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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콩국수

동네잔치

by 노란 보석

어머니의 콩국수

노란 보석

뜨거운 여름 해가 이글거리는 토요일 오후 고향 집에 도착하니 먼저 와 있던 아내의 얼굴이 잔뜩 부어있었다. 어머니가 콩국수를 하겠다고 콩을 자그마치 한 말이나 물에 담가 놓으셨기 때문이다. 우리 식구 먹기에는 한 되만 해도 많을 것인데 한 말을 담갔으니 이걸 다 어찌할 것인가! 아내는 어머니한테는 말도 못 하고, 한숨을 푹푹 쉬며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심상치 않았다. 작은 꼬투리만 잡혀도 폭발할 상황인지라 눈치가 보였다. 이건 내가 보아도 정말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어머니가 정신이 맑지 않으셔서 그런 걸 어쩌겠소. 방앗간에 가면 쉬 갈아 줄 것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소. 당신은 가만히 있으면 내가 다 알아서 하겠소.”

나도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날도 더운데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커다란 양푼 두 개에 가득한 양이니 볼수록 기가 막혔다. 혹여나 일요일에 방앗간이 쉬면 큰일인지라, 읍내 방앗간에 전화부터 하니 다행히 문을 연다고 했다고 했다. 콩국수용 콩을 갈러 갈 거라 하니, 물에 잘 불려서 콩 껍질을 제거한 후 삶아서 가지고 오라 한다.

이 더운 여름에 한 말이나 되는 콩의 껍질을 제거해야 한다니 한숨부터 나왔다. 밤새 콩이 물에 잘 불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할 일이 많으니 먼동이 트기 전 새벽부터 서둘렀다. 아무리 물에 불은 콩이라지만, 술술 벗겨지는 게 아니었다. 큰 나무 주걱으로 휘휘 저어가며 벗기는데 양이 많으니 뻑뻑해서 팔에 힘을 제법 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게다가 이건 해도 해도 끝이 없다. 땀을 뻘뻘 흘리며 휘젓는 데 온몸과 옷이 땀으로 흥건하게 젖었다. 팔이 아프고 허리도 뻐근한데 껍질은 중공군 밀려오듯 쉴 새 없이 나온다. 근래에 이런 육체노동을 언제 했는가 싶다. 올해 흘린 땀을 다 모아도 오늘 흘린 땀의 양의 반도 안 될 것 같았다.

겨우 껍질을 벗겨 놓았으나 삶는 일도 문제였다. 아흔다섯 어머니께서 함께하시겠다고 운반용 핸드캐리를 끌고 나오셨다.

“어머니 뭐 하시는 거예요! 제가 알아서 할 테니 어머닌 가만히 계세요. 더운데 오히려 방해만 돼요!”

부아가 치밀어 올라 큰 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치매 걸린 어머니께 더 무어라 할 것인가? 큰 솥을 아무리 찾아도 없다. 어머니는 부엌에서 두 되 정도 들어갈 만한 조그만 솥을 들고 나오셨다.

“어머니, 이 작은 거로 저 많은 걸 어느 세월에 다 삶아요?” 짜증과 한숨부터 나왔다.

전에 있던 가마솥과 큰 솥은 아버님 돌아가시고, 어머니 저렇게 되시면서 모두 없앤 것 같다. 창고에서 작은 양은솥을 하나 겨우 찾아내서 그 더운 날 장작불을 때서 네 번에 나누어 삶았다. 다 끝내고 나니 9시가 넘었다.


찬물에 샤워한 후 입맛이 없어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삶은 콩을 차에 싣고 읍내 방앗간으로 갔다. 이제 기계에 갈면 된다고 생각하니 그래도 기분이 좋아졌다. 방앗간 아저씨가 기계를 열심히 돌려서 큰 들통으로 두 개를 담아 내놓으셨다.

“아저씨 이렇게 주시면 어떡해 유?”

“응, 이걸 집에 갖고 가서 다시 자루에 넣고 짜내야 먹지.”

“엥! 여기서 짜주지 않나요?”

“아~ 짜는 건 집에서 짜야지~”

이 많은 걸 국물 짜낼 생각을 하니 난감한 상황인데, 옆집 수혁이네 아주머니가 큰 자루를 머리에 이고, 땀을 뻘뻘 흘리며 들어오셨다.

“아주머니는 이 더운데 웬일이세요?”

“응, 미숫가루 좀 만들려고 왔지!”

“땀을 많이도 흘리셨네. 뭘 타고 오셨어요?”

“타긴 뭘 타! 걸어서 왔지.”

이렇게 무더운 한여름에 그 무거운 걸 머리에 이고 십리 길을 걸어오셨다. 하긴, 우리 어머니도 전에 다 그렇게 다니셨으니까, 알았으면 내 차로 같이 오실 걸 그랬다 싶었다.

“그런데 어찌 온 거야?”

“콩국수 좀 하려고 콩 갈러 왔어요.”

“콩국수? 어머니가 또 콩 한 말을 물에 불리셨구나!”

“어떻게 아셨어요?”

“아~ 작년에도 그러셔서 자네 누이가 엄청나게 고생했잖아!”

“나~ 이거 그러지 않아도 집사람이 부어서 난리가 났는데 처리할 일이 큰일이네유~”

“그러지 말고 우리 집으로 가지. 내 도와줄 것이니 나하고 같이 하지.”

“고맙습니다. 그럼 염치 불고하고 신세 좀 지겠습니다.” 나는 구세주를 만난 듯 망설이거나 예의를 차릴 염도 없이 받아들였다.


미숫가루 다 만들 동안 한참을 기다렸다가, 내 차에 모시고 아주머니 댁으로 갔다. 거기엔 삼발이도 있고 베로 만든 큰 자루도 있어서 다행이었다. 큰 양푼을 받쳐 놓고, 삼발이를 올리고, 그 위에 간 콩 넣은 자루를 얹었다. 주루를 잡고 아주머니와 함께 두 손으로 눌러가며 콩 국물을 짜내었다. 더운 여름 날씨에 콩 국물 짜내는 일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누른다고 물이 죽죽 빠지는 게 아니었다. 한바탕 자루를 잡고 씨름을 하고 나니 땀으로 온몸이 다 젖었다. 콩 국물을 큰 들통으로 두통이나 짜냈다. 한 통은 내가 가져오고, 한 통은 동네 사람들과 함께 드시라고 했더니, 그러지 않아도 저녁에 동네 사람들과 모여서 콩국수를 함께 먹을 예정이라고 하셨다.


돌이켜 회상해 보면, 내 어렸을 적 어머니께서는 매해 여름이면 이렇게 콩국수를 해서 동네 사람들과 나눠 먹곤 했었다. 먹을 것이 귀하던 시절이라 콩국수가 땀 흘린 여름을 이기는 보양식이었던 것 같다. 나도 콩국수를 유난히 좋아해서 맛있게 먹었던 일이 잊히지 않는다. 그때는 이렇게 많은 양도 맷돌로 갈아서 하셨는데, 나는 어머니께서 한 번도 힘들어하셨다는 기억이 없다. 힘들다는 내색 없이 당연히 하는 일상으로 생각하고 하셔서 그랬을까? 새삼 어머니의 위대함을 느꼈다. 어머니는 비록 치매에 걸리셨지만, 그 일을 잊지 못하고 계시는 것 같다. 아마 내년에도 또 하실 것이다.

집에 콩이 없으면 안 하시지 않을까 생각하겠지만, 어림도 없는 소리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농사를 짓지 않아서 집에는 콩이나 농산물이 없다. 이번 콩도 어머니가 윗집에서 직접 사서 하신 것이다. 이런 일이 자주 있어서 이웃에게 무엇이건 많은 양을 팔지 말라고 당부를 해 놨다. 하지만 달라는 양을 안 주면 받은 걸 그 집에 내팽개쳐서 아수라장이 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집에 가져온 콩물은 어머니가 작은 통에 나누어 담아서 웃물 집, 윤주네, 뒷집, 찬호네 등 이웃집에 갖다 주라고 하셨다. 옆집 상희네는 안 주나요? 물으니 상희네는 국수를 삶아서 함께 주라고 하셨다. 상희 아버지만 있는 줄 알고 그러시는 것 같다. 쌓였던 울화가 치밀어 올라서

“상희 집에 왔어요. 국수는 안 줘도 돼요!”라고 큰 소리로 말했다.

아내는 콩 국물 갖다 주는 일도 하지 않겠다고 해서 그것도 모두 내가 직접 돌렸다. 상희에게는 어머니가 국수도 삶아서 함께 주라고 했는데, 네가 있어서 콩 국물만 갖고 왔다고 했다. 나중에 들으니 상희네는 국수가 없어서 읍내까지 국수를 사러 갔다 왔다고 한다. 이게 뭔 일인지 모르겠다. 그래도 이웃들이 콩 국물을 받고 고맙다고 하며 얼마나 좋아하는지 고생한 보람이 있었다.


결혼해 살면서 이렇게 아내 눈치를 보고 기가 죽은 게 처음이었던 것 같다. ‘남자는 이럴 때 기가 죽는구나.’라고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내 어머니인 걸 어쩌겠는가?

그래도 아내에게 고마운 건 내가 콩 갈러 간 사이에 밀가루를 반죽해서 칼국수를 만들어 놨다는 것이다. 콩국수야 손칼국수가 제맛 아닌가. 반죽을 잘해서 쫄깃쫄깃한 국수가 시원한 얼음에 식힌 고소한 콩 국물과 어울리니 더없이 맛이 있었다. 게다가 콩가루를 조금 넣으니 더 고소한 멋이 나는데 어릴 적 어머니 콩국수 맛 그대로였다.

비록 힘은 들었지만, 모처럼 어머니의 콩국수를 회상하면서 맛있게 먹었다. 이마저도 몇 번이나 더 먹어볼 수 있을까?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하다. 그런데 오늘따라 어머니 표정이 밝은데 엉뚱한 행동도 별로 안 하신 것 같다.

저녁 먹고 아내는 건넌방에서 누워 있고 내가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윤주네 아주머니가 오셔서

“설거지 하나 봐?”

“아니 유~. 근데, 이 사람 어디 갔어?” 쑥스러워 말꼬리를 돌리다가 건넌방에 가서,

“윤주네 아줌마 오셨어!”라고 말하니 그래도 얼른 일어나서 나왔다. 그냥 누워 있었으면 내 입장이 조금은 곤란했을 것인데, 그렇게 나와 주니 고맙다.


월요일에 집에 오니 아내도 미안했던가 보다.

“당신, 콩국수 하느라 수고 많았어요.”라고 말했다.

치매 걸린 어머니 마음을 헤아리지 못해 미안하다고도 했다. 그 말을 들으니 뻐근했던 어깨가 확 풀리는 기분이다. 그런데, 콩비지는 어찌했느냐고 물었다. 그건 그때 수혁이네 아주머니가 가져왔는데, 우린 그거 안 먹는다고 돌려보냈다고 했더니, 그걸 가져와야 했는데 하면서 무척이나 아쉬워했다.

이렇게 주말을 어머니의 콩국수 때문에 난리(?)를 치르며 고생하고 보냈다. 내 나이 환갑이 한참 지나서야 어머니가 매년 해 주셔서 맛있게 먹던 콩국수 만드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란 걸 알았다. 그래도, 그걸로 온 동네 사람들이 잔치 음식 나누듯 맛있게 먹었으니 되었지 싶다.

그러고 보니 매번 어머니를 뵈러 갈 때마다 치매 걸린 어머니와 몇 번이고 다툼 아닌 갈등이 있었으나 이번엔 그런 일이 없었다. 치매 걸리신 어머니도 콩국수 만드는 걸 기쁜 마음으로 지켜봐 주신 것 같다. 과연 이런 어머니의 콩국수도 몇 번이나 더 먹어 볼 수 있을까?

마음을 돌려 생각해 보면 이런 일도 어머니가 살아 계시니 겪는 일 아닌가. 고향에 내려가는 것도 어머니께서 계시니 가는 것이다. 친구들도 대부분 떠나고 없는 고향을 무슨 재미가 있어 가겠는가?


우리 동네는 작지만, 혈연, 학연 등으로 수십 년, 아니 수백 년 동안 얽혀서 내려온 곳이다. 어머니 덕에 한 집안 같은 동네 사람들과 이렇게 정을 나눌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하루였다. 그런데 그 인연의 끈도 점점 약해지는 걸 생각하면 코끝이 아리다.

이제 나도 한 번 해봤으니 내년에는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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