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주머니 속 천 원을 만지작거렸다

아이는 아이가 되지 못했다

by 빈틈


내 나이 스물한 살. 남들 보다 일 년 늦게 대학에 입학했다. 수능을 치르고 나서, 저렴한 등록금 때문에 입학했던 집에서 가까웠던 국립대학교는 하루도 나가지 않고, 3월 6일에 자퇴서를 냈다. 입학 후, 4일 만이었다.


재수를 하면서 가고 싶었던 예대는 일찍 포기를 했다. 우리 집 형편상 아이 셋을 대학 보내는 건 불가능했으니까. 결국 나와 동생은 국립대학교를 자퇴했고, 다음 해에 나란히 학자금 대출을 받아, 서울 소재 대학에 진학했다.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2008년 3월이었다.


원룸을 얻을 돈이 없어, 홍대입구역 근처에 있던 작은 고시원에서 서울 생활을 시작했다. 지방 중에서도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시골’에 살았기 때문에 문화적 결핍이 있었던 우리에게 ‘홍대입구역’은 다방면으로 결핍을 해소해주는 공간이 되었고, 어렵고, 힘든 우리의 삶이 조금은 괜찮아 보이는 착각에 빠지게 했다. 그리고 그 착각 덕분에 우리는 삶을 견뎌냈다.


“이 많은 집들 중, 왜 우리 집은 하나도 없을까? “


동생과 지하철을 타고 지나갈 때마다 했던 이야기가 현실이 되어 고시원에 들어섰을 때, 그래도 우리가 누울 방이 있다는 사실이 행복했다.


가고 싶었던 과에 진학했기 때문이었을까. 학교 생활은 너무 즐겁고 행복했다. 덕분에 학과 소모임 활동도 열심히 했고, 인생 첫 연애도 시작하게 되었다. 그런데 열심히 살면 살수록 생활은 불행해졌다. 돈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강의가 끝난 오후에는 소모임 스터디 참여로 아르바이트를 할 수 없었던 중, 학교에 가려면, 밥을 먹으려면, 가끔씩 남자친구를 만나려면 데이트 비용도 필요했다.


그날도 어김없이 스터디 때문에 학교에 나가야 했는데 내가 가진 돈은 고작 천 원이 전부였다. 학교를 가는 일이 망설여졌다. 버스를 타고 학교에 가려면 왕복 이천 원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집에 요청해서 돈을 보내 달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집안 형편은 어려워진 상태라, 연락을 할 수 없었다.


주머니 속 천 원을 만지작거리다가 버스를 타고 학교에 갔다. 강의 시간 내내, 집에 어떻게 가야 하나 그 생각에 강의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무슨 정신이었을까, 결국 소모임 스터디까지 참여했다.


“언니. 저 천 원만 빌려 주실래요?”


평소 가깝게 지내던 선배 언니에게 용기를 내서 돈을 빌렸다. 언니는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제가 지갑을 놓고 왔어요.”


차마 돈이 없어서라고 말하지 못했다. 돈이 없어서 천 원을 빌린다고 생각조차 못할 정도로 가난을 경험해 보지 못한 선배는 흔쾌히 돈 오천 원을 빌려 주었다. 갚지 않아도 된다는 말과 함께.


그리고 그날, 7612번 버스에 앉아 점퍼에 달린 모자를 눌러쓴 채, 눈물을 흘렸다. 가난이 내 삶에 머물러 죽을 만큼 비참하던 그때, 내 나이 스물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