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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dsmupet Apr 29. 2022

하느님에게 욕 좀 하면 안 돼요?

호스피스 아로마테라피 일지

"선생님~ 내일 9시 40분에 병원에서 출발할게요."


호스피스 가정방문 아로마테라피를 제안한 사회복지사님의 전화였다.

이번이 두 번째 가정방문이다.

첫 번째보다 긴장은 누그러들었지만 마음은 여전히 부산했다. 머릿속에서 이리저리 시뮬레이션을 돌리며 어떻게 하는 게 가장 좋을지 생각이 널을 뛰었다. 결국 어젯밤 '일단 다 가져가서 환자 보고 판단하자. 그냥 내 느낌을 믿는 거야~ 느낌대로 하는 게 제일 낫더라'라고 널뛰는 마음을 살살 달래며 잠자리에 들었다.


곱디 고운 할머니가 침상에서 우리를 맞아주셨다.

사회복지사님과 수녀님이 먼저 할머니와 인사를 나누고 나를 소개할 차례, 나를 본 할머니의 첫마디는 "예쁘네"였다. 말씀도 참 예쁘신 할머니였다.

먼저 할머니의 손을 잡고 "어머니, 지금 제 손이 이 만큼 따뜻한데, 어머니 손이 더 따뜻하네요. 제가 이 온도로 먼저 발을 좀 만져드려도 될까요?"라고 물었다. 할머니는 환한 미소로 대답을 대신하셨다. 할머니 발치로 가서 코코넛 오일로 가볍게 마사지를 하고 베티버와 클라리 세이지 에센셜 오일을 발라드렸다. 아로마 상담의 첫 번째 단계가 바로 이 두 개의 오일을 지정된 자리에 바르고 마사지하는 것이다. 평소에 거동이 자유로운 일반 사람들을 상담할 때는 셀프로 각자의 발에 마사지를 하도록 안내해주지만 거동이 거의 불가능하신 분이라 접 마사지를 해드렸다.

마사지라고 할 것도 없을 정도로 오일을 살살 발라드리는데 선잠이 드셨다가 마사지가 끝나자 금세 눈을 뜨셨다. 아로마 인사이트 카드 중에서 심장과 연결되는 감정 키워드를 가진 카드 10장을 차례차례 보여드리며 가장 마음에 드는 그림을 고르라고 하니 버가못 카드를 고르신다.


말이 되어 입을 통해 몸 밖으로 나와야 할 감정이나 생각이 꾹꾹 눌려서 가슴에 켜켜이 쌓일 때 버가못 카드가 눈에 들어온다. 이럴 때는 나오지 못한 게 나올 수 있는 통로를 만들어주기만 하면 된다. 가장 어려울 수도 있는 일이지만 다행히 그 어려운 일을 버가못의 향기가 해준다. 마들렌과 홍차의 맛과 향기가 프루스트를 어린 시절의 생생한 추억 속으로 데리고 가듯이 버가못의 향기는 단단하게 채워놓은 가슴의 둑에 살짝 구멍을 내준다. 둑을 무너뜨리는 건 이런 작은 균열이다.


이번에도 버가못이 마술을 부려줄까?

바람과 기대가 뒤섞인 마음으로 할머니에게 향기를 맡게 해 드렸다. 방 바깥에 있던 보호자가 "엄마가 냄새를 못 맡아요"라고 말한다. 그런데 할머니는 향기가 난다고 말씀하신다. 어떤 향기인지 여쭤보니 레몬향기란다. 모든 감각이 저하되면서 후각도 많이 쇠퇴한 상태인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할머니는 향기를 느끼고 계셨다. 버가못은 전형적인 시트러스 향기에 살짝 중성적인 혹은 중후한 향이 뒤섞인 오묘한 향이다. 할머니가 이 향기를 레몬향기 같다고 표현하셨으니 분명 향기를 느끼신 것이다. 모두들 신기해하는 가운데 본격적으로 42장의 아로마 인사이트 카드 중 가장 눈에 들어오는 그림 3개를 골라보시도록 했다.


할머니가 선택하신 것은 버가못과 시더우드, 샌달우드였다.

카드를 한 장 한 장 고르실 때마다 가슴에서 먹먹함과 뻐근함이 느껴졌다. 곱디 고운 모습 속에 도대체 얼마나 많은 걸 꽁꽁 싸매고 사신 건지, 무엇을 그리 애쓰고 사신 건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카드와 연결되는 에센셜 오일의 향기를 하나하나 맡게 해 드리면서 카드의 감정 키워드를 설명해드렸다.

"어머니, 버가못 향기는 가슴에 꽁꽁 묻어둔 생각들, 마음들을 밖으로 꺼낼 수 있게 도와줘요. 이 가슴 안에 뭘 그렇게 쌓아두셨어요?"


할머니의 얼굴에서 놀라움과 슬픔이 교차한다. 그다음은 시더우드.

"그리고 이렇게 누워 계시면서도 아직도 뭘 그렇게 애를 쓰고 계세요?"


여기까지 듣고는 할머니가 자식들을 다 부르신다. 자식들이 이 설명을 같이 들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셔서 거실에 있는 가족들을 모두 불러서 처음부터 다시 설명을 해드렸다. 그제야 할머니의 말문이 터졌다. 가족들의 손길에 대한 갈구, 혼자 남겨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 붙잡고 싶은 삶.

그동안 자식들에게 마음의 짐을 더 안겨줄까 봐 꾹꾹 눌러두셨던 마음이 가슴을 막고 있는 둑에 난 작은 구멍을 통해 조금씩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게 할머니가 현재 가지고 있는 버가못과 시더우드 감정의 본채는 아니었다. 할머니가 가족들에게 충분히 말씀을 하시는 동안 잠시 뒤로 물러나 있던 수녀님이 할머니의 요청으로 기도를 시작하고서야 그 감정의 본체가 드러났다.  절실한 기독교 신자인 할머니는 기도를 할 때면 원망스러운 마음이 들기도 하고, 아직은 더 살고 싶은 마음이 드는데, 이러면 안 되는 것 아니냐고 기도 중인 수녀님에게 물으셨다.

 

"왜 안돼요? 그런 걸 속 시원하게 다 얘기하는 게 기도예요. 갑자기 몸져누웠는데 하느님께 원망 좀 하는 게 뭐 어때서요? 더 살고 싶은데 아직은 당신 나라로 가기 싫다고 버티는 게 뭐가 나빠요? 그건 당연한 거죠. 그런 말, 하느님께 진짜 드리고 싶은 말을 하는 게 기도예요."


수녀님의 담백한 대답.

오열하는 할머니를 보며 생각했다.

'나도 그런데!'

수녀님의 대답을 들으며 할머니가 나랑 참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만든 틀에 스스로 갇혀서 사는 삶.

언제든 나올 수 있는 문이 열린 감옥.

누가 잠가놓은 것도 아닌데 그곳을 나오는 게 왜 그렇게 힘들지?

다른 사람이 만든 틀에는 죽어라 저항하면서 정작 자신이 만든 틀에는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는 어처구니없는 사람.


동병상련.

할머니와 나는 동료 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우라고 해야 하나?

할머니에게 해드리는 아로마테라피는 나를 위한 치유의 행위이기도 했다. 할머니의 기도가 틀 속에서 나와 자유롭게 흐르기 시작하는 걸 보며 나도 내가 만든 감옥에서 바깥으로 살짝 발을 내밀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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