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밥,밥,밥.

by 박꿀꿀

우리 할머니 유진숙 여사는 손이 크다.

올해 초, 정월대보름날 다섯가지 나물을 꼭 먹어야한다며 걸려온 할머니의 전화에 혼자 할머니댁까지 털레털레 걸어간 적이 있다. 이젠 할머니댁 가까이 사는 손주는 나뿐인데다 발리에서 맹장수술을 마치고 온지 얼마 안된 나는 할머니에게 걷어먹여야 할 불쌍한 존재인듯 했다. 할머니가 사는 아파트에 갔더니 나물을 말그대로 한솥씩 종류별로 5솥을 해놓으셨다.

“할머니..이걸 다 누가 먹어요?”

“잉? 너갈때 이만큼 싸갖고가고, 노인정에도 가져가고 그럼 금방 먹는겨.”

할머니는 내가 식탁에 앉자 내 앞에 앉으시더니 대박강의를 시작하셨다.

다시는 못사는나라 여행은 가지 말어!(발리는 휴양진데요 할머니..) 니네 엄마가 너를 그렇게 열심히 키웠는데 죽을 고비를 넘기고 얼매나 걱정했는지 알어! (맹장수술은 죽을 고비까진 아닌데요..) 얼른 다시 공부해서 취업하고 신랑감 찾아 30살이 되기 전 빨리 결혼혀 (둘다 노력은 하는데요 그게 말처럼 쉽지 않아요 할머니)


할머니의 대박강의에 마디마디마다 반박하고싶은 마음을 꾹 참으며 밥과 고추장에 나물을 넣어 싹싹 비벼먹었다. 체할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마늘과 액젓과 참기름과 할머니의 손맛이 듬뿍 들어간 나물은 정말이지 기가막히게 맛있었다. 내가 밥을 먹는 동안 대박강의를 원없이 하신 할머니는 나물을 거의 몸통만한 큰 통에 담으셨다. 그러더니 나물통을 옆구리에 안으시더니 할머니는 노인정에 갈테니 알아서 먹고 집에 가라고 하셨다. 역시 우리 할머니는 쿨해.

나는 비빔밥도 잔소리도 배터지게 먹고는 할머니의 두번째 동화를 펼쳤다.

옛날에 어느 마을에 부잣집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집 주인이 얼마나 지독한지 그 집 머슴을 일못한다고 밥도 잘 안주었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어느 스님이 지나가다 하도 부자라고 해서 밥좀 얻어먹으려고 그 집을 가서 주인보고
'지나가다 배가고파서 왔습니다, 밥 좀 조금만 주십시오.'했더니,
주인이 '그래요'대답했다.
그러더니 '먹새야, 외양간에 가서 소똥 한삽만 떠다 저 바랑에다 다 부어주어라'했답니다.

그러니 어쩔수없이 먹새가 소똥을 부들부들 떨며 그 바랑에다 부어줍니다.
그리하여 그 스님은 하는 수 없이 고맙습니다 하고 지고 가다 개울물에 다 버리고 다시 메고 오다 너무도 눈물이 났답니다.

어느덧 3년이 지나 스님이 그 마을을 찾아갔더니 그 부자가 망해서 그 집주인은 그지가 되어서 나갔고, 그 집 먹새는 눈이 멀어서
그 스님이 개울 다리를 건너는 다리 밑에서 '사람살려'달라고 소리치고 있었답니다.

스님이 건지고 보니 4년 전 소똥 퍼주었던 먹새였습니다. 그 스님은 하도 기가막혀 먹새를 데리고 절로 와서 잘 살았답니다.

어려서 들은 옛날 이야기였습니다.
-유진숙 씀-

할머니가 절에 가서 보셨다던 우물 그림.

할머니의 동화 먹새이야기에는 너무나 지독해서 머슴에게도 스님에게도 밥을 안주는 부자가 나온다. 심지어 스님에게는 소똥까지 퍼준다. 그렇게 스님에게 눈물나게 한 부자는 3년 후 이유도 모르고 '그지'가 되었다. 보통 불쌍한 먹새는 잘되어야 할텐데 먹새까지 개울물 다리 밑에서 죽어가는 신세가 된다. 감히 스님을 눈물흘리게 한 죄로 할머니가 내린 벌일지어다. 그러나 자비로운 스님은 먹새를 구해 잘 살았다는 해피 엔딩으로 끝난다. 먹새는 소똥을 퍼주며 손을 부들부들 떨만큼 마음만은 착해서 봐주신걸까? 이 동화의 교훈은 그러하다. 부자가 된다면 인색하지 말라는 것. 특히나 남에게 밥만큼은 잘주어야 하는 것 같다.


할머니는 32세에 이미 아이가 다섯, 남편에 시부모님까지 모시고 살았다. 아이 다섯과 성인 세명이 먹을 음식을 매일매일 하루3끼를 한다는 건 어떤 삶인걸까. 게다가 작은 시골동네에서 노점상으로 시작한 장사는 규모가 커져 제일 큰 슈퍼가 되었으니, 주인이었던 할머니는 직원들 여럿의 밥까지 챙겨야했다고. 게다가 이따금씩 먼 친척이 할머니가 잘산다는 소문을 듣고 종종 찾아와 밥을 달라고 했단다. 밥, 밥, 밥. 할머니에게 밥이란 무엇일까. 나는 귀찮아서 하루에 한끼도 내 손으로 잘 못차려먹는 밥. 평생을 지겹게 한 것이 남에게 밥을 먹인 것일텐데도 만86세의 할머니는 여전히 정월대보름날 다섯가지 나물이 든 밥을 손주에게도 먹이고 노인정의 노인들에게도 먹여야 직성이 풀리시는 것 같다.


할머니가 남긴 나물을 통에 퍼담으며 생각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할머니는 손이 너무 크셔. 노인정에 가시던 할머니처럼 나물통을 옆구리에 끼고 집에 다시 털레털레 걸어왔다. 볼일을 보고 집에 돌아온 엄마는 할머니가 나물을 왕창 싸주셨다는 내 이야기에 반갑게 할머니의 나물통을 꺼내들고 잔뜩 밥을 비빈다.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맴돈다.

할머니의 나물은 오늘 몇명의 배를 불리웠을까 ?

할머니의 동화. 할머니의 문체 날것 그대로의 재미가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할머니 꿈은 비행기 승무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