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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다리 Dec 31. 2019

한 겨울 산속에서 살아남기, 능경봉 백패킹



동계 백패킹!

백패킹을 시작한 지 제법 긴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머릿속에서만 존재하는 단어.

돈이 없어 장비를 미리 장만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선뜻 실행에 옮기기엔 뭔가 알 수 없는 두려움이 느껴져서가 아닐까.


머릿속에서 그 단어를 끄집어내어 몸소 체험을 하려고 하니 생각보다 복잡할 것이 없다.

경험해 보지 못해서 생기는 이런저런 상상과 추측으로 복잡하던 머릿속이 한결 명료해졌다.


이왕 체험을 하는 바엔 제대로 보자는 생각에 강원도로 향했다.

사시사철 바람이 시원스레 불어오는 곳.

겨울이 되면 우리나라 최설 지역 중 하나인 곳.

대관령이 이번 산행의 목적지다.







완만한 대관령 고원 능선을 타고 불어오는 겨울바람에 대관령 휴게소 풍력발전기는 힘차게 돌아간다.

풍력발전기를 등지고 길지 않은 우리의 산행은 시작된다.









겨울 산의 모습은 단조롭고 황량하기만 하다.

쌓인 눈에 낙엽도 보이지 않는 겨울나무는 죽은 듯 더 메마르고 앙상해 보인다.

키 작은 조릿대 잎만이 이 산속에 흔치 않은 초록빛 존재감을 보인다.


동지를 갓 지난 산속 늦은 오후에 인기척은 보이지 않는다.

사람의 흔적이라곤 하얀 눈 위 발자국.








완만하게 시작하던 등로는 점점 경사가 급해지고,

추운 산속에서 살아 남기 위해 챙긴 장비로 가득 찬 배낭 무게에 걸음을 멈추고 쉬어가는 일이 잦아진다.

쉬기 적당한 포인트에 먼저 다녀간 누군가가 위에 새겨 놓은 "능경봉"

새하얀 화선지에 붓으로 써 놓은 듯 멋지다.

우리가 목적지에 제대로 가고 있음을 알려주는 표시이기도 해서 더 맘에 든다.






아무래도 정상에 도착하기 전 어두워질 듯하다.

다행히 하얀 눈 위 발자국은 여전히 또렷한 편이다.

헤드랜턴을 꺼내지 않고 쉬다 가다를 반복하며 올라가니 동쪽으로 강릉 시내가 눈에 들어오고

잠시 후 헬기장을 지나 정상에 도착할 수 있었다.







거위와 오리에게는 정말 고맙고 미안하다.

한겨울에 우모로 된 옷과 침낭이 없다면 백패킹은 쉽게 도전하기 어려울 듯싶다.

우모복과 다운부티로 무장하고 텐트 안에서 따뜻한 음식을 먹으니 제법 견딜만하다.







능경봉의 조망은 뛰어나진 않지만 괜찮은 편이다.

평창 쪽 전망은 나무에 가려 볼 수가 없지만, 반대편 나뭇가지 너머로 강릉 야경이 눈요기가 되어 준다.

야경과 별 사진을 찍으러 텐트 밖으로 나왔다 몇 장 찍지 못하고 텐트 속으로 다시 들어갔다.

손가락, 발가락이 얼어붙을 것 같이 추워서 밖에서 오래 버틸 수가 없다.









우모복을 그대로 입고 침낭 안에 들어가 번데기처럼 누웠다.

핫팩을 두 개를 터뜨렸는데도 침낭 안은 따스한 기운이 별로 없다.

언제쯤 따뜻해지려나 생각하다 잠이 들었나 보다. 살짝 더운 느낌이 있어 잠에서 깼다.

밤새도록 텐트를 때리는 바람 소리가 제법 시끄러웠지만, 1300g 구스 침낭 덕분에 얼어 죽지 않고 잘 잤다.



일출을 구경하러 온 또 다른 백패커 발자국 소리에 잠에서 깼다.

침낭 안은 천국, 밖은 그냥 지옥같이 춥다.

침낭 안에서 천년만년 있고 싶을 정도로 나가기 싫었지만

일출 구경을 하고 하산을 할 생각에 번데기 모드를 해제하고 텐트 밖을 나왔다.







강릉 시내는 아직 잠들어 있고,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해가 떠오려나 보다.

매서운 추위에도 일출은 늘 그렇듯이 순수하고 장엄하다.

내 마음속에 떠오르는 태양같이 희망찬 기운이 불끈 솟아오르는 기분이다.













해가 어느 정도 떠오르자 깜깜하기만 했던 능경봉 정상도 제 모습을 되찾았다.

밤새 춥긴 추웠나 보다.

서리가 내려앉은 텐트도 바짝 움츠린 듯 긴장감이 서려있고,

텐트 안에 있던 물병의 물은 꽝꽝 얼어붙었다.










기상청에 따르면 해발 750 미터에 위치한 대관령면이 오늘 아침 영하 10.6도란다.

이 곳 능경봉이 1,120 미터 정도이니 영하 13도까지 떨어진 것으로 보인다.

혹한의 추위 속에서 하룻밤을 잘 버텼다.

앞으로 동계 백패킹을 자신감 있게 추진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 P. S.]


최근에 구매한 저렴이 수동 렌즈를 들고 이번 산행을 나섰는데 잘못된 판단인 듯하다.

초첨을 일일이 맞춰야 하는 수동 렌즈의 특성상 시간이 더 걸릴 수밖에 없고, 추운 겨울에는 동상 걸리기 딱이다.


그리고 이번에도 먼지가 사진에 잡혔다. 미러리스의 특성상 센서에 먼지가 잘 들어간다.

청소를 자주 하고 수시로 점검하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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