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의 발전이 무섭다. 나조차도 이제는 글을 쓰고 나면 AI를 활용해 다듬는 일이 익숙해졌을 만큼, AI는 창작의 영역을 빠르게 잠식하고 있다. 문과생인 나로서는 글쓰기와 창의력 등 그나마 가질 수 있었던 문과적 전문성마저 AI의 등장으로 인해 사라질 것 같다는 두려움이 든다. '앞으로 뭐 해 먹고살아야 하지'와 같은 걱정과 함께.
AI의 발전은 총 5단계로 나뉜다고 한다.
1단계 : 챗봇
챗GPT가 대표적 사례로, 인간과 언어로 의사소통하며 정보를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
2단계 : 리서치
챗GPT 내 딥리서치 기능을 예로 들 수 있다. 인간이 오랜 시간 공들여 작성해야만 했던 논문을 30분 내로 끝낼 수 있다. 자료 조사, 취합, 요약뿐 아니라 통찰력 있는 분석도 가능하다. 실제로 박사·교수님들은 딥리서치 기능을 활용한 후 자신의 직업이 곧 대체될 거 같다고 인터뷰하기도 했다.
3단계 : 비서
중국의 'Manus(마누스)'는 이 3단계에 해당하는 AI기술의 최전선에 있다. 일정 조율, 문서 정리 등 비즈니스 업무에서 일반적인 회사원 수준의 업무 처리를 수행할 수 있을 정도다. 이 단계가 상용화된다면, 기존의 사무직 종사자들은 AI로 대체될 가능성이 높다.
4단계 : 혁신가
새로운 전략과 기획, 혁신을 직접 제안할 수 있는 AI단계다. 이 단계가 상용화된다면 기존의 고급 기획 역시 AI가 대체하게 될 것이다.
5단계 : 기업
조직 전체를 운영하고 판단하며, 스스로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는 수준의 AI다. 이 단계에 도달하면 기업 자체가 AI로 대체된다. 결국 인류는 '일'이라는 시스템이 필요 없게 되고, 직업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현재 AI는 2단계에서 3단계 사이에 속해 있다고 본다. 1단계 챗GPT가 보편화된 게 불과 4~5년 전이라는 걸 감안하면, AI 발전 속도는 비정상적일 정도로 빠르다. 인류는 이제 AI에 지배당하는 수순으로 접어든 게 아닐까 하는 우려가 든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문득 떠오르는 개념이 있다. 바로 '근원적 독점'. 오스트리아 철학자 이반 일리치가 제시한 개념으로, 경제학에서 말하는 단순한 시장 독점이 아니라, 인간 삶의 방식 자체를 구조적으로 지배하는 현상을 말한다.
예컨대 '학교'라는 시스템이 등장하기 전까지 교육은 가족과 마을 공동체를 통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다만 교육이 학교로 제도화되면서, 교육은 특정한 시간과 공간, 전문가에게 의존하게 되었다. '자동차'도 마찬가지다. 자동차는 단순히 걷는 행위를 대체한 것이 아니라, 차를 소유하고 운전할 수 있는 사람만이 이동할 수 있도록 삶의 방식을 재편했다. 결국 근원적 독점하에, 인간은 선택권을 잃고, 특정 기술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가 된다.
이제 컴퓨터, 스마트폰, SNS는 우리 삶에 완전히 통합되었고, 이를 따라가지 못하는 사람은 사회적 생존 자체가 어려워졌다. 그리고 오늘날 젊은 세대는 디지털 기기와 플랫폼의 근원적 독점화를 체화하며 살아남고 돈을 벌 수 있을 정도의 전문성을 익혀야만 한다. 엑셀을 마스터해야 한다든지, SNS 마케팅 업무를 배우든지 하는 식으로.
그러나 AI는 지금까지의 기술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 속도와 범위에서 매우 급진적이고 파괴적이다. AI가 만들어내는 창의성은 인류가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아득히 깊고, 빠르며 넓다. 고유하다고 믿었던, 인간의 창작이 이렇게 쉽게 대체될 줄 누가 알았을까?
결국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이루어져야 한다. 잠시 역사를 살펴보자. 오늘날의 AI의 발전은 과거 마르크스가 주장했던 기계 자동화의 맥락과 유사하다. 산업혁명 시기 마르크스는 기계 자동화로 인한 '노동 소외'와 같은 문제를 제기하면서 이를 정치적으로 해결하려고 시도했다.
그는 기계가 인간의 노동력을 대체하면서 노동자를 소외시키고, 창조적 노동과 노동자의 자아실현을 불가능하게 한다고 진단했다. 이에 마르크스는 계급 해방, 생산수단의 공유 등의 주장을 펼치며 인간의 자율성과 창의성을 회복하자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를 매슬로의 욕구 이론으로 치환해 본다면, 이는 자아실현·존중과 같은 상위 욕구에 가깝다고 수 있다(물론 단순 환원논리적 관점인 걸 양해 바란다).
다만 지금의 AI 문제는 생존 등 하위 욕구를 위협한다는 것이다. 이반 일리치의 관점처럼, 이건 생존의 문제다. 글쓰기, 생각 정리, 정보 분석 및 취합 등 인간의 창의력과 판단력을 대체하는 AI의 발달은 기초적 인간 삶을 위협하는 생존의 문제가 된다.
이 경우, 인간이 AI를 통해 얻게 되는 편익보다 인간이 사회로부터 대체되고 축출당하는 비용이 훨씬 더 크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애초에 경제 발전, 기술 혁신, 생산성 증대와 같은 경제적 목표는 궁극적으로 인간 삶의 개선으로 귀결되어야 하는데, AI 발전이 인간 종의 존속 불능을 야기하는 것이다.
아쉽게도 이반 일리치조차 이에 대한 뚜렷한 해법을 제시하지 못했다. 기껏해야 아나키즘(무정부주의)적 삶의 방식, 공동체 중심 자급자족에 가까운 것이었고, 현실에서 이를 실현하기엔 한계가 명확하다. 나는 개인적으로 아나키즘에 동의하지 않는다. 어쨌든 우리는 결국 살아야 하니까. 어디로 도망칠 곳도 없고, 시스템 바깥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현실적인 대응은 하나다. 빠르게 AI에 적응하는 것. AI의 발전은 아직 과도기고, 이 시기 수혜자는 결국 AI를 잘 다루는 사람이다. 지금 단계에서 AI는 일종의 확성기다. 확성기를 더 능숙하게 다루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목소리가 더 멀리, 더 크게 퍼진다. AI를 못 다루면 도태된다.
세계적인 학자들 사이에서도 여전히 논쟁은 이어지고 있다. 어떤 이들은 "단 5년만에 인류가 대체될 것"이라 경고하고, 다른 이들은 "AI 위험이 과장되었고, 앞으로 수십년이 더 걸릴 것"이라고 말한다.
어쨌든 간에, AI 패권 전쟁은 이미 시작되었다. 후자의 주장에 배팅하고 싶지만 정작 현실은 전자 쪽에 가까워지는 것 같다. 뭐 어쩌겠는가? 지금으로는 그저 열심히 AI 발전 속도를 따라잡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