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밝히고 싶은 것은, 나는 이성적으로는 ‘하나님은 살아계신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특히나 그것이 기독교처럼 인격신을 가정하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더 적확하게 말하자면, 나는 믿음이 없다고, 나아가 신이 없다고 판단하고 있으며, 이에 대해 나름의 확신을 갖고 있다. 다만 여기서 믿음이 없다는 표현은 기독교인들이 흔히 말하는, ”믿음이 부족하다“는 윤리•규범적 차원이 아니라, 단순히 있다-없다 등 존재여부에 대한 객관적이고 메타윤리적인 판단임을 밝힌다.
목사 본 회퍼의 말처럼 천둥과 번개의 원리가 전자기력으로 설명되는 시대에 누가 감히 신이 있다고 자부할 수 있을 것인가? 종교는 과거의 권위를 잃고, 이제는 문학적 상징이나 정체성의 표현으로, 대중문화 속 대체가능한 기호품처럼 작동된 지 오래다.
그러나 내가 묻고 싶은 것은, “세속화된 세상에서의 신의 역할은 무엇인가”다. 물론 이 질문은 기독교 전통주의자들에게는 지나치게 진보적일 것이며, 내세로의 구원, 하늘나라같은 상징적 이미지를 강조하는 오순절주의자들에게는 이단이라고 폄훼당할 것이다.
하지만 폴 틸리히나 존 쉘비 스퐁처럼 현대 신학자들도, ‘하늘나라’를 공중에 떠 있는 초월적 공간이 아닌, 이 땅에서 실현시켜야만 하는 정의와 사랑의 이상으로서 재해석하지 않았는가? 이들은 종교를 현대적 맥락에서 새롭게 탈바꿈시켰다.
애초에 종교란 무엇인가? 마르크스가 말했듯 누군가에겐 종교는 인민의 아편에 불과할 것이다. 반면 누군가에게는 종교가 단순한 교리가 아니라 삶의 근본 원리일 것이다.
요컨대 이는 스펙트럼의 문제다. 유신론자든 무신론자는 인간은 태어난 이상 각자만의 ‘신’을, 각자만의 ‘도피처’를 강구한다. 그것은 정치, 돈, 예술, 명예, 심지어 현대인의 소비주의나 기술 숭배일 수도 있다. 세속화된 사회에서 신의 역할은, 어쩌면 이런 ‘대체 신’들을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인간의 궁극적 갈망을 정의, 사랑, 공동체 등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끄는 데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신’과 ‘진리’를 특정한 이미지와 규범체계로서 해석하는 데 그치고 있다.
다만 유신론적 실존주의자 키에르케고르가 그의 저서 “두려움과 떨림”에서 밝힌 것처럼, 진리는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 신 앞에 선 단독자가 체험하는 ‘진정한 주관’이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려고 각오한 순간,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려고 각오한 순간, 바울이 로마에서 순교하고자 작정한 순간-우리는 감히 그 순간에서 치열하게 느낄 수 있는 소망을 단순히 인민의 아편이라고 비판할 수 있을까? 그 소망은 실존적 결단과 고뇌 속에서 드러나는 숭고함이었다.
나는 고로 기존의 하늘나라의 이미지를 과감히 버리기를 원한다. 기독교가 단순한 내세 구원과 기복신앙으로서 작동하는 것이 아닌, 실존하는 주체의 과감한 결단과 좌절, 고뇌와 숙고에서 비롯되는 숭고한 체험으로, 삶의 태도로 바뀌길 원한다.
비로소 이러한 숭고함에서 신성이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 이 신성은 자애, 비애, 포용, 용기를 포함하며, 이는 소비주의나 기술 숭배 등 세속적 가치보다 더 본질적이고 풍부한 가치체계로 승화될 수 있다.
이 신성은 실천에서 시작된다. 예수가 함께 동행했던 이들은 병자, 과부, 세리처럼 사회적으로 지탄받고 무시당했던 존재였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조선족, 동성애자, 장애인, 난민 등과 같은 이들이다. 이들을 사랑하진 못하더라도, 최소한 배척하지 않는 태도가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보여줘야할 가치이다. 이러한 포용과 연대야말로 이 땅이 하늘나라처럼 임재하는 순간이 될 것이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하나님께 하는 것처럼, 소외된 이웃을 배려하는 태도가 하늘나라로 가는 열쇠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