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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꿀꿀 May 17. 2024

서른 살의 백수 파리지앵 일기

프랑스 워킹홀리데이  #1

한국 나이 서른 살 생일을 앞두고 파리 샤를드골 공항에 도착했다. 우연인지 뭔지, 파리에 도착했을 때 나는 늘 백수였다. 처음엔 퇴사기념 여행으로 와서 뚜벅이로 프랑스를 돌아다녔고, 두 번째는 배낭여행자로 왔던 세계일주, 그리고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받고 온 지금까지.


왠지 파리지앵과 백수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지만, 백수 주제에(?) 파리에 사는 게 사치인 것도 같지만 지금의 나에게 파리는 낭만도 아니고 환상도 아닌 실전이 되었다.

여기에서 이제 어떻게 먹고살지?


어쩌다 이렇게 대책 없이 파리에 왔을까.

프랑스에 꼭 가봐야지 마음먹은 건 어릴 때 좋아했던 목수정작가님의 책 <뼛속까지 자유롭고 치마 속까지 정치적인>. 그 책을 읽고 이런 사람과 이런 세상이 있다니 숨통이 좀 트인다, 그런 생각을 했었다. 그래서 대학생 땐 불어수업을 신청해서 들었는데,  한국에선 보기 드문 폭탄머리를 하고 청바지를 입은 교수님이 프랑스 사람들의 감탄사를 소개해줬던 게 기억이 난다. 프랑스사람들은 놀라거나 신기할 때 '울랄라'라고 말한다고. 그때부터 나는 프랑스에 너무너무 가보고 싶었다. 청바지 입은 폭탄머리 교수님한테서 자유의 향기가 났다.


그래서인지 3년 반의 직장생활을 마무리하고  바로 향한 건 파리였다. 퇴사여행으로도 모자라서 다음 해에 세계여행하면서 또 왔을 땐 몽마르트 언덕을 내려오면서 그렇게 소원을 빌었다.

- 제발 인생에서 한 번쯤은 파리에 살아보게 해 주세요. 제발, 무슨 이유로든.  

그러고 나서 나는 진짜 다시 파리에 왔다. 무슨 이유든 만들어서 그냥 그렇게 왔다. 대책은 없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대책 없이 파리에 살아볼 기회는 지금밖에 없는 것 같았다.


샤를 드골 공항에 도착해 은은한 찌린내가 올라오는 지하철을 타고 파리 인근의 친구 집으로 향했다. 비구름  잔뜩 낀 날씨에, 빨간불인데도 단체로 주머니에 손 꽂고 무단횡단하는 사람들을 보니 파리에 온 게 실감이 났다. 그렇지 그렇지, 이게 파리였지.


도대체 물가 높은 파리에서 백수로 어떻게 지낼 계획이냐면 일단 당분간은 파리 외곽에 사는 친구 L의 집에 얹혀 지내기로 했다. 친구는 어차피 자긴 집을 자주 비우니 걱정 말라며 안 그래도 집이 오래 빌 땐 불안했다고 했고. 가끔 장도 봐주고 청소도 해주며 얹혀 지내기로 했다. 통장엔 아주아주 아껴 쓰면 6개월에서 1년 정도 버틸 생활비가 남아있다.


불어로 자기소개만 겨우 할 줄 아는 불어베이비인 내가 여기에서 일을 할 수 있을지, 앞으로 한 달을 있을지, 6개월을 있을지, 1년을 꽉 채울지 나도 모르겠다. 파리에 너무 오고 싶다고 일단 오긴 했지만, 한국에 있는 친구들은 승진도 하고 결혼도 하는 서른이라는 나이에 나는 유학도 비즈니스도 아닌 워킹홀리데이로 파리라니. 꼭 고속도로 한복판에서 혼자 대책 없이 서있는 외롭고 작은 마티즈가 된 기분이다. (실제의 내 몸집은 그렇게 작지 않지만)


어쨌거나 너무 먼 미래를 생각하니 막막해서 당장 내가 세울 수 있는 내일 아침의 계획을 세워봤다.

1. 가장 가까운 빵집에 간다.

2. 갓 구운 바게트를 산다.

3. 프레지덩 버터를 부자처럼 밥숟갈로 떠서 팍팍 발라 먹는다.


그다음 일은 그다음에 생각해 보기로 한다.


*별첨: 프랑스식으로 바게트에 버터 발라먹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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