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집에서 자는 게 그때는 왜 그리도 즐거웠는지
청소년 시절, 두근거리던 외박의 기억
외박이라는 말에 가슴이 설레던 때가 있었다. 꽤 자유로운 집안에서 자랐지만 또래 여자아이들 만큼은 엄격한 아버지를 두고 있었으므로, 외박은 자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미리 허락을 받아야 했고 믿을 만한 친구의 집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어야 했다.
첫 외박은 아마 중학교 때였던 것 같다. 그 친구의 이름은 은지가 아니지만 이 글에서는 은지라고 부르겠다. 처음 가본 은지네 집에서는 은지의 냄새가 강하게 났다. 걔네 집 화장실에서 씻으면서, 낯선 바디워시와 샴푸의 향기를 맡으면서 나는 은지에게서 풍기던 냄새의 출처를 알 수 있었다.
은지와 나는 거실에 이불을 펴고 나란히 누웠다. 은지는 자기 방이 없어서 늘 거실에서 그렇게 잔다고 했다. 은지네 가족은 어머니, 할머니, 오빠, 그리고 은지. 이렇게 넷이었다. 할머니와 오빠는 방이 있었고 어머니와 은지는 방이 없었다. 그날은 어머니께서 할머니 방에서 같이 주무셨다.
작은 소리로 TV를 틀어두었지만 우리는 그걸 보고 있지 않았다. 나와 은지 모두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은지네 집은 거실 바닥에 카페트가 깔려 있었고 벽지와 천장의 무늬가 화려했다. 우리는 그 무늬를 눈으로 세면서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자?"
"아니."
"무서운 얘기 하자."
중학교 2학년짜리 여자애들이 모여서 밤에 잠을 잔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알고 있는 무서운 이야기들을 하나씩 꺼내놓기 시작했지만 우리의 이야기는 전혀 무섭지 않았다. 둘 다 무서운 이야기에 재능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우리는 재빨리 화제를 전환했다.
"진실게임 하자."
"그래."
우리는 각자의 비밀을 서로에게 말해줄 생각으로 마음이 부풀었다. 하지만 중학생 여자애들에게 대단한 비밀이란 게 있을 리 없었다. 그즈음에는 같은 반 남자애들을 죄다 멍청이라고 깔보고 있었으므로 연애 얘기도 할 수 없었다. 주제는 금방 동이 났고 우리는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이야기는 끊어질 듯, 끊어질 듯하며 간헐적으로 계속 이어졌다. 새벽 세 시가 되도록 우리는 잠들지 않았다. 재미있는 이야깃거리가 없어도 함께 누워 있다는 것, 자지 않고 늦게까지 깨어 있다는 사실만으로 한껏 즐거워질 수 있었다.
고등학생 때 했던 외박도 생각이 난다. 이 친구의 이름은 지우라고 하겠다.
지우는 부잣집 딸이었다. 2층짜리 단독주택에 살았고 현관문 앞에는 넓은 마당까지 있었다. 가을이면 좋은 향기가 나는 모과 열매가 나무마다 주렁주렁 열렸다. 그래서인지 나를 가끔 학교 앞까지 태워주셨던 지우네 아버지의 차 뒤쪽에는 늘 울퉁불퉁한 모과가 한두 개씩 놓여 있었다.
지우네 집에 놀러 가본 적은 많았지만 자고 오는 건 처음이었기에 그날 나는 유독 들떠 있었다. 심지어 그날은 지우네 집이 통째로 비는 날이었다. 부모님은 출장을 가시고, 남동생도 친구 집에서 자고 온다고 해서 그날 밤은 완전히 우리 세상이었다.
우리는 저녁 여덟 시에 동네 마트에서 만났다. 우선 아이스크림이며 과자, 젤리 같은 것들을 이만 원어치쯤 샀다. 그 후에는 편의점으로 향했다. 나보다 외모가 성숙한 편이었던 지우는 짙은 화장을 한 채 커다란 링 귀걸이를 짤랑거리며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지우가 술을 사는 동안 나는 멀리 바깥에서 마음을 졸이며 기다렸다. 그 편의점은 이미 '뚫어놓은' 곳이어서 걱정할 필요가 없는데도 술을 살 때면 늘 긴장이 됐다. 편의점에서 나오는 지우의 손목에 검정 비닐이 걸려 있는 걸 본 나는 지우에게로 쪼르르 달려가 안겼다.
지우네 집까지는 칠 분쯤 걸어가야 했는데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빗줄기가 굵지는 않았지만 옷이 젖을 수는 있을 정도의 가랑비였다. 우리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깜빡이는 녹색 신호를 따라 횡단보도를 건넜고 그대로 쉬지 않고 집까지 달려갔다. 깔깔대는 우리의 웃음소리가 빗속으로 흩어졌다.
술을 마셔본 것이 그날이 처음은 아니었다. 사실 우린 술을 꽤 자주 마셨다. 작정하고 소주를 잔뜩 사왔지만 그날따라 금세 취하고 말았다. 우리는 몽롱하게 취한 채로 내일이면 잊어버릴 말들을 주고받았다. 그때 무슨 대화를 했는지는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 술을 마시고 나누는 대화가 으레 그렇듯이.
다음날 지우는 나를 급하게 깨웠다. 부모님이 곧 오실 텐데 너무 오래 자버렸다고, 술판을 벌인 흔적을 빨리 치워야 한다며 툴툴거렸다. 우리는 공기 가득 진동하는 술 냄새를 빼기 위해 창문이란 창문은 다 열어두었다. 내가 어젯밤의 흔적 속에서 담배를 꺼내어 물자 지우는 내 등짝을 세게 후려갈겼다.
"이 상황에 담배 생각이 나냐? 술 마신 거 걸리면 나 좆된다고."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지우 역시 은근슬쩍 담배를 입에 무는 걸 보며 나는 웃었다. 아마 그때 지우네 부모님은 우리가 거기서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웠다는 걸 알고 계셨을 것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고등학생이란 원래 그런 존재인 것을.
친구네 집에서는 늘 친구의 냄새가 났다. 눈을 감은 채로 들어가더라도 여기가 누구의 집인지 훤히 알 수 있을 듯했다. 친구가 쓰는 바디워시로 몸을 씻고, 친구가 꺼내준 잠옷을 입고, 친구가 깔아준 이부자리에 누워 있노라면 친구가 나를 꼭 끌어안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온 사방에서 친구 냄새가 났다. 그러면 왠지 모르게 아주 그리운 기분에 휩싸였고, 내 삶의 가장 재미있는 순간이 지금 지나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엉엉 울고 싶어지기도 했다.
은지도, 지우도 이제는 머나먼 추억 속의 존재가 되어버렸다. 어떻게 살고 있는지 소식조차 모를 정도이니 둘을 다시 만나게 되는 일은 아마 없을 것 같다. 그래도 누군가의 집에서 나는 향기를 맡을 때면 어김없이 그 시절이 떠오른다. 코끝에 아로새겨진 그 기억 속에서 우리는 영원히 열다섯, 열일곱의 소녀들로 남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