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유형의 상사는, 아니 사람은 처음이라 많이 당황했습니다.
회사를 이직하고 첫 출근날 마주했던 K부장은 늘씬한 키에 과하지도 너무 추레하지도 않은 적당한 비즈니스룩을 입고 있었다. 조금은 날카로웠던 첫인상과 달리 털털하면서도 적당히 시크할 줄 알았던 그녀. 그동안 남자 상사만 접해왔던 내게 그녀는 소히 잘 나가는, 부족함 없는 커리어우먼처럼 느껴졌고 만나는 사람들마다 내 첫 여자 상사분이 얼마나 멋있는지 자랑하기 바빴다.
하지만 이건 채 한 달도 가지 못했다. 한 달도 가지 못해 그녀가 내게 정체를 조금씩 들켰기 때문에.
출근 첫날 그녀와 단둘이 첫 점심식사를 할 때 그녀는 그때도 자기 객관화가 되지 못한 채 이렇게 말했었다.
"지금 우리 팀은 대리님과 나 둘 뿐이에요. 이 전 팀원들이 다 나갔거든. 나는 팀이라는 게 각자 각개전투하는 게 아니라 다 같이 가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 친구들은 그러지 못했고"
이건 그녀의 고질적인 첫 만남 대화 방식의 루틴이다. 자신과 등 돌렸던 사람들을 담백하게 욕하면서 상대가 나에게 동정심을 갖도록, 내가 정상이고 나머지는 비정상으로 느낄 수 있도록 하는 화법.
"그리고 내가 그 친구들과 원래는 같은 팀원이었어요. 그러다 갑자기 팀장을 맡게 됐고. 그 친구들은 그게 마음에 안 들었던 거지. 팀원이었던 팀장을 받아들일 수 없었나 봐. 통제가 안되더라고."
아! 이때 눈치챘어야 했는데, 권위의식을 매우 좋아하는 K부장은 첫 만남부터 퇴사한 팀원들이 얼마나 자길 우습게 여겼는지, 얼마나 자길 팀장으로 대우 안 해줬는지를 쏟아냈다. 그간 난 조금은 가부장적이지만 항상 든든한 아빠, 오빠 같은 팀장님들만 접해봤기에 팀장은 하늘이자 힘든 회사 생활을 버틸 수 있는 나무 같은 존재였다. 그런 내게 K부장이 말하는 팀원들은 MZ를 넘어선 폭주족 같은 느낌이라, 그녀가 너무 안쓰러웠고 나를 만나서 다행이다라는 오만까지 들 정도였다. 그렇게 회사에서 가장 열심히 일하고, 가장 애쓰고, 팀원들을 가장 생각한다는(K부장 피셜) K부장이라는 사람의 예고편은 한 달 내내 상영되기 바빴고, 한 달 동안 예고편을 보면서 한껏 기대했던 내가 본편을 틀었을 때 '아, 예고편에 완전 속았네'라고 생각했다.
이건 처음으로 그녀에게 충격 먹었던 사건이라 몇 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의 감정이 고스란히 생생하다. K부장은 일하는 틈틈이 낮이든 저녁이든 내게 편의점에 가자고 하는 걸 좋아했다. 그때는 바쁜 내게 잠깐의 숨통이라도 주고 싶다는 따스한 팀장으로서의 배려라는 듯 말했지만, 9시 30분에 출근해서 18시 30분 전까지 열심히 메신저 하고 쇼핑하는 그녀의 하루 루틴 중 하나였을 뿐이었다.(그녀는 실컷 놀고 18시 30분부터 갖은 곡소리와 함께 업무를 시작한다. 마치 하루 종일 업무 하다 끝내지 못해 야근으로 이어진 사람인양.) 그날도 여느 때처럼 조금은 넉 빠진 채로 야근을 하고 있었는데 그런 내게 K부장이 잠깐 바람이나 쐬면서 리프레쉬하자며 날 데리고 나왔다. 찬 밤공기를 맞으며 시끄러운 강남 일대를 산책하다가 들어간 편의점. 먹고 싶은 거 다 골라오라며 마치 레스토랑에라도 온양 으스대는 그녀에게 콜라 한 캔을 가져갔다.
쉐이킹 쉐이킹 쉐쉐쉐쉐쉐쉐이킹
(열심히 흔들던 그녀의 모습은 너무 어이가 없던 터라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건네받은 콜라를 마치 조커처럼 씨익 웃으며 흔드는 K부장. 잠깐이었지만 그녀의 얼굴에서 희열을 보는 듯한 기분까지 들었다. 사람이 너무 놀라면 억 소리도 못 낸다고 하지 않았던가. 난생처음 겪어보는 상황에 놀라 입을 쩍 벌었다가 이내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물어봤다.
"ㅌ..팀장님, 뭐하시는 거예요...?"
"내가 대리님이니까 이만큼만 흔든 거야, 다른 사람이었으면 얄짤없었다~"
나를 많이 아끼고 생각해서 위트 있는 장난에 절제력까지 담았다며 신나 말하는 그녀. 크게 혼난 것도, 욕먹은 것도 분명 아니었는데, 차라리 나한테 소리 지르며 화내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싸이코틱한 상황에 큰 충격을 먹었었다. K부장도 그런 내 반응을 눈치챈 듯 돌아오는 길에 넌지시 한마디 흘겼다.
"아니, 내가 장난이 조금 심하거든. 남자애들은 시원시원하게 받아치는데 여자애들은 날 진상 취급하더라고. 대리님은 잘 받아줘서 다행이야.(호탕한 웃음)"
자신의 장난이 무례한지도 모르고 그저 상사이기에 웃음으로 대처했던 사람들은 장난을 즐길 줄 아는 사람, 용기 있게 무례함에 반응했던 사람들은 무서워서 장난도 못 치는 진지한 사람 취급. 거기에 난 본인의 장난을 잘 받아주는, 받아줘야 하는 사람이라고 가스 라이팅 하며 깔끔하게 마무리.
이 사건으로 시작으로 조금씩 K부장이라는 '사람'에 대해 찜찜함이 생겼고 그 이후의 에피소드들은 나를 완전히 질려버리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