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곡과 고독

체르노빈의 음악

by Komponist

체르노빈(Chaya Czernowin)의 음악을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출발점은 그것이 무엇을 표현하는가가 아니라 어떤 상태에서 쓰였는가라는 질문이다. 그녀의 작업은 감정의 표출이나 메시지 전달 이전에, 창작자가 어떤 위치에 자신을 놓고 있는가를 끊임없이 드러낸다. 그 위치를 규정하는 핵심 개념이 바로 고독이다.

그러나 이 고독은 흔히 상상되는 외로움이나 고립과는 전혀 무관하다. 작곡가에게 고독이란, 자기 자신의 판단을 끝까지 감당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누구의 취향도, 어떤 전통도, 어떤 기대도 대신 결정해 주지 않는 자리. 다시 말해, 결정의 책임을 외부로 전가할 수 없는 상태가 곧 작곡가의 고독이다.

작곡가는 혼자 작업실에 앉아 있지만 사실 혼자가 아니다. 이미 들은 음악들, 스승과 동료의 목소리, 제도와 역사, 대중의 평가, 심지어는 자신이 과거에 만들어 놓은 작곡 언어까지도 현재의 선택에 개입한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고독은 자연스럽게 주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가장 도달하기 어려운 상태이며, 의식적인 결단과 훈련을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다.


체르노빈의 음악이 쉽게 분류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녀의 작업은 특정한 스타일을 확립하려는 시도라기보다는 이미 굳어 있는 스타일과 기대를 끊임없이 벗겨내는 과정에 가깝다. 이 점에서 그녀는 자신을 반(反)스타일의 작곡가로 위치시킨다. 스타일은 정체성을 보증하는 수단이 될 수 있지만 동시에 사고를 정지시키는 장애물이 되기도 한다. 체르노빈의 작업은 바로 그 지점에 대한 지속적인 경계로 읽힌다.

이러한 태도는 종종 ‘용기’라는 말로 설명되곤 하지만, 이 표현은 그녀의 창작 윤리를 정확히 포착하지 못한다. 그녀에게 용기란 정치적, 윤리적 차원에서 작동하는 개념에 가깝다. 예를들어 특정한 정치적 분위기나 집단적 합의에 맞서 발언하는 행위, 혹은 일상의 작은 장면에서 다수의 흐름에 저항하는 태도는 분명 용기의 문제일 수 있다. 그러나 창작 행위를 용기라는 말로 설명하는 순간, 그 안에는 낭만주의적인 과잉과 영웅적인 제스처가 개입한다.

John Cage의 [4분 33초]가 종종 ‘용기 있는 작품’으로 언급되는 데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케이지가 그 작품을 세상에 내놓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Robert Rauschenberg의 화이트 페인팅이 제공한 정신적 지지가 있었다.

b8e7c55bbc297510e70352b847f52283.jpeg?type=w773 Robert Rauschenberg - White Paintings


즉, 그 행위는 이미 형성된 예술적 맥락 속에서 이루어진 선택이었다. 중요한 것은 아무도 하지 않은 일을 했다는 서사보다 자기 존재를 걸고 반드시 해야만 했던 행위인가라는 질문이다.

이 지점에서 체르노빈은 창작을 ‘용기’가 아니라 ‘강박’의 문제로 바꾼다. 쓰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쓰는 것, 그것이 그녀가 말하는 창작의 조건이다. 이는 예술을 직업이나 표현 수단이라기보다 존재를 성립시키는 조건으로 이해하는 급진적인 실존 인식이다. 이 관점에서 창작은 선택이 아니라 필연이고 자유의 표현이기보다는 오히려 벗어날 수 없는 요구에 가깝다.

이러한 인식은 그녀의 정치적 작업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체르노빈의 오페라들은 홀로코스트, 중동의 전쟁 현실, 극단화된 정치적 목소리와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다. 그러나 그것들이 일장적인 정치적 입장 표명이나 이념적 선언으로 귀결되지 않는다. 그녀의 음악이 요구하는 것은 어느 편에 설 것인가가 아니라 사고가 멈춘 상태 자체를 의심하라는 요청이다. 집단, 구호, 이념 이전에 개별적인 인간의 판단과 책임을 다시 호출하는 것. 이 점에서 그녀의 정치성은 선동이 아니라 철저히 사유의 문제로 남는다.


체르노빈이 자주 사용하는 risk taking 개념 역시 이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여기서 위험이란 외부의 비난이나 실패 가능성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익숙해진 작곡 언어, 반복 가능한 스타일, 스스로에 대해 형성된 이미지로부터 벗어나는 데서 발생하는 위험이다. 다시 말해, 매번 처음처럼 판단해야 하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위험이며 동시에 창작의 핵심 조건이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을 반(反)스타일의 작곡가로 위치시킨다. 이는 스타일을 부정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스타일이 사고를 대신해 주는 순간을 경계한다는 뜻에 가깝다. 그녀의 작업은 새로운 양식을 구축하기보다 양식이 굳어지기 직전의 불안정한 지점을 끊임없이 유지하려는 시도로 읽힌다.

작곡가는 거대한 역사와 지식, 이미 이루어진 수많은 작업들 위에 서 있다. 완전히 새로운 땅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그 안에서 각자가 기여할 수 있는 영역은 극히 작다.

작고, 새롭지 않으며, 전체를 바꾸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 작은 영역이 철저히 자기 자신의 판단과 책임으로 형성된 것일 때, 그것은 분명한 기여가 된다.

체르노빈의 음악은 이 점에서 타협하지 않는다. 고독은 감정이 아니라 책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