하지만 보여주기 싫고, 감추고 싶은 것이 사랑하는 이의 몸에서, 인생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면 우리가 그걸 감출 자격이 있는 것일까? 감추면 사라지는 것들도 아닌데. '그때 왜 몰랐지'라며 오히려 자신을 책망할 수도 있을 텐데 말이다. 내가 알게 된 무엇을 스스로 감당하고 있는 중이라면, 그 일의 당사자도 그럴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모두 제 몫의 인생은 살아가고 있으니까.


가족들이 함께 쓸 향수를 만들어주고 왔다. 로즈워터에 사이프러스 에센셜 오일과 라벤더, 일랑일랑, 로즈, 버가못 에센셜 오일을 블렌딩 했다. 사실 이 향수는 초등학생인 손주를 위한 선물이다. 90이 넘으신 노모를 보내드리는 자식들은 '어른'이라서 이별의 준비를 저마다 하고 있지만, 어린 손주는 어른들의 걱정으로 이별을 준비하는 시간을 제대로 갖지 못하고 있으니, 향기라도 그 아이를 도와주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모른 채 막연한 두려움에 사로잡힐 때, 사이프러스 향기가 마음을 이완시켜준다. 안개처럼 시야를 가리던 두려움이 가라앉으면 우리는 바로 앞에 당도한 변화를 알아볼 수 있게 된다. 아이 앞에 당도한 변화가 사랑 속에서 아이를 성장의 길로 데리고 가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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