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의 호불호가 갈리는 이유
벌써 파리에 온 지 4일째. 칩거한 지도 4일.
어떻게 된 게 도착하고 나서부터 내내 비가 와서 우울하게 방에서 쭈그려 앉아있었다. 파리에 오면 햇빛 받으면서 야외 테라스나 잔디밭에서 뒹굴며 크로와상 먹겠다던 내 파리로망은 하루 온종일 추적추적 내리는 비와 함께 다 깨져버렸다. 비구름 잔뜩 낀 하늘 보면서 한국의 5월은 한창 날씨 좋을 때인데 난 왜 파리에 있는가를 생각했다. 심지어 내가 있는 숙소는 여느 건물과 그렇듯 오래된 건물이라 보일러도 안되고 작은 히터를 하루종일 틀어놓아도 으슬으슬 춥다.
그러던 차에 아침부터 해가 떴다. 빠르게 옷을 주워 입고 나간 나는 지하철을 타고 사람들의 낯선 체취를 맡아가며 파리 샤틀레역 앞의 유명하다는 카페에 도착했다. 바리스타 대회에서 우승한 바리스타가 있다는 곳. 여러 가지 카페 관련 굿즈들을 팔고 관광객들이 줄을 길게 늘어선 걸 보니 확실히 핫한 카페임에 틀림없다. 빠르게 아이스라테를 시켜 후루룩 마시고 길을 떠났다. 솔직히.. 얼음이 다 녹아 묽어진 우유와.. 맹맹한 샷이 추가된 라테는 맹숭맹숭하니 별로 맛이 없었다. 눅진하니 고소한 아이스라테는 한국 카페들이 최고라고 또 생각했다. 자꾸만 한국이 그립다.
파리올림픽이라고 꾸며놓은 파리 시청을 지났다. 파리 시청과 올림픽 장식(?)은 누가 저렇게 디자인했는지 몰라도 너무 멋졌다. 길가의 건물들도 디자인 하나하나가 예쁘다. 이름 모를 작은 갤러리들, 개인 향수 브랜드와 공원들을 지나며 간판부터 건물, 예술품과 공원의 이름 모를 조각까지도 어쩜 저렇게 모든 디자인이 예술적인가에 대해 생각한다. 빈티지샵의 마네킹에 걸어놓은 옷도 너무 예뻐서 들어갔다가 200유로가 넘는 가격을 보고 놀라 다시 나온다. 한창 구경하다가 입장료 무료인 시립미술관인 쁘티팔레에 갔더니 이미 닫았다고 경비원아저씨가 손을 휘휘 젓고 돌아가란다.
그래도 마냥 좋다. 파리는 진짜, 정말, 너무할 만큼 아름답다.
파리뽕에 취해서 길을 걷는데 부슬부슬 또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또 비야. 조금 있다가는 바람까지 분다. 우산도 안 가져왔는데..
파리뽕이 바로 빠진다. 지겹다 지겨워 파리날씨. 정이 들려고 하면 다시 정을 털어버리는 그런 날씨.
집에 돌아와 젖은 머리를 말리면서 생각한다. 파리는 진짜 예쁘고 황홀한데.. 그렇긴 한데... 그러면서도 진짜 정 떨어지는 면이 있다고.
문득 만약 파리가 사람이라면 어떨까 하고 생각해 본다.
일단 그는 쌀쌀맞고 차가울 것이다. 잘 웃지도 않고, 커피는 뜨거운 에스프레소만 마시며, 담배를 아무 데서나 뻑뻑 펴대는 골초에 와인도 엄청 좋아해서 자주 술에 취해 있고, 따지기 좋아하며, 추워도 옷도 안 벗어주고, 말이 엄청 많고, 미식가라서 만나면 돈을 많이 써야 한다.
근데.... 이 모든 치명적인 단점을 극복할 장점 하나.
옷을 진짜 기가 막히게 잘 입는 그는 얼굴도 치명적이게 아름답다. 그야말로 보고만 있어도 황홀할 만큼 아름다운 그런 사람.
그런 사람이 실존하면 아마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릴 거다. 친구로도 애인으로도.
파리에 딱 한번 가봤는데 평생 다신 안 가겠다며 파리는 최악의 도시였다는 사람과, 열 번을 가도 갈 때마다 황홀하다며 너무 좋다는 후기가 극명하게 갈리는 파리처럼 말이다.
하루에 몇 번씩 싫어졌다가 좋아졌다가 하게 만드는 파리.
나는 여기에서 얼마나 더 있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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