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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기중 Sep 27. 2020

치매와 노스탤지어 (Nostalgia,향수)

집으로 가고 싶은 사람들

친척의 장례식이 끝나고 사십구재에 참석했을 때 일이다. 비통한 가족들의 무거운 침묵을 깨고 목탁 소리와 함께 망자의 혼을 좋은 곳에 보내기 위한 스님의 낭랑한 독경 중 다음 말에 눈이 번쩍 떠졌다.


"  ***시 ***동 ***아파트 ***동 ***호에 살았던 영가는.... '


 한문으로 이뤄진 범어에 뜬금없이 집주소가 너무 자세히 나온다. 동 호수까지 이야기하니 처음에는 스님이 잘못 읽으셨나 하는 생각이 들어 나도 모르게 스님을 바라봤다. 스님은 개의치 않고 또 범어를 읽으신다. 분명 다른 내용의 불경인데 계속 주소를 붙인다. 이제는 스님들 모두 다 같이 외치신다. 평범한 주소도 독경 리듬을 타니 색다르게 다가온다. 꿈도 세 번 이상 반복되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하는데 분명 의도가 있을 것이다. 내가 만약 영가라면 마지막으로 떠나기 전 하고 싶은 게 뭘까. 내가 살았던 곳, 내가 가족들과 같이 있었던 곳, 내 추억이 담긴 곳, '집'에 들리고 싶지 않을까.


연어, 새, 벌과 같은 수많은 동물들이 태양, 별, 바람, 지구의 자기장을 이용하여 어느 순간 자신이 태어난 곳, '집'을 찾아 떠난다. 우리는 이를  '귀소 본능'이라 한다. 베른트 하인리히의 '귀소본능'을 보면 큰 뒷부리 도요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 새는 알래스카에서 번식을 마치고 남쪽 뉴질랜드나 호주로 돌아가는데 꼬박 8일간 10,000km를 쉬지 않고 날아간다. 놀라운 점은 이 나그네 새가 비행 동기를 제공하는 뇌를 제외한 모든 장기, 근육, 체지방을 소진시킨다는 것이다. 자신의 생명에 해가 될 것임에도 이런 행동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집'으로 가고자 하는 욕구는 식욕, 성욕, 수면욕처럼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본능, 생명 현상에 가까운 것 같다.


동물에게 귀소 본능이 있다면 사람에게는  '노스탤지어 (nostalgia, 향수)가 있다. 향수라는 단어가 품고 있는 이미지는 평온했던 시절의 그리운 사람들과 고향에 대한 정서적 기억일 것이다. 대표적으로 정지용의 '향수'에 그려지는 그 이미지 말이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얼룩배기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하지만 노스탤지어가 최근 시인, 소설가뿐만 아니라 학자들 사이에서 깊이 연구되는 생명 현상이라는 건 흥미로운 사실이다.  과거 노스탤지어는 정신질환의 한 종류였다. 17세기 스위스 의학도인 요하네스 하퍼는 해외 여러 나라에 파견된 스위스 용병 중 심한 우울증, 극심한 피로, 소화불량, 발열 등의 공통적인 증상군을 보이는 환자군을 발견했다. 이들은 제대를 해 그들의 집인 알프스로 돌아가지 않으면 자살처럼 거의 죽음 단계에 이를 만큼 증상이 악화되었다. 호퍼는 이런 증후군을 노스탤지어, 즉 향수병(homesickness)으로 이름 지었고 이후 미국 독립전쟁과 같은 다른 나라에서도 이와 비슷한 증상을 보이는 환자군이 발견되면서 19세기 말까지도 죽음에 이를 수 있는 병으로 인식되었다. (https://psycnet.apa.org/record/1995-09606-001)


그러나 20세기 넘어서 노스탤지어는 '향수병', 즉 질병의 의미보다 '향수', 그리웠던 시절의 사람, 시간, 공간의 과거 기억으로  이해되었다. 죽음에 이르는 질환이 아니라 삶의 고통을 견딜 수 있게 해주는 (psychological resilience, 심리적 회복 탄성력) 우리 뇌의 생명현상으로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과거 죽음에 이르는 병으로 인식된 건 오히려 노스탤지어가 그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않아 생긴 현상으로 해석됐다. 이런 관점에서 치매 노인에게도 노스탤지어는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실제 이를 기반으로 한 치매의 비약물적 치료 중 회상 치료(Reminiscence therapy)가 있다. 치매 노인의 감정적 기억을 불러내고 이를 다른 사람과 공유함으로써 기억과 타인과의 상호작용을 동시에 촉진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치료법이다. 기억을 불러 내는 촉매 역할로 기억 카드를 이용하는데 아래 그림과 같이 일반적인 카드도 있지만 오래된 델몬트 오렌지 유리병 같은 좀 더 개인적으로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사진도 활용할 수 있다.

중앙치매센터(두근두근 뇌 운동 발췌)


그리고 이런 작업이 단순 기억을 회상하는 정도가 아닌 노스탤지어를 끌어내는 수준까지 진행된다면 치료 효과는 더욱 뚜렷해진다고 한다. 웨스트 잉글랜드 브리스톨 대학교의 제인 메이릭 의하면 노스탤지어를 유발하는 회상 치료과 일반 회상 치료를 비교했을 때 개인의 노스탤지어가 자극될수록 연대감, 자존감, 삶의 의미, 긍정성이 더욱 회복되는 것으로 확인했다.

(https://journals.sagepub.com/doi/abs/10.1177/1471301218774909)


노스탤지어는 아무 때나 경험할 수 있는 현상이 아니라 슬픔, 외로움, 무의미로 인해 심리적 고통이 컸을 때 유발된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후각, 청각, 시각 등의 감각이 동반된 형태의 감정적 기억을 더듬어 올라가는 과정을 통해 더욱 활성화되고 그 과정 동안 부정적 감정이 완화된다고 한다. 실제 최근 진행된 노스탤지어의 뇌과학적 접근은 이런 해석을 뒷받침하고 있다. 2016년 도쿄도립대학의 요시아키 키쿠치 연구팀의 뇌영상 (fMRI) 연구 결과에 따르면 노스탤지어를 경험하는 동안 뇌의 기억과 관련된 해마 영역과(HIppocampus)와 보상기전과 관련된 뇌 영역 (Substantia nigra/ventral tegmental area, and ventral striatum)이 동시에 활성화되는 것을 확인하였다.


여기서 중요한 의미는 도파민과 관련된 뇌 보상 영역의 활성화다. 도파민은 우리가 짜릿한 행동을 하면 쾌감을 느끼고 그것을 계속 추구하는데 작용하는 신경전달물질이다. 이는 마치 우리가 극한 상황을 마주했을 때 아드레날린이 분비되는 것과 비슷한 즉각적 반응이다. 연구팀은 이 결과를 바탕으로 노스탤지어를 고통스러운 상황을 견뎌내기 위한 뇌의 생리학적 방어기제 그리고 '살아 가기 위한 강한 동기 (strong motivation to live)'로 이해했다. 내 몸의 면역력이 감염을 막아주듯, 노스탤지어는 견딜 수 없는 정서적 고통에 대한 심리적 면역을 강화시켜준다는 해석이다. 추가로 도파민은 정서적 영역 이외 기억의 강화와 학습 능력에도 직접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알려진 신경전달물질이다. 경도인지장애나 초기 치매 단계라면 기억력 자체에도 긍정적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자신에게 남아있는 아늑한 기억과 감정의 잔상을 따라가는 건 마치 연어가 자신의 생명의 힘을 다해 거친 물살을 헤치며 강을 따라 올라가는 과정과 비슷하다. 자신이 잉태되었던 최초의 장소에 도착하면 연어는 분명 죽음을 맞이 할 것임에도 그것을 찾아가는 과정은 치유의 과정이요, 삶의 목적을 달성하는 과정이다. 단순 추억이 아니다. 이는 본능(성욕, 식욕, 수면욕 등)처럼 강한 생명 본능이요, 치유의 힘이 있다.


병원이나 요양원이 아니라 집에서 생의 마지막을 보내고 싶다는 그 분들의 바람을 듣는다. 나 또한 그렇게 내 삶의 마지막을 기다리고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가 되면 진료실에서 자녀들과 함께 그 분을 전문 시설로 보내야 할지 고민한다. 그리고 등급 판정 회의에서도 보호자의 요청으로 어르신들의 시설 입소 여부를 결정내린다. 누구보다 노스탤지어가 필요하신 분들에게 그들의 귀소 본능에 역행하는 제안하게 되는 것이다. 이때의 미안함은 아마 가족들도 같은 마음 이리라. 그러기에 나쁜 치매를 착한 치매로 돌릴 수 있었으면 좋겠고 그들 마음 안에 있는 노스탤지어의 치유 과정을 더 깊이 이해하고 싶은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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