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엽 문학관에서 열리는<2024 부여에서 신동엽 시인을 만나다> 행사에 참여했다. 여러 시인과 소설가 중에 한 명의 작가를 선택하여 대화를 나누는 <조별 작가와의 만남> 시간에는 조해진 소설가를 신청했다. 얼마 전에 OTT로 만들어진 영화 <로기완>을 봐서 그런지 몇 명의 문인 중에 망설임 없이 조해진 작가를 선택했다. 이 기회에 원작 소설 <로기완을 만났다>도 읽어보고, 작품에 대한 작가의 창작 이야기를 듣고 싶었던 이유가 가장 컸다.
조해진 작가의 첫 느낌은 MBTI의 "I"의 모습이 강했다. 나지막하고 조용조용한 목소리 톤, 아무리 화가 나도 절대 목소리가 올라갈 것 같지 않은, 그러면서도 내면에는 자신만의 확고한 생각과 신념을 지녀 강단이 있어 보였다. 강연 내내 조근조근한 목소리로 작품의 이야기를 술술 풀어나갔다.
작가의 이력 중에 특이했던 점이 폴란드에서 한국어 강사를 했었다는 점이다. 조해진 작가는 2009년에 폴란드에서 크리스마스 휴가로 어디를 갈까 검색을 하다가 우연히 "브뤼셀에서 난민 신청을 하는 탈북민"이라는 기사를 보게 되었다고 한다. 벨기에의 탈북민이라니. 작가는 그 기사를 쓴 유학생 신분의 통신원에게 이메일을 보내게 되었고, 그가 오라고 해서 버스로 24시간도 넘게 걸려서 정말로 벨기에 브뤼셀의 북역에 도착했다.
조해진 작가는 통신원에게 실제 기사 속의 탈북민이 'K'가 난민 지위를 받기 위해 썼던 자술서 사본을 받았다. 실제 인물인 탈북민 'K'는 난민 지위를 받고 자취를 감추어서 만날 수는 없었다. 신분증도 없고, 고국도 없고, 언어도 통하지 않는 사람이 낯선 벨기에의 거리를 다닐 때 어땠을까 상상이 되었다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관광 안내소에서 받은 지도를 보며 'K'가 된 듯 벨기에 곳곳을 돌아다녔다. 소설에서는 'K'의 이름을 실제로 쓰지 않았고, '로'라고 지칭했다. 작가는 통신원으로부터 소설 속에서 '로'가 난민 지위를 얻게 도와준 '박'과 같은 분을 소개받아 만났다. 하지만 소설 속 '박'은 어떤 면에서 홍세화 씨와 같은 모습이기도 하고, 상상 속의 인물이라고도 했다.
작가는 벨기에에서의 만남과 기억의 조각들을 가지고 다시 폴란드로 돌아갔고, 이듬해 여름 한국으로 귀국해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이 소설을 쓸 때의 화두는 '누군가의 고통을 공감할 수 있을까.'였다고 한다. 90년대 중반, 북한에서는 식량난으로 몇 백만 명이 죽었는데, 사람들이 그런 것에 과연 얼마나 공감을 하는지. '연민, 공감, 타인, 타자' 이런 것들을 생각하고 소설을 썼다고 했다. 조해진 작가에 대해 검색해 보니 나무위키에서는 이렇게 평했다.
조해진 작가의 작품을 관통하는 큰 주제가 바로 타자와의 관계이다. 조해진의 소설은 주로 탈경계, 탈민족적이라고 평가되며, 타자가 타자를 대하는 방식과 그 방식의 폭력성, 타자에게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 등을 주된 문제의식으로 제기한다. 거기에 휴머니즘과 위로라는 키워드를 다양하게 변용하여 다채롭고 창의적인 소설 세계를 구축해 나가고 있다.
작가는 나름 야심작이라고 생각하고 썼지만, 막상 2011년에 이 소설이 나왔을 때는 생각보다 반응이 뜨겁지는 않았다 했다. 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되지도 않았지만, 작가는 어느 영화 제작사로부터 영화로 만들고 싶다는 연락을 받는다. 나중에 들은 사실은 영화 제작사의 아내가 이 책을 읽고 남편에게 "너무 상업적인 것만 하지 말고, 이런 거를 영화로 만들어."라고 했단다. 그래서 영화 제작사가 소설을 읽었고, 괜찮다 싶어서 작가에게 이메일을 보냈다고 한다.
영화 '로기완'을 먼저 보고 나서 소설을 읽은 입장에서 영화가 원작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것 같아 아쉬움이 많았다. 그 자리에 모였던 대부분의 청중들도 나와 비슷한 생각이었던지, 원작자로서 영화에 대한 아쉬움이 없느냐는 질문이 많이 나왔다.
"처음에 영화사에서 만든다고 했을 때는 시나리오 작업을 제가 돕기도 했어요. 하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영화 제작이 무산되고 그 대본은 다 폐기되었죠. 2022년 봄에 영화사에서 OTT용 영화로 다시 만들겠다고 연락이 왔고, 송중기 배우가 주연을 맡게 되면서 영화 제작이 급물살을 타고 2023년에 크랭크인 되어서 2024년에 공개되었는데요. 이 영화는 다른 감독이 맡은 거라 시나리오도 그 감독이 다시 작업했어요. 그래서 제가 아쉬운 점을 말하는 게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는데요. 굳이 말하자면, 소설 속의 김작가가 영화에는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고요. 또 소설에서 로기완이 사랑한 대상은 불법체류자인 필리핀 여성이었는데, 영화에서는 성공한 한인의 부잣집 딸과의 사랑으로 바꾼 것이 좀 아쉬웠어요. 그래도 로기완을 품위 있게 그려서 좋았어요. 배우들도 연기를 너무 잘했고요. 영화를 보고 나서 난민에 대해 궁금해하는 사람이 많이 생겼다는 점도 고마웠고요."
굳이 소설에 로기완의 필리핀 여성과의 로맨스를 왜 넣었는지 묻자 조해진 작가는 이렇게 답했다. "영국의 도버 해협을 지나면서 난민들이 실제로 많이 죽는다고 해요. 로기완은 다행히 꿈꾸던 난민 지위를 받고 돈을 벌 수도 있게 되었지만 사는 데 그게 다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내면에 어떤 공허함이 있을 거고요. 그래서 '사랑'을 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소설 속 김 작가의 모습에 실제 조해진 작가가 어느 정도 일치하느냐는 질문도 있었다. 기사를 보고 작가가 벨기에 북역에 도착해서 바이올린 소리를 듣고, 직접 거리 곳곳을 걸었고, 호텔 리셉션 직원에게 인종차별을 당하는 경험이 소설에 부분적으로 반영은 되었지만, 어디까지나 김 작가는 창조된 인물이라고 했다. 소설 속 윤주라는 인물은 '병원 24시'라는 다큐멘터리에서 본 어느 여고생이 얼굴 옆에 있는 혹을 제거하는 장면을 바탕으로 만들었다고 했다.
소설에서 김 작가가 로기완을 바로 만나지 않고, 벨기에에서 한참을 머물다가 돌고 돌아서 마지막에야 만나는 구성에 대해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누군가에 대한 호기심이 연민이 되고, 타인에게 공감하기까지의 과정이 필요했어요. 그것은 김 작가의 아픔, 자신의 과오와 실수를 발견하는 과정이기도 하고, 한편으로 스스로를 용서하고 싶은 마음이기도 하지요. 김 작가는 윤주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로기완에게 더 관심을 가지게 되고, 그 마음속에는 자신을 용서하고 싶은 마음이 깔려 있다고 생각해요."
조해진 작가는 역사와 사회 문제에도 관심이 많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은 홀로코스트나 홍콩 민주화 운동 등 시대적 아픔을 많이 다루고 있다. 또한 작품 속에서 주요 인물로 성 소수자나 난민, 국가적 폭력의 희생자, 노숙자 등 소수성을 가진 인물을 주로 담아내고 있다. 소수자의 이야기를 표현할 때 그들의 고통을 재현하는 것이 의도치 않는 상처를 주지는 않는지 고민이 될 것 같다는 질문에 "누군가의 고통을 대상화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그들의 고통에 대해 '내가 이렇게 할 수 있어'라기보다는 그들의 고통에 대해 방황하고 주저하며 망설이는 인물들을 그리려고 해요."라고 말한다.
소설을 쓰는 사람인지라 남들에 비해 고통을 직시하게 된다는 조해진 작가. 누구나 가진 결핍을 열어서 확장하는 게 소설가의 역할이라고 말하는 조해진 작가의 부드러운 말투 속에서 타인의 고통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는 것을 넘어 깊이 공감하는 내면을 충분히 엿볼 수 있었다. 타인의 고통을 알아가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세상이 조금은 살 만해질 것이다.
이번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한강 작가가 최근에 읽고 있는 소설 중의 하나가 조해진 작가의 '빛과 멜로디'라고 했는데, 그래서인지 두 작가의 작품 세계의 기저에는 '타인의 고통에 대한 연민과 공감'이 깔려있는 것 같다. 나직이 말하는 두 작가의 목소리 톤이나 분위기도 비슷한 것 같다. 작가들이 끊임없이 타인의 고통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창작하는 한, 그 소설을 읽는 사람들의 마음도 조금씩 움직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