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이곳에 온 지 열흘째다.
지난주 수요일, 남편과 함께 싱가포르에 왔다. 나는 그와 함께 여행하는 시간을 만들고 싶었지만 그는 달랐다. 나의 생활환경부터 정리하고 싶어 했다.
도착한 첫날 그는 싱가포르에 사는 그의 친구들과 점심 자리를 마련해서 혹시 무슨 일이 있으면 도와달라고 미리 부탁했다. 2달 동안 지낼 호텔 룸을 바꾸었다. 방에서 애매한 냄새가 났기 때문이다. 가능한 방이 생길 때까지 며칠간 짐을 제대로 풀 수 없었지만, 그는 자기가 떠나기 전에 옮길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했다.
그와 함께 마트를 가서 물가를 보고 필요한 것들을 샀다. 그리고 그와 함께 회사까지 걸어가 보았다. 가장 빠르고 안전한 길이 어디인지 함께 확인하고 회사 주변 식당을 살폈다. 큰 몰 건물에 위치한 덕에 주변에는 한식집을 비롯한 음식점이 많았다. 특히 같은 층에 있는 일본 마트 푸드코트를 보고 그는 안심했다. 이제 내가 주변에 대해서 말하면 다 알고 이해할 수 있을 거라며, 그는 내 주변 반경을 파악하고는 기뻐했다.
출발하는 날, 그는 공항에서 김치를 샀다. 500g에 15,000원. 비싸다고 만류했지만 "이거라도 사줘야 마음이 놓이겠다"며 샀다. 해외에서 한식을 먹는 것을 촌스럽게 여기던 과거와 달리 나는 이제 여행을 다녀오면 청국장을 찾았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그는 내 입맛을 잘 알았다. 내심 고마웠다.
결혼한 지 1년 간 가장 감사한 사실은 그는 보살필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독립적으로 살았던 나에게 그의 방식은 낯설면서도 좋은 보살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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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의 4일 중 가장 좋은 기억이라면 일요일 아침 그와 함께 마리나 베이를 뛰었던 것이다.
집에서 마리나 베이까지 가는 길, 회사로 가는 안전한 숏컷을 발견했고 그는 나보다 더 기뻐했다. 함께 뛰다가 자판기를 발견했다. 포카리를 먹으려고 넣은 3달러를 자판기가 먹어버렸지만, 남편이 뽑은 달달한 착즙 오렌지주스에 기분이 금방 좋아졌다. 단돈 2달러에 신선한 오렌지 네 개를 착즙해서 내려주는 마법같은 자판기다. 싱가포르 어디에나 있었고, 과일 귀신인 남편은 자판기를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신선한 오렌지주스를 마셨다. 날이 조금 더 더워질 때쯤 러닝을 마치고는 퐁신퐁신한 카야토스트를 파는 가게로 갔다. 주말 아침 9시의 브런치집은 박작박작하다. 오랜 시간 줄을 선 끝에 들은 말은 "Cash only".
카드밖에 없었던 우리는 조용히 돌아서서 씻고는 칠리크랩을 먹으러 갔다. 야외 테이블에서 비닐장갑을 끼고 크랩을 까고 맥주를 캬아 하고 먹었다. 햇살 아래 행복한 일요일 오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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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혼자서 일하기 시작한 지 일주일이 지났다. 모든 게 이렇게 적응할 게 없을까 싶을 정도로 순조로웠다. 에이전시 덕에 비자를 받는 번거로운 과정도 없었고 특별히 시간을 써서 준비해야 하는 것도 없었다.
수요일 밤에 도착해서 공항에서 인터뷰를 할 줄 알고 비자서류와 졸업증명서 등을 프린트해서 준비해 갔다. 두리번대며 공항 직원에게 EP 발급자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물어봤지만 무성의한 손가락으로 게이트를 가르킬 뿐이었다. 비자가 없는 사람과 동일하게 게이트를 그냥 패스했다. 목요일에 바로 심카드를 만들었고 월요일에 MoM에 가서 EP카드를 활성화했다. 생각보다 간단했다. 더 이상 할 게 없었다.
집을 알아볼 때까지 회사에서는 최대 2달 동안의 레지던스 호텔 숙박을 지원해 준다. 방과 거실, 부엌이 분리된 1베드룸이고 회사와 마리나 베이까지도 15분 내외의 가까운 거리다. 집을 구하기 위해서는 에이전시를 따로 구하거나 스스로 앱을 통해서 찾아야만 했는데, 다행히 회사와 잘 얘기해서 회사에서 에이전시 비용도 지원해 주기로 했다.
원래 함께 일하던 사람들과 실제로 얼굴을 맞대고 일할 수 있어서 훨씬 더 좋았다. 각자 바쁘지만 그래도 한두 번 점심을 함께 먹을 수 있는 시간이 생겼다. 싱가포르 오피스가 새로 생기면서 이제 나를 포함해서 총 다섯 명의 멤버가 싱가포르에서 일을 한다. 가장 오래된 사람도 6개월 정도밖에 안 됐다. 네 명은 최근에 새로 조인했는데, 두 명은 싱가포르인, 두 명은 미국인이었다.
그중 지난달 조인한 프로그램 매니저 버나드와 가까이 일한다. 그에게 배울 게 참 많다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오피스에서 가까이 일하니 터놓고 얘기하고 편하게 지낼 수 있어서 좋았다. 4년간의 재택과 떠돌이 팀 생활 후 오랜만에 "같은 팀"이라는 소속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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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 나의 즐거움은 두 가지다. 격일마다 하는 마리나 베이 러닝과 아침마다 먹는 조식. 마리나 베이 러닝은 호텔에 지내는 동안 잠시 누리는 특권이다. 나중에 내 집을 구하게 되면 이 주변은 비싸서 살 수가 없다. 완벽한 싱가포르에서 아쉬운 점이 있다면 미친 집값. 원베드룸 기준으로 중심지는 월세 550만 원 정도, 조금 외곽으로 가면 월세 330만 원 정도다. 최대 2개월 동안만 이 중심지의 인프라를 누릴 수 있다.
중심지의 가장 좋은 점이라면 바로 마리나 베이다. 바닷바람이 불어오는 이곳은 러닝하기에 최적이다. 조금만 더 뛰다 보면 해운대 동백섬 같은 가든스 바이 더 베이 주변이 나온다. 아침에 뛰면 탁 트인 멋진 잔디와 바다가 보이고, 밤에 보면 황홀한 야경이 펼쳐진다.
이곳에서는 열심히 뛰지 않는다. 멋진 야경이 보이면 페이스를 낮추고 감상하고, 바닷바람이 불면 잠시 멈춘다. 이 멋진 풍경에서 뛸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하다. 이곳에 내가 있다는 것도 감사하다. 그 어떤 제약도 없이 주말의 시간을 온전히 쓴다는 것이 소중했다.
한 시간이 채 안 되는 시간이지만 그 시간을 기다린다. 격일에 한 번씩 뛰고 있지만 가능하면 더 자주 뛰고 싶다. 최소한 주말만이라도 이틀 내내 뛰어야지. 곧 이사 가면 갖지 못할 경험이니 있는 동안 열심히 즐길 테다.벌써 한 주가 지났고 이제 이곳에서는 아마 대략 여섯 번의 주말이 남았을 것이다. 주말 아침 마리나 베이 러닝의 여유로움을 놓치지 말아야지.
두 번째 즐거움은 조식이다. 호텔 조식이 참 맛있다. 처음 봤을 때는 셀렉션이 그리 많지 않아 내심 실망했었는데, 매일 먹다 보니 이만한 조식이 없다. 메인 메뉴와 과일이 매일 바뀌고 신선한 야채와 요거트가 항상 구비되어 있다. 고소한 치즈와 샐러드, 신선한 과일과 요거트를 먹고 메인도 조금씩 떠서 맛을 본다. 아침을 먹으니 살이 찌고 있지만 포기할 수 없는 즐거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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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에서 만난 모든 사람들이 친절하고 여유로워 보였다. 길을 물어보든, 음식을 주문하든, 사람들은 도와주려 했고 "sorry"와 "thank you"를 자연스럽게 내뱉었다. 직원들도 오며 가며 내가 어떻게 지내는지 신경 써 주었다.
모든 게 마음가짐이라는 생각을 했다. 서울에서는 참 팍팍했는데 싱가포르에서는 나도 여유로워진다. 따뜻한 나라에 지내는 것이 이렇게 사람들의 마음도 따뜻하게 만들어주는구나 싶었다. 스스럼없이 도와주려 하는 마음이 이런 거구나 싶었다.
처음에는 점심시간을 한 시간 다 써서 밥을 먹는 것이 아까웠다. 월요일에 사람들을 따라갔다가 이동과 대기에 많은 시간을 쓴 후, 화요일에는 삶은 계란 두 개와 컵라면으로 회사에서 때우고는 일을 했다. 그리고는 야근할 일이 생겨서 밤에도 컵라면으로 저녁을 먹었다.
저녁 내내 속이 좋지 않았고 그날 밤 후회했다. 그 30분을 더 써서 건강하지 않은 음식을 먹는다고 내가 그만큼 빨리 갈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퀄리티 있는 점심시간을 가진 후 힘을 내서 저녁시간에 더 집중하는 것이 현명한 방식이었다.
무엇보다 점심시간 동안 사람들과 맺는 관계가 내 삶을 더 활기차게 한다는 것을 느꼈다. 너무 오랜 기간 동안 혼자 점심을 먹은 후라 익숙하지 않았지만, 그런 시간이 나에게 필요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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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미국에서 온 친구들과의 점심은 나에게 아직 쉽지 않았다. 영어 측면에서 싱가포르 사람들과의 소통은 너무나 편하고 대화가 잘 연결되는데 미국 사람들과의 대화는 여전히 어려웠다. 어쩌면 그들이 빠르고 편하게 영어로 말하는 동안 내 속의 영어 자격지심이 올라오는지도 몰랐다. 그들의 대화는 여전히 끼어들기 힘들었다. 그래서 왠지 보이지 않는 벽이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이 영어로 빠르게 농담을 섞어 얘기하고 예의를 갖춰 나에게 질문을 하면 나도 내 얘기를 하는 편이었다. 티키타카라는 게 쉽지 않았다. 더 편해지기 위해서는 더 많이 영어를 쓰는 일이 필요했다.
업무적으로도 새로운 팀을 맡으면서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위에서 나에게 바라는 것이 명확했고, 나는 이제 프로그램 매니징과 프로덕트 매니징을 동시에 해갈 필요가 있었다. 버나드와 같은 줄에 앉은 것이 다행이었다. 그에게 궁금한 것을 언제든지 물어볼 수 있다.
이제 내일이면 싱가포르에서 보내는 두 번째 월요일이다. 새로이 맡은 팀을 조금 더 명확하게 꾸려나갈 필요가 있었다. 정말 다행인 건 나를 도와줄 사람이 언제든지 있다는 것이다. 나를 이 팀과 함께 내버려두는 것이 아니라, 내가 도움을 청하면 언제든지 도와줄 사람들이 있었다. 내 시간을 조금 더 써서 노력하면 된다. 업무적으로든 관계적으로든 성장할 기회가 생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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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한국을 떠나기 전 이야기가 생각났다. 올 초, 승진이 막혔을 때 친구가 추천해 준 챗GPT 사주를 본 적이 있다. "화" 기운이 없는 나에게 싱가포르는 최적의 장소이며, 붉은 말의 해인 올해 또한 시기적으로 화 기운이 넘친다고 했다. 소통에 능하지 않은 내가 소통을 하고 인정을 받기 시작하며 소통도 원활하게 할 수 있는 한 해가 될 수 있다고 했다.
단순히 사기가 꺾인 나를 위로해 주는 말일 수도 있지만, 왠지 그 사주가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혹은 예언적인 의미는 없더라도 내가 그렇게 만들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곳에서는 밝은 에너지가 막 뿜어져 나온다. 이전 나의 장점이었고 어느새 사라졌던 나의 장점이 여기서 다시 보이는 것 같다. 꾸준히 운동하고 얘기하고 웃어야지.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 충분히 누려야지. 나에게 주어진 1년, 그중에서도 설거지도, 요리도,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호텔에서의 2개월. 소중함을 잊지 않고 충분히 누려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