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 두면 성격 나온다. '기풍'이란 표현이 그래서 유효하다. 돌격대장처럼 전투적으로 나오는 이들부터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널까 말까 고민하는 수비적인 유형까지 한 수 한 수 스타일이 드러난다.
내 경험엔 지금까지 중국 사람들이 돌격대장에 가까웠다. 처음부터 비틀어오고 조여 오고 찔러와서 하수 시절엔 온갖 난전을 겪다가 초반부터 무너졌다. 공격당할 때마다 손해 보는 게 싫어 어설프게 반박했더니 그런 난전이 일상인 이들한텐 더 많은 약점이 노출돼 치명타를 맞고 쓰러졌다.
요즘 나는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거나 돌아가는 쪽에 가깝다. 과거 이창호 국수가 완성한 스타일인데 당연히 나 같은 하수와 비교 대상은 아니지만 그 마음가짐과 원리를 머리론 이해하고 있다. 예전 농구할 때나 가끔 축구게임하듯이 수비부터 단단해야 한다는 그런 기본을 다시 상기하고 있다.
그렇게 상대가 찔러오면 한 대 맞은 뒤에 어루만지고 비틀어오면 모르는 척 물러선다. 당장은 손해를 보는 느낌도 들고 이렇게 해선 결국 집 부족으로 질 것 같단 불안감도 들지만 불필요한 싸움을 최대한 피하며 죽지 않기 위해 약점을 최대한 다져둔다.
그런데 이렇게 버티고 버티다 보면 재미난 상황이 발생한다. 어루만지고 물러서고 다듬었던 돌들이 중반을 넘어갈수록 엄청난 힘을 발휘하는 '때'가 오는 것이다. 우주의 원소 개수보다도 '경우의 수'가 많다는 바둑이지만 착수할 지점이 줄어들수록 필연적으로 생과 사를 오가는 전투가 벌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때'가 되면 내가 손해를 보면서도 단단히 쌓아뒀던 돌들이 거대한 성벽으로 작용해 저절로 상대를 몰아친다.
그렇게 또 배운다. 지혜롭게 물러서고 단단히 응축하고 올바르게 쌓다 보면 '때'는 온다. '때'가 오면 과거의 인내는 저절로 기회를 만들어 5대 5 싸움이 아닌 9대 1 전장을 건축한다. 두텁게 뒀던 돌들이 중앙에서 힘을 발휘해 상대 대마를 휘청이게 할 정도로 연쇄 작용을 일으키는 그 '때'를 매일 경험하고 있다. 배우지 않을 이유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