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결혼하고 첫 해였다. 결혼을 하면 내 삶이 완전히 안정적인 궤도에 오를 거라 생각했었다. 내심 아쉬워하던 그 예상과 달리 새로운 일들이 벌어졌다.
결혼 후 챙길 것이 많아졌지만 곧 균형을 찾았다. 함께하는 여행의 즐거움도 알게 되었고, 국내 여행도 재미있었다. 굳이 멀리 인상적인 곳을 찾아갈 필요 없이 가까운 곳이라도 멋진 숙소만 있으면 충분했다. 주로 목적이 있는 여행을 했었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러 가는 여행의 묘미를 알았다.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낼 사람이 있으니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시간이 잘 갔다.
나의 인생에 공허함은 항상 따라다녔다. 공허함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견딜 수 없었다. 소위 '멍 때린다'라고 말하는 시간이 나에게는 안절부절못하는 시간으로 느껴지곤 했다. 그러나 함께 있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공허함이 줄어들었다. 곧 집에 돌아올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시간을 어떻게 쓸지 몰라 유튜브를 보던 시간 대신 해야 할 일들을 해치우는 데 시간을 더 쓰게 되었다. 나 혼자 쓸 수 있는 시간이 없어진 대신 그만큼 공허하게 보내던 시간도 줄어든 것이다. 나쁘지 않은 결과였다.
결혼 전 나의 가장 큰 고민은 일 말고는 우선순위가 없어서 항상 일을 우선순위로 놓게 된다는 것이었다. 가족처럼 변치 않는 우선순위가 내 삶에 있어야만 했고, 그 점이 나를 결혼으로 이끈 가장 큰 이유였다. 결혼 후 이 부분은 놀랍도록 충족되었다. 오랜 시간 일을 해도 억울함이 덜했다. '지금은 그럴 시기니까'라는 생각을 했다. 둘이서 공유하는 목표가 생기니 일에 많은 시간을 쏟는 것이 우선순위가 높아서가 아니라 잠깐의 희생을 선택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혼하고 나니 내 미래를 몇 년 단위로 계획할 수 있게 되었다. 한 치 앞도 모르던 때와 몇 년 앞이라도 보이는 것은 꽤 다르다. 설령 계획이 바뀔지언정 목표가 있다는 것은 현재의 괴로움을 감수할 수 있게 한다. 결혼하고 생긴 가장 좋은 변화였다.
작년엔 집을 사지 못했지만, 덕분에 올 한 해 동안 많은 지역을 보러 다녔다. 지역 이름을 말하면 지역이 눈에 선할 정도로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서로의 취향도 잘 알게 되었고 어떤 집에 살고 싶은지도 알았다. 부동산의 3요소는 입지, 입지, 입지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깨달았고, 앞으로의 의사결정도 그에 따를 것이다. 내가 원하는 집은 역세권 평지에 있는 대단지, 그것뿐이다. 다만 어느 역 주변에 있느냐에 따라 가격이 천차만별로 달라질 것이다. 작년에 사려고 봤던 집이 5억씩 올랐다. 올 초에는 속이 참 쓰렸는데, 이제는 떠나가는 배의 뒤꽁무니만 바라봐서는 무엇 하나 싶다. 그저 꾸준히 돈을 모으고 조금씩 투자하면서 때를 기다리는 수밖에.
올해 초 새로운 프로젝트에 투입되면서 일이 참 바빠졌다. 처음에 함께 일해보고 싶었던 매니저와 일하게 되었는데, 그 결과는 참담했다. 멀리서 보이던 모습만 보고 그와 함께 일해보고 싶었지만, 결국 내가 인간적으로 존중하지 못하는 매니저라면 함께 일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홀로 간직하던 괴로움을 오랫만에 옛 직장동료를 만나 토로했다. 그는 이미 처음 매니저를 만났을 때부터 그의 인상이 좋지 않다고 느꼈다고 한다. 그런 인상을 느끼지 못했던 내가 참 아쉬웠다. 그렇지만 그가 함께 분노해줘서 나의 억울한 마음이 조금은 가라앉았다. 내가 어떤 매니저가 되고 싶은지, 내가 되지 말아야 할 모습의 매니저는 어떤 모습인지를 생각해보았다. 이제 누군가를 관리하려면 인간적으로 존중할 만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도 알았다.
그와 동시에 매니저에게 말하는 나의 방식이 너무 딱딱하다는 것도 깨달았다. 몇 년간 사람 만날 일이 별로 없어서 사람 스트레스가 없던 삶을 살아왔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안 맞는 사람과 일을 하는 것에 내가 더 취약해진 것을 느꼈다. 그리고 아직도 아이처럼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감정과 표정 조절이 잘 안 되는 것도 느꼈다. 내가 말하는 방식이 어떻게 나에게 해가 되는지, 그리고 그가 말하는 것을 감정적으로 받아들였을 때 좋은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잠자는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일하는 시간인데, 그 시간에 관계가 좋지 않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도 알고 있다.
매니저도 나도 서로 관계를 좋게 하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하고 있다. 주변 사람들이 "너희 왜 그러냐"는 피드백을 주면서 우리의 난기류가 남들에게까지 보인다는 것을 알아챘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금만 예민한 문제가 나오면 서로 날이 선다. 가스라이팅을 참고 있던 나를 폭발하게 한 시발점은 승진에 대한 말을 슬그머니 바꾼 것이었다. 나에게 바라는 것이 많다면 그만큼 나에게 대가를 주어야 일하는 서로의 관계가 성립될 수 있다. 그는 아등바등 일하면서 나도 그만큼 아등바등하기를 바란다. 하지만 내가 열심히 일할 수 있는 건 성과가 나에게 돌아온다는 보장이 있을 때다. 오히려 나보다 짬이 훨씬 높거나 레벨이 높아서 내가 비교할 생각을 못 하게 하거나, 최소한 내가 원하는 것을 줄 수 있는 사람과 일할 수 있으면 어땠을까 한다.
이제 내 나이대의 친구들은 여기저기서 매니징을 꽤 한다. 나도 조금씩 매니징을 해야 한다는 불안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원래도 사람 다루는 일을 잘하지 못했던 나는 4년간 재택을 한 뒤에 사람 대하는 방법을 거의 완전히 잊어버린 듯하다. 이게 아쉬운 부분이다. 대기업에 안정적으로 있었다면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는 부분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고 - 물론 불만도 있었겠지만 - 그만큼 사람을 대하는 일에도 익숙해졌을 것이다. 내가 부족한 부분이 더 두드러지게 된 것이 아쉽다. 내년에는 이런 부분을 조금 더 집중하고 싶다.
그럼에도 올해 힘들었던 만큼 성장한 것도 사실이다. 업무적으로는 새로운 분야에 뛰어들면서 좋은 커리어를 쌓았다. 올 한 해는 머신러닝 AI분야를 집중적으로 개선했다. 올해는 MLE의 인풋 정보를 정제해서 제공하고 ML 파이프라인 주변 기능을 개선하는 데 집중했다면 내년에는 본격적으로 MLE 파이프라인을 메인으로 집중해서 개선하는 것을 기대한다. 이를 최근 가장 수요가 많은 부분이라 나의 커리에어도 장기적으로 도움이 될거라 기대한다. 내년까지는 AI분야에만 집중해볼 것이다.
두번째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영어가 확 편해졌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제는 통역을 쓸 때 한중통역을 쓰는 것과 영중통역을 쓰는 것의 차이가 예전처럼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영중을 쓸 때가 의미가 깔끔하게 전달되어서 내가 메인발화자가 아닐 때는 영중을 훨씬 선호한다. 다만 내가 메인발화자일때는 아직 멀었다. 영중을 썼을 때 아직 더 지치고 회의 아젠다의 집중도도 떨어지는 느낌이 있다. 영어가 는데는 싫든 좋든 미국인 매니저와 매일같이 지지고 볶은 덕도 분명 있다.
영어가 늘면서 가장 좋은 점은 유투브 컨텐츠의 폭이 엄청나게 넓어졌다는 것. 의식하지 못한 채 어느 새 내 쇼츠의 절반은 영미권 컨텐츠다. 아침마다 하는 짧은 요가 채널도 미국 크리에이터들 중 맘에 드는 사람들 몇 명으로 정착했다. 언어에 구애받지 않고 영어와 한국어 컨텐츠를 넘나들 수 있는 것은 아주 좋은 점이다.
건너 지인은 완전 한국인인데도 영어로 말하는 것이나 한국어로 말하는 것이나 편함이 크게 차이가 없다고 했다. 이렇게 된 것은 영어로 생각하기 시작하면서부터라고 한다. 습관처럼 한국어가 들리면 영어로 번역해보고 영어가 들리면 한국어로 번역해 본다고 한다. 나는 아직 영어로 생각하는 데는 무리가 있다. 그래서 그 리듬과 어조를 익혀서 자연스러운 농담을 주고받는데에 아직 어색함을 느낀다. 내년에는 무의식적으로 영어로 생각하고 말할 만큼 발전하고 싶다.
내년에는 혼자 해외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결혼을 한다는 것이 영영 뿌리박는 것 같아 내심 아쉬웠던 나에게 마지막 날개짓을 할 시간이 주어진 것 같아 기뻤다.
다만 그 때문에 우리 강아지를 엄마 집에 맡기게 되었다. 나와 거의 24시간을 붙어 지내던 아이를 보내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엄마 집에는 이미 비슷한 크기와 나이대의 강아지 두 마리가 전원주택 마당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실내견인 우리 강아지가 마당 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을지, 나를 떠나 슬퍼하지는 않을지 노심초사했다.
예상과 달리 우리 강아지는 우리 집에서보다 훨씬 더 행복해 보였다. 친구들과 신나게 뛰어놀고, 엄마 아빠가 주는 사랑과 간식을 듬뿍 받으며 잘 지냈다. 애가 써서 몇 번이나 엄마 집에 내려갔는데, 나를 봐도 잠깐 반가워할 뿐 금세 다시 친구들에게로 달려갔다. 사회성이 없어 걱정했던 우리 강아지였는데, 다행히 잘 어울러 논다. 엄마 집 강아지들이 워낙 순해서 오히려 우리 애가 그들을 괴롭히는 건 아닌지 걱정될 정도다. 분리불안으로 매일 슬퍼하는 건 오직 나다ㅠ 이제는 싱가포르에서 돌아왔을 때 과연 내 강아지가 나와 지내고 싶어할 지가 걱정이다.
이제 나만 잘 다녀오면 된다. 1년 뒤 무사히 돌아와야 하는데, 회사에서 안 돌려보내 줄까 봐 벌써부터 걱정이다. 남편과의 관계도 잘 유지하려면 1년 뒤 즈음에는 꼭 돌아와야 할텐데 말이다. 나를 돌려보내줄 수 있도록 한국으로 돌아와서도 여전히 가치 있는 인재일거라는 인상을 꾸준히 줘야겠다. 그러면서도 타지에서의 시간을 마지막 자유처럼 온전히 누리고 싶다. 꾸준히 운동하고, 여행도 많이 다니고.
내년의 목표는 커뮤니케이션(영어), 사람들과의 관계, 그리고 러닝과 요가다. 러닝과 요가를 일상의 우선순위로 두고 나를 단단하게 다듬는 시기로 만들고 싶다. 조금은 템포를 낮추고 나에게 집중하는 한 해를 만들 수 있기를 바란다. 일적으로는 AI, LLM PM으로 완전 전향하는 것을 목표로 해보겠다. 코어가 단단해지는 한 해가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