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의 어느 날, 면담 중 싱가포르로 옮길 마음이 있냐는 질문을 받았다. 당황해서 얼굴이 상기되었던 것 같다. 일단 남편과 상의해 본다는 말로 미팅을 마쳤지만, 그 질문을 받았을 때 나는 이미 마음을 정했던 것 같다. 미팅이 끝나고도 한참 동안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직 면접을 잘 봤을 때나, 중요한 부동산 계약을 막 했을 때처럼.
싱가포르로 이동하는 것은 나에게는 아득히 먼 꿈같은 일이었다. 대학생 시절, 사회초년생 시절 브런치로 싱가포르에서 일하는 일상을 담은 글들을 내리읽던 기억이 남아있다. 해외취업을 할 엄두가 나지는 않았지만 자유롭고 프로페셔널해 보이는 그들이 부러웠다. 몇 년 전에도 맥킨지의 싱가포르 지사에서 일하고 돌아온 사람과 짧게나마 같이 일한 적이 있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바를 명확하게 정리해서 전달하고 이루어낼 줄 아는 똑똑이 었다. 그래서 싱가포르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내가 동경하던 사람들이었다.
싱가포르에 다녀오면 평생 나의 콤플렉스였던 애매하기만 한 영어실력도 자연스러운 발화로 굳혀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커리어 측면에서도 수평 이동하는 이직과 달리 싱가포르에서 일하고 오는 것은 수직 이동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다. 결혼을 안 했으면 당장 YES였다.
하지만 이제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남편과는 아직 결혼한 지 1년이 안 된 차였다. 사실 질문을 받았을 때 '왜 하필 지금'일까,라는 생각을 했다. 그렇지만 곱씹어보면 지금이 가장 좋은 기회의 시기이기도 했다. 내가 조금 더 젊었을 때 이런 기회가 왔다면 가장 좋았겠지만, 그래도 아주 능력이 없을 때도 아니고 아기가 있어서 발이 묶이기도 전인 지금도 충분히 좋은 시기였다.
남편과 오랜 시간 얘기를 나눴다. 그는 해외에서 살아 볼 마음이 전혀 없는 사람이었다. 나는 이게 얼마나 좋은 기회인지, 내가 얼마나 동경하던 일인지를 설명했다. 그는 며칠간 싱가포르 얘기를 꺼내지 않았고 나도 더는 꺼내지 않았다. 그가 얼마나 슬퍼했을지 알고 나와 떨어져 사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도 알았다. 그는 나와 함께 사는 것을 진심으로 좋아했고 나와 함께해서 너무 행복하다고 자주 말하곤 했었다. 그렇지만 그도 내가 얼마나 가고 싶어 하는지도 잘 알았다. 그와 긴 이야기 끝에 나 혼자 일 년만 있다가 돌아오는 방향으로 결론을 냈다. 이민으로 가서 아예 정착해서 살 수도 있는 평생 한 번 올까 말까 한 기회를 1년으로 제한하는 것이 내심 참 아쉬웠다. 하지만 동시에 내 마음을 이해해 준 그에게 고마웠다.
며칠 후 VP와 미팅을 했다. 매니저가 미리 귀띔해줬다. 나에게 투자하는 것이 얼마나 비싼지, ROI를 어떻게 낼 건지 물을 거라고. 마음을 바짝 먹고 들어갔다. 그런데 예상과 달랐다. 그는 싱가포르에 가는 것의 단점과 고려할 점을 차근차근 나열했다. 나의 상황에서 정말 후회 없을지 다시 한번 생각해보라는 것이었다. 나는 남편과의 관계 때문에 일 년 정도만 일하고 싶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그는 방법을 찾아보겠다며, 일 년 뒤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의 플랜까지 미리 그려주었다. 돌아와서는 그가 가진 다른 팀에서 AI 기반 기능을 추가하는 일을 하면 될 것 같다고. 좋은 리소스를 떠나보내는 것보다는 다른 팀이라도 같이 일할 수 있는 게 훨씬 낫다고 말해주었다. 그의 배려가 진심으로 고마웠다.
그와의 미팅 후 본격적인 절차가 시작되었다. 장장 3개월이 걸렸다. 12월 말에 EP비자가 나오고, 연봉계약서를 마무리하고, 비행기표를 끊었다. 이제 2주 후면 떠난다. 아직은 실감이 나지 않는다. 결정하고 나서 너무 바쁘게 지나갔다. 짐도 아직 하나 싸지 못했다. 그런데도 벌써부터 1년이 얼마나 짧을지가 눈에 보인다. 반은 적응하느라 정신없이 보낼 것이고, 나머지 반은 떠날 준비를 하며 하나하나 정리하는 마음으로 살 것이다.
가서 하고 싶은 것이 참 많다. 다시 오기 어려울 기회이기에 마지막 자유인 것처럼 하고 싶은 것을 다 하고 싶다. 평일 저녁 이스트코스트 파크를 달리고, 주말엔 발리로 훌쩍 떠나는 그런 자유로운 일상을 꿈꾼다. 4년 간의 재택 끝에 다시 오피스로 출근하게 되는데, 동료들과 책상을 맞대고 일하면서 그동안 부족했던 관계를 보충할 것이다. 영어 발화도 기대하는 부분이다. 리더십에게도 내가 원하는 바를 명확하게 전달하고 얻어낼 수 있을 만큼 애매했던 영어 실력에 자신감을 붙이고 싶다. 흘러갈 1년이 벌써 아쉽지만, 그만큼 더 집중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 삶의 랜드마크가 될 일 년을 보내고 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