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핑하고 포케먹고 카페갔다가 일하는 일상
오늘 무심코 날짜를 보니 월급이 들어오는 날이다. 신난다. 해외에서 받는 월급은 너무나 짜릿해! 아침에 뭉그적 일어나서 꼼꼼하게 햇빛알레르기 연고를 바르고 두꺼운 롱제인(발목까지 오는 긴 다리에 팔은 민소매인 여성용 서핑슈트)에 하얀 래시가드를 입었다. 래시가드를 이렇게 유용하게 쓸 날이 올 줄이야. 갖고 오길 정말 잘했다. 다만 정말 유난스러워서 오늘은 아무와도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다들 수영복을 입는 와이키키에서 혼자 롱제인에 래시가드라니. 서핑샵에서 보드를 빌리면서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다. 선래시가 났는데 서핑 오고 싶어서 이렇게라도 입고 왔다고.. 그는 뭔지는 몰라도 안 됐다는 표정을 지어 보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날이 그리 쨍하지 않고 바람이 불어서 사람들이 추워했다는 것. 나는 긴팔긴바지 덕분에 따뜻했어.
오늘은 파도가 0.3m로 작아서 사람들이 더 큰 스폿으로 가지 않을까 조금 기대를 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많았다. 메모리얼데이가 다가와서인지 요즘은 서핑 스폿뿐만 아니라 와이키키 전체에 사람들이 부쩍 더 많다. 코나커피도 줄이 항상 엄청 길고 마루카메가락국수의 줄도 이해할 수 없이 엄청나게 길다. 파도가 작은 탓에 초반에는 파도가 잘 안 오고 잘 안 잡혀서 이래저래 잡생각(주로 일생각)이 들었다. 일생각을 하니 머릿속이 분주해지기 시작한다. 일은 일 할 때만 생각하자고 되뇌면서 패들을 했다. 오늘도 서핑이 끝나면 카이커피 가서 아사이볼을 먹어야지~ 생각하니 곧바로 기분이 좋아졌다. 잡생각을 하며 방심했다가 갑자기 커진 파도에 말리는 바람에 옆에 있던 사람에게 보드가 부딪혔다. 너무 미안해서 암쏘쏘리를 몇 번을 외쳤는지.. 다행히 크게 부딪힌 것 같진 않았지만 방심하지 말아야지.
이제 어느 정도 오다 보니 매번 보는 얼굴들이 보이고 서로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오늘은 다이앤이라는 새로운 친구를 사귀었는데 유난히 좋다. 나이대도 비슷하고(비슷한 줄 알았다) 서핑실력은 그녀가 더 잘 타지만 비슷하고 영어도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여기 산다고 하는데 멋진 구릿빛의 쭉쭉 뻗은 팔다리를 가졌다. 비키니에 매튜스조끼를 입었는데 너무나 멋져 보였다. 유난히 구린 오늘의 내 옷과 비교된다. 워니가 가자마자 새로운 친구가 생겨서 좋아. 파도가 오면 같이 타기도 하고 서로 타라고 하기도 하다가 깔깔대기도 했다. 세션이 끝나고 내일 봐~ 하면서 헤어졌다.
씻고 잠시 눈 붙였다가 해변가의 카페로 왔다. 오늘도 너무 아름다운 이곳. 행복하다! 다만 아사이볼을 혼자 먹으려니 조금 많다. 항상 워니와 카페 오면 커피 하나 아사이볼 하나를 주문해 나눠먹으면 양이 딱 맞았는데. 워니 잘 지내려나? 생각하는데 마침 그녀에게서 영상통화가 왔다. 오늘부터 일을 시작한 그녀의 표정부터 벌써 달라졌어. 역시 하와이라서 웃을 수 있었던 우리. 웃으려면 계속 여기 있는 수밖에 없는 걸까..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서 사는 나는 그려져도 일하는 나는 그려지지 않았다. 작은 섬 하와이에서 일하는 사람은 전문직과 서비스직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그만 기회만 생긴다면, 누군가가 한 마디만 한다면 여기서 일을 하면서 살 수 있을 것 같다. 서버로든 캐셔로든. 조금 현실적인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한국 집을 정리하고 여기서 나는 일본어를 다시 배우고 영어도 더 능숙해지면 어디엔가 취직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추가로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외주로 돌려 재택으로 간간히 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와이키키는 비싸니까 집은 조금 멀리에 구하고 대신 중고차를 한 대 사고. 그런 꿈을 조금 꾸어보았다. 비자만 받을 수 있다면 그리 말이 안 되는 꿈은 아닌 것 같다. 한국에 돌아가면 조금 더 가볍게 살아야지. 언제든지 어디로 떠날 수 있는 삶을.
카페에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오늘도 포케를 포장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집 주변 포케 맛집을 발견했다. 요 며칠 내 점심을 책임지고 있는 포케집. 한 곳에서 살면서 이 지역에 대한 해상도가 높아지고 있음을 느낀다. 아무것도 몰랐던 주변에 단골 서핑샵과 카페가 생기고 자주 가는 포케집이 생긴다. 하나씩 경험한 곳이 늘어날 때마다 흐릿했던 동네 지도의 한구석이 선명해진다. 그중 가고 싶은 곳이 생기고 좋아하는 곳이 생긴다. 그렇게 외부인으로 시작한 내 삶이 조금씩 하와이 동네 한 구석에 스며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