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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취업 후기

하고 싶은 게 뭐냐고 묻는다면

by 몽땅별

어찌저찌 취업을 했다. 기쁘다기보다는, 인생의 산 하나를 넘긴 기분이다. 물론 언젠가 이직이 필요할 지 몰라 다시 새로운 준비를 할 테지만. 인생을 살면서 앞으로도 넘어야 할 산은 많겠지. 내집마련, 결혼, 노후대비 등... 그래도 바쁘게 사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쉴 틈 없이 사는 인생이 덜 불안하다.


취업하자마자 월급통장을 알아보고, 얼마를 저축하고 투자할지 고민하며 예산 포트폴리오도 만들었다. 이러한 준비를 하나씩 해나갈 때마다 느껴지는 소소한 행복감이 꽤 좋다. 이런 생활이 직장인의 삶이라는 거겠지.


취업을 준비하면서, 아니 준비하기도 전부터 늘상 들었던 질문이 있다.


"하고 싶은 게 뭐야?"


솔직히, 하고 싶은 건 딱히 없다. 그저 평범하게 사는 것이 나의 목표다. 이런 나를 설명하는 데 딱 맞는 용어가 있다. ‘반응 민감도’. 주변의 반응에 얼마나 민감하게 반응하는지를 나타내는 성향이다. 민감도가 높은 사람은 사교적이고, 적이 없지만 쉽게 상처를 받는다. 반면 민감도가 낮은 사람은 덜 상처받지만 독선적으로 여겨진다.


나는 개인적으로 반응 민감도가 높은 편이다. 타인의 말에 쉽게 흔들리고, 세운 목표도 외부 변화에 따라 자주 무너진다. 하지만 요즘엔 나름 해결책을 마련했다. 예전엔 민감도가 낮은 사람들의 꼰대 같은 말에 흔들렸지만, 이제는 그런 독단적인 태도에 속으로 불쾌함을 느끼고 무시하는 전략을 택하고 있다. 자기 인생만이 정답인 줄 아는 사람들, 정말 싫다.


이 얘기를 꺼낸 이유는, 내 인생에 뚜렷한 목표가 없기 때문이다. 하고 싶은 게 뭔지 책도 수백 권 읽고, 다양한 경험도 해봤지만, 결국 '하고 싶은 것'은 찾지 못했다. 그러나 조급하진 않다. 예전엔 "하고 싶은 것이 뭐야?"라는 질문에 꼭 거창한 대답을 해야할 것 같은 압박감을 느꼈지만, 이제는 그 질문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걸 안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말했듯, 인간은 그냥 세상에 던져진 존재다. 던져지듯이 태어난 우리는 스스로 규칙을 만들고, 목표를 만들고, 원칙을 세우지만, 이 모든 건 언제든지 금방 무너질 수 있다. 아무리 꿈을 꾸어도 그 꿈이 10년, 20년 후까지 지속되긴 어렵고, 아무리 확신을 가져도, 타인의 냉소 앞에서 쉽게 주저앉는다. 게다가 인간의 욕망은 계속 변화하기에, 확고한 원칙이란 존재할 수도 없다.


고대 그리스 역사서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는 국왕 피로스와 그의 지휘관 키네아스의 일화가 나온다. 피로스가 "그리스를 정복하자"고 말하자, 키네아스는 "그 다음에는요?"라고 되묻는다. 피로스는 "아프리카를 손에 넣자"고 답했다. 계속해서 "아프리카 다음에는요?" "아시아로 건너가 아라비아를 침략하자." "그러면 그 다음에는요?" "인도까지 가자." "인도 다음에는요?" 반복적인 질문에 피로스는 "그냥 쉬자." 대답하며 대화를 끝낸다.


이 우화처럼 우리도 이 세상에서 계속 달려가며 살아오지만, 정작 왜 달리는지는 잘 모른다. 어릴 땐 왜 공부해야 하는지 모르면서 공부했고, 왜 살아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살아야만 했다. 그러다 대가리가 조금 크고 나면 "계속해봤자 무슨 소용이람?"이라고 반농조로 자문하며 달리는 사람들을 비웃기도 했다. 그러면서 무기력을 합리화하기도 했고.


또한 한때는 세상의 모순을 비판하고 이상주의를 외치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막상 내가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권력을 가진다면 아무것도 하지 못할 거란 걸 잘 알고 있다. 정말, 치기 어린 이상주의였다.


나아가 무감한 세상은 이러한 '나'의 이상주의를 무너트렸다. 연속되는 서류 탈락과 "27살인데 여태까지 뭐 하고 살아왔어요?"와 같은 꼰대 질문을 듣고도, 회사에 취업하고 싶어 "죄송하다"는 대꾸밖에 못했을 땐, 나는 그리 특별한 사람이 아닌 걸 다시 한 번 자각하게 되었다.


결국 이 거대한 우주 속에서 나는 그저 무수한 사람들 중 하나일 뿐이다. 노자가 말했듯, 천지는 인자하지 않았다. 슬프지만 이게 현실이었다. 나는 이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섞여 사는 존재일 뿐이었다.


그러나 이 잔혹한 우주 속에서 그나마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원동력은 무엇일까? 그 원동력이란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은, 그저 무지하고, 멍청한 사람들과 비교하거나 우열을 가리지 않고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는 관계에서 비롯되는 것 아닐까? 그래서 나는 다시 그 질문을 던진다.


"하고 싶은 게 뭐야?"


이 거창한 질문에 대한 멋드러진 대답은 이제 이렇게 바뀐다.


"사람들 사이에서, 의미를 만들며 살아가기."


경제학의 아버지 애덤스미스는 그의 저서 도덕감정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세상에서 힘들게 노력을 하고 부산을 떠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탐욕과 야망을 품고 부를 추구하고 권력과 명성을 얻으려는 목적은 무엇인가? 생활 필수품을 얻으려는 것인가? 그것이라면 노동자의 최저 임금으로도 얻을 수 있다. 그렇다면 인간 삶의 위대한 목적이라고 하는 이른바 삶의 조건의 개선에 얻는 것은 무엇인가?"


"부자가 부를 통해 얻는 것은 결국 세상의 주목이다. 우리가 삶을 향해 발버둥치는 이유는 누군가의 관심과 공감, 그리고 인정받고 싶은 욕망 때문이다."

나 역시 이제 돈을 벌고, 저축하고, 내 집을 마련하고, 결혼도 하며 인간들이 만들어 낸 인생의 과업들을 하나씩 해나갈 것이다. 세상을 미워하지 않고, 나 자신을 배신하지 않으면서.


그리고 그렇게, 평범하게, 인정받기 위해 애쓰며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나만큼이나 타인도 인정받기 위해 애쓰며 살아간다는 걸 이해하며, 이 잔혹한 우주 속에서 서로 무시하지 않고 의지하며 살아가야겠다.


이게 내가 진짜로 '하고 싶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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