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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적 믿음'에 대한 철학적 비판

by 몽땅별

믿음, 특히 기독교인들에게 믿음이란 무엇인지를 ‘철학적‘으로 비판하는 글을 써 보았다. 다만 이 글에서 기독교에 대한 비판이 있다고 해도 이는 철학적 글쓰기이기에 그것이 곧 기독교 전반에 대한 공격이 아니며, 기독교인들이 상투적으로 쓰곤 하는, 믿음 없음을 시인하는 것도 아님을 밝혀두고자 한다. 나아가 이 글은 철학적 글쓰기가 흔히 갖는 양식인 분석적 서술보다는 감정적 서술을 기반으로 하여 작성되었기에 글의 논조가 호소에 중점을 두었다는 것도 밝히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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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시작에 앞서

19살 이후, 내 인생에서 가장 중대한 질문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단연코 '나는 왜 모태신앙을 가지고 태어났는가?'라는 자문일 터다. 이는 단순한 호기심에서 비롯된 질문이 아니다. 그 질문에는 절규 혹은 원망과 같은 문형이 글 속 깊숙이 뼈저리게 스며있다. 또 모태신앙이라는, 선택의 여지없이 주어진 운명에 대한 저항과 발버둥, 그 속에서 연거푸 신음했던 순간들이 빚어낸 물음이다. 고로 이 질문은 지난날의 나를 끊임없이 반추했던 고통스러운 역사며, 개인의 서사다.


나는 끊임없이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고뇌했으며, 순간순간 나름의 해답을 포착한 순간, 일종의 쾌감과 야릇함을 느꼈다. 그러나 그 쾌감은 잠시일 뿐, 다시금 침잠하는 등 감정의 급상승·급하강을 거듭하며 조울증처럼 탈진과 흥분을 연속적으로 체험했다. 결국 지금 쓰는 글도 먼 훗날의 내가 보기에는 한때의 일탈 혹은 미성숙으로 치부되기 십상이겠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점차 더 강한 확신, 즉 철학적으로 사유한 끝에, 변증법적인 경험을 거쳐 미학적·존재론적 체험을 얻었다는 그 자신감을 통해 이 글을 자랑스럽게 내보일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의 글의 맥락을 파악하기 위해선 배경지식이 필요하다. 따라서 필자의 배경을 밝히면, 나는 모태신앙으로서 신심 깊은 순진함으로 신과 기독교적 세계관을 충실히 믿었으나, 그 신실함과는 정반대로 19살, 교회가 분열되었고, 당파적 논리가 지배하는 가운데 '내 믿음이 옳다' '네 믿음은 그르다'와 같은 정쟁을 빈번하게 경험했다. 그리고 그 분위기 속에서, 순진한 아이는 세속적 사정에 의해 갈기갈기 찢기어졌다.


세상이 순진한 아이를 박살내는 경험. 이 경험은 누구에게나 다 한번쯤은 있는 일이라, 지금의 나로서는 흥미롭게 지켜보는 등 조금 여유를 갖고 느긋하게 상황을 지켜보았겠으나 그때 당시의 나로서는(물론 미세하게나마 지금도) 견딜 수 없는 충격과 공포, 이후 충격파처럼 발생하는 절망과 원한이 수년간 지속되었다.


이렇게 감사하게도 세상의 수난은 나를 단순 회의감에 머무르게 하지 않았다. 세상은 나에게 좀 더 학구적이고, 철학에 관심을 갖게 하며, 사유의 폭을 넓혔다. 이렇게 넓어진 사유를 기반으로, 이제 앞으로의 글을 전개해보고자 한다.



#1. 중요 전제

확실하게 밝힐 것은, 나는 기독교 신에 대해 칭송이나 찬양 따위와 같은 유아적이고 미숙한 입장을 밝히지 않을 것이다. 강조하건대, '신은 없다.' 이 선언은 니체적 의미의 허무주의의 도래로 해석될 수 있으나, 여기서는 다수 무신론자가 가지고 있는, 인격적이고 감정을 보유한 기독교 신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는 망상은 불가능하다는 상투적 관념에 더 부합한다. 내게 신-특히 기독교의 신처럼 인격적이고, 감정을 품는 신-이란 없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신의 유무를 증명하는 것은 이 글에서 별로 중요한 주제가 아니다. 신이 있든 없든, 그것은 이 글의 주제는 물론 실생활에서도 별로 중요치 않다. 오히려 더 중요한 것, 곧 기독교인의 '믿음'이란 무엇인가를 파헤치는 것이 더 중요하고 적합한 주제다. 고로 이 글의 목적은 신존재 증명에서 벗어나, "기독교인에게 '믿음'이라는 현상학적 체험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할 것인가"를 탐구하는 것이다.


따라서 물리적 실체로서의 신은 없으나 '믿음'이 있다면, 그것이 현상학적인 정당화 과정을 통해 신이 실존할 수 있으며, 이러한 실존하는 신과 한 개인 간 독단적 체험이 가능하다는 것도 밝히고자 한다. 믿음은 그러한 역할을 제공할 수 있으며, 믿음 앞에 신이 있는 것이 아닌, 신 앞에 믿음이 우선하는 것이다. 이는 일견 미적·심리적 체험에 가깝다고 여겨지겠으나, 사태 자체에 대한 숭고와 아름다움을 넘어서, 존재론적 차원에서 은폐되었던 진리-그 진리는 보다 합일성, 능동성, 존재의 충만성과 가깝다-가 현현(顯現)하고, 밝히어 드러나 개시(erschlossenheit)된다는 점에서 보다 현상학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글은 학술적 외양을 띠지만 철저히 주관에 입각한 글쓰기이며, 나름의 논증과 설득력있는 근거를 제공하지만 결국 그 글의 기저에는 직관과 통찰력이 작동할 것이며, 논리적 비약이 빈번히 일어날 것임을 밝힌다. 그리고 이를 통해 철저한 주관적 진리를 도출해 낼 것을 밝힌다.



#2. 기독교적 믿음이란 무엇인가 -수동성에 얽매이는 기독교인들

'믿음장'이라고 불리는 기독교 신약 성서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제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11:1)"


이후 믿음을 실천한 믿음의 선진들을 나열한다. 아벨·에녹·노아·아브라함·이삭·야곱 등 구약 성서 그들의 행적을 히브리서에 다시 기록하며 믿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히11:6)이라는 메시지와 함께 그 당시의(나아가 오늘날까지의) 독자들에게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라는 명령을 제시한다.


특히 헬라어의 원문을 보면, 실상(hypostasis)은 실체나 본질을, 증거(elegchos)는 증거나 명백함을 의미한다. 이는 믿음이 두 가지 성격을 동시에 갖춘다는 뜻이다. 첫째로, 믿음이 실재하는 실체적 토대라는 점이고, 둘째로, 믿음이 논리적 검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상태라는 점이다. 결국 히브리서 저자는 믿음을 존재론적 실재이면서 인식론적 확신으로 제시하고자 했다.


이 문장이 갖는 함의를 생각해 볼 때, 히브리서의 믿음장을 읽거나 듣는 독자들은 마음에 거룩한 기쁨을 누렸을 것이다. 그리고 믿음을 단순한 소망으로 치부하는 것이 아닌, 확신과 삶의 이정표로서 받아들였을 것이다. 참으로 멋진 체험이 될 것이다.


다만 나는 믿음장에서 의미심장하게 받아들여야 하고, 충분히 비판받아 마땅한 저자의 당위가 있다고 제시하는 바이다. 첫째, 왜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해야하는가? 둘째, 믿음으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인가? 셋째, 믿음의 선진들이 아닌 이들은 문제아인 건가? 넷째, 하나님께서 믿음의 선진들에게 축복을 내리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


이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왜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해야하는가? - 믿음을 강요의 대상으로 보는 수동적인 태도의 문제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가? - 인간이 반드시 순종해야만 하는 존재인지와, 순종의 본질에 대한 의문

믿음의 선진이 아니면 문제가 있는가? - 믿음의 선진과 그렇지 않은 이들을 구분할 때 발생하는 위계의 모호함

믿음의 선진들에게 축복을 내리시는 하나님은 정당한가? - 축복의 선별적 배분이 초래하는 공정성 문제


이러한 질문은 초보적이며 원시적인 의문에 가까우나, 역사적으로 기독교는 이러한 질문에 해법을 내리지 못한 채 그저 미시권력(실생활에서 행하는 순종-즉 언어통제(아멘 강요), 복장규제, 주일성수, 감정통제 등)과 거시권력(교회의 권위-이단 규정, 아퀴나스 신법 등)을 발휘하며 변절자들을 처단해왔다. 이는 기독교가 의문에 대한 답변보다는 권력을 통제하는 차원에서만 그 역할을 다했다는 점을 지적하게 만든다.


기독교 역사가 이렇게 한계가 있다는 점을 미루어 볼 때, 이 글에서는 믿음이란 무엇인지를 파헤치기 위해 기독교 교회사·역사신학 등을 살피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방법론들은 믿음이란 무엇인지를 정의내리는 데 부차적이고, 방해만 될 뿐이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믿음에 대한 나만의 정의이고, 나만의 해석이다. 이 관점이 기존 기독교인들에겐 신성모독에 가까우며, 께름칙함·거북함을 주겠지만, 이젠 유치한 기독교인들이 기존에 줄기차게 주창했던 교리에 내 논리를 끼어 맞추진 않으련다. 왜냐하면 철학이란 외부의 질서와 틀을 깨고, 철학자 스스로만이 확신하는 토대를 건축하는 것이기에 그러하며, 신학, 나아가 '신앙'이란 한 개인과 신의 은밀한 독대이자, 만남이고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줄곧 언급하고, 간증이라는 형식을 빌려 호소하는) 각자만의 체험이기 때문이다. 고로 나는 나만의 믿음을 정의내리고자 한다. 그 전에 먼저 비판받아야 하는 것은 바로 기독교인들이다. 기독교인들의 행태는 도저히 참을 수 없다.


기독교인들. 그들은 비열한 자들이다! 얼마나 비열하냐면, 그들은 스스로 생각하기를 멈추었다.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한다고 하면서, 실상은 이 세상에 벌어지는 일을 회피하고만 있다. 그들은 벌벌 떨며 겁쟁이처럼 세상을 살아가고, 환난 가운데 하나님을 찾는다는 명목 하에 거짓되고 쉽게 깨져버릴 희망만 품는다. 그리고 그것을 믿음이라 착각한 채 그들만의 공동체에서 폐쇄적으로 고여만 가고 있다.


그러면서 세상을 비웃고, 선민의식에만 빠져 막상 타인들을 배려하는 마음가짐을 실천하지 못한다. 말로는 내 이웃을, 온 인류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실상은 바로 옆에 있는 사람조차 무시하는 행태라니! 그들은 겉으로는 기뻐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불안해하고 있으며, 사랑을 베푸는 척 하지만 속으로는 질투하고 있으며, 타인들이 알아차리지 못할, (애초에 타인들이 원하지도 않는) 배려를 시혜적으로 베풀면서 그것에 몹시 흡족해하는 식의 자위를 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그들은, 너무나도 '수동적'이다. 예수가 보여줬던 가치들. 사랑의 능동성, 담대함, 용기와 강자에 대한 저항의식은 잃어버렸으며, 맹목적으로 '종교'(이것은 신앙이 아니다)에만 몰입한 채 그들 스스로의 고유성도 놓치고 말았다. 그들은 말로는 담대한 척 하나 실제로는 겁쟁이들이며, 그들이 보여주는 용기도 지나치게 형식적이라 그 딱딱함에 비종교인들은 괴로워한다.


그렇다. 그들은 현대적인 바리새인들이다. 또 에세네파처럼, 구원이라는 관념에 매몰되어, 자기 연민에 빠져 삶의 주체성을 잃어버린 채 병적인 회피와 환상을 '믿음'으로 오도하는 자들이다. 그러면서도 예수가 보여준 진리-곧 사랑-을 실천하기는 커녕, 배척하고 혐오하고만 있다. 실제로 그러하지 않은가?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바로 내게 한 것이니라"라는 성경 말씀이 동성애자 앞에선 무용한 것처럼 보이며, 그들에게 돌을 던지는 형국이라니. 그러면서도 자신의 야만을 정당화하기 위해 바울의 말과 성서의 그릇된 율법을 빌려 혐오로 무장하며 돌을 던진다. 그 돌의 궤적은 예수를 향하고 있다는 것을 모른 채.


왜 이렇게 기독교인들은 목이 뻣뻣하게 되었을까? 그렇다. 그것은 바울 때문이다! 예수의 사랑을 희석시킨 채 의례와 규율만을 강조한 그의 명령이 기독교인들을 망쳤다! 왜 이렇게 기독교인들은 수동적으로 되었을까? 그렇다. 그것은 신 때문이다! 구약의 신이 기독교인을 망쳤다! 신의 무한한 자비보다 공포와 두려움, 또 신의 권위 앞에서 모든 것이 정당화되는 그 가학적 억압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지나치게 풀이 죽어버렸다. 이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비판받아야만 한다! 구약의 신과 바울이 보여준 사랑은 본래 능동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정확히 그것보다 더 큰 크기로, 두려움과 공포, 그리고 이 공포를 통제하는 율법을 지나치게 강조했다. 고로 이들을 비판하고자 한다. 기독교인들의 능동성을 회복하고자 한다.



#3. 바울에 대한 비판

예수의 사랑을 이방인으로 확장시키고, 이신칭의. 이른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논리를 펼쳐 기독교인들에게 무차별한 신의 은총을 제공해준 바울의 신학은 칭찬 받아 마땅하다. 그의 신학 덕분에 오늘날 기독교는 으뜸 종교가 되었으며, 구원의 영역을 모든 이들에게 확장시켰다.


그러나 그는 너무나도 원리·원칙주의자였다. 나아가 스스로에 대해 혐오감만 가득하고 자기를 사랑할 줄 모르는 불쌍한 자였다. 그의 논리는 그 시대 상황에선 놀라울만큼 세련되고, 정교했으나 그 논리가 예수가 설파했던 무한한 사랑으로 뻗어나가는 것이 아닌, 구원과 종말론적 사고관에 사로잡힌 채 기독교인들에게 수동성을 강요하는 수준에 그쳤다.


바울의 이러한 한계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드러난다. 첫째, 그는 그 자신의 내면적 죄의식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끊임없는 자기 비하와 무력감에 빠지도록 만들었다. 둘째, 그의 이신칭의는 결국 수동적 구원관에 그쳤고, 이러한 구원관은 인간의 자율적 판단과 능동적 행위를 차단했다. 셋째, 종말론적 급박함을 강조하며 현세적 삶의 가치를 폄하함으로써 기독교인들이 현실 도피적 태도를 갖도록 유도했다. 결국 바울의 신학은 구원의 기쁨을 제공하기보단, 영원한 죄책감과 신에의 의존성에 가두어 놓았다.


그의 삶을 살피면 이는 더욱 명확하다. 먼저, 그가 예수를 영접한 다마스쿠스 체험의 강렬함이 오히려 신자들에게 지나치게 수동적인 신앙 자세를 요구하는 결과를 낳았다는 것. 그의 체험이 얼마나 스펙타클하고 가시적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그 체험에 지나치게 몰입한 나머지 그는 스스로의 긍정성과 자기주도성을 잃어버렸다.


스스로를 죄인 중에 괴수로 칭하며 비련의 주인공으로 위장한 그는, 종종 신에 대한 복종과 불안감을 표현했고(고전 9:27), 종말론적 사고관에 깊이 빠져들며 신도들에게 "깨어있으라"고 외쳤다. 문제는 그의 넘치는 카리스마다. 그의 유약함이 다마스쿠스 체험을 통해 극복되었고, 거기에서 피어난 강력한 확신은 그의 카리스마를 높였다. 결국 그 카리스마가 안 그래도 수동적인 기독교인들에게 그의 말을 신의 명령과 동일시하도록 만드는 부작용을 낳았다.


그의 세계관이 얼마나 기독교인들을 수동적으로 만들었는가! 권세에 복종하라(롬 13:1)는 그의 성경 구절로 불의에 저항하지 못하는 기독교인들을 양성했으며, 그가 가진 동성애와 여성에 대한 뒤틀린 관점이 오늘날까지도 이어져 여성의 목사안수를 금지하고, 동성애자가 느낄 수 있는 예수의 사랑을 놓치게 만들었다. 그가 행한 정죄, 그리고 기독교인들의 무비판적이고 맹목적인 복종으로 탄생된 협잡질은 용서하기 어렵다.



#4. 구약 신에 대한 비판

그러나 이는 바울의 잘못이 아니다! 바울은 예수를 영접하기 전 율법교사에게 가르침을 받았고, 그 가르침 덕분에 예수 영접 전에는 그 스스로가 율법교사로서 명성을 얻었으며, 영접 후에는 그 율법을 토대로 자신만의 신학을 펼칠 수 있었다. 즉 그의 일생에는 율법이 중대한 영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율법, 그것은 바로 바울이 그토록 깊은 자기혐오와 굴욕감에 빠지게 된 원인이다. 율법, 그것이야말로 예수가 그토록 부정하고 "서로 사랑하라"는 원칙을 세우도록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게 한 동인이다. 율법, 그것은 셈족(히브리족)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고 불안만을 자극시켜 수동적인 존재로 전락시킨 죄악의 원천이다. 그렇다면 그 율법을 만든 자는 누구인가? 인간을 이토록 수동적인 피조물로 만들고, 기죽이며, 인간만의 고유성을 은폐하고 추락시킨 장본인은 누구인가?


그는 바로 구약의 신이다. 그자는 저주받아 마땅하다! 그는 죽어야 마땅하다! 그는 인간의 주체성을 추락시키고, 역동성을 소멸시킨 장본인이다. 그는 악마와 대화를 시도했던 용감한 아담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고 추방시킨 사악한 존재이자, 카인의 제물을 제멋대로 거부한 악인이며, 자기에게 복종하지 않으면 저주를 내리는 치졸하고도 건방진 자다. 그는 아직도 자신을 숭배하지 않으면 벌을 내리고 지옥에 보낸다는 등 유약한 논리로 협박하지만, 그럴수록 그의 한심하고 미성숙한 태도만 적나라하게 드러날 뿐이다. 그 유치함 때문에라도 나는 더더욱 그를 용서할 수 없다.


그가 창조한 질서, 그가 만든 죄라는 개념 때문에 왜 하필 예수가 희생되어야 했단 말인가? 그가 신이라면, 마땅히 책임을 져야한다. 인간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그만의 오묘한 질서를, 그 혼돈과 부조리함을, 사과해야 한다.


그러나 그는 신이기에, 콧대 높은 신이기에 아무런 대답도 응답도 하지 않는다. 나는 그 점이 너무 화가 난다. 왜 하필 인간은 그가 만든 세상에 태어남으로 인해 부조리한 고통을 느껴야 하는가? 그가 만든 보상체계는 얼마나 모호한가? 신도들은 열성적으로 그를 믿었지만, 그의 변덕스러움 때문에 누군가는 가나안을 보지 못했고, 누군가는 장자의 명분을 놓쳤으며, 누군가는 사자굴에 빠져야만 했다.


그래서 나는 (응당 비기독교인이 행하는 것처럼) 그를 없애려 했고, 무시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미움받을 용기도 없는, 오직 자기를 믿는 신도들에게 칭찬만을 갈구하는 불쌍한 존재였으며, 마음이 걍팍한 자였다. 그는 참으로 딱한 신이었다. 결국 나는 그를 품어주지 않으면 안 되는 운명에 처한 것이다! 그는 왜 늘 온유하지 못하고, 변덕스러움이 가라앉을 때에만 근근이 사랑과 배려를 베풀었는가? 왜였는가? 그렇다! 그것은 그가 나약해서 그런 것이다. 그가 나약해서, 정말로 나약해서 그 자신의 특성인 '나약함'을 우리에게 강요하였고, 그 강요를 정당화하고 체계화하기 위해 그만의 율법을, 그 자신도 지킬 수 없는 그만의 율법을 우리에게 강요한 것이다.


인간은 그러한 그의 유약함을 모른 채 계속해서 속아만 왔다. 왜냐하면 인간은 그의 권위가 너무나도 가시적이고 명쾌해보여서, 그 권능에 무릎꿇고 순종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실상은 그가 유약하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그렇게 지속적으로 인간을 속여왔지만, 그는 스스로도 두려움을 느꼈던 경우가 너무나도 많았다. 그가 느낀 두려움을 적어보고자 한다. 나아가 그의 유약함을 용서해준 용감한 믿음의 용사를 적어보고자 한다.



#5. 참된 믿음과 믿음의 용사들의 사례

믿음이란 무엇인가? 신 앞에 엎드려 복종하는 것? 아니다. 그것은 부분적으로만 진리인 것이다. 앞서 말했듯 복종을 강요하는 것은 유약한 신의 특성일 뿐이다. 우리는 마땅히 용감해야 한다. 그 믿음은 거짓 믿음이다. 그렇다고 신 앞에 반항하는 것? 아니다. 그것도 부분적으로만 진리인 것이다. 왜 신 앞에 반항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닌지 먼저 그 이유를 따져보자.


계몽주의 사상의 도래 이후, 신 앞에 반항하는 계몽주의자들의 등장은 신앙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그들의 주장은 일견 논리적이고, 합당해보이기 때문이었다. 특히 니체 이후 신은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능동성과 용기 덕분에 자신의 권위와 설 자리를 완전히 잃어버렸다. 이러한 능동성의 씨앗은 아마도 아테네인들에게서 배태되었을 것이다. 신의 명령을 거스르고 불을 가져다 준 인간의 창조자 프로메테우스, 신에게 반항하고 무한히 돌을 굴려야했던 시지프스. 이처럼 인간의 능동성을 찬양했던 아테네 신화는 계몽주의자들에게 신을 추락시키고 그 빈자리에 인간을 대용물로 삼아 흡족함을 느낄 수 있는 자극이 되었다.


그러나 철학은 자신이 무엇을 제공하는지뿐 아니라 동시에 무엇을 빼앗고 있는지도 알아야 한다. 신이 갖고 있었던 권위-그 안에는 질서뿐 아니라 혼돈, 부조리, 모순 등도 포함된다-를 계몽주의자들이 추락시킨 결과, 인간은 스스로 삶을 항해해야만 했고, 그 독단은 결국 인간이 무한한 자유 가운데 오히려 방황하고 불안해하는 원인이 되었다. 결국 인간은 너무나 자유로워진 나머지 불안한 상태로 실존을 맞이해야만 했다.


그 실존 앞에, 자기만의 생 앞에, 인간에게 삶이란 동반자 없이 홀로 짊어져야만 하는 고난과 고행의 무거움이 되었다. 곧 그 무거움은 버거움이 되어 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쓰러지는 이들을 양산하는 상황을 만들었다. 결국 신을 찾지 못한 채, 진리를 추구하지 못한 채 인간은 애처롭게 정신과만을 전전하며 호르몬 조절제, 항정신제 등 따위의 부수적 수단으로써만 삶을 극복하려는 빈약하고, 애처로운 존재자가 되고 말았다. 신의 추락으로 인간은 자유를 맛보았으나, 이는 곧 고통이 되어버린 비극인 셈이다.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인간은 다시금 신을 찾아야만 한다. 그러나 그 신은 너무나도 유약하다. 그러나 인간은 신과 함께 동행해야만 한다. 이 모순. 이 모순을 어떻게 극복해야하는지가 나에겐 중대한 고민이었다. 나는 이것을 해결하지 못해서 너무나도 수동적으로, 자신감과 생그러움을 잃어버린 채 괴로워만 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유 끝에, 나는 비로소 능동성을 지니고 신과 함께 기꺼이 동행했던 자들을 재발굴했다. 그들의 능동성, 그 능동성 덕분에 나는 다시 삶에 활력을 얻었다. 따라서 다음의 인물들을 기쁘게 소개하려고 한다. 각각 아브라함, 야곱, 예수다.


#5-1. 아브라함-믿음의 조상

기독교인들에게 믿음의 조상이라고 칭송받는 아브라함. 그러나 기독교인들 중 아브라함의 믿음을 온전히 알고 있는 자가 몇이나 될까! 기독교인들이 늘 그렇듯이 사유할 줄 모른 채 그저 입속에 머금고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니까, 믿음의 조상이겠지 하는 식으로 판단했던 경우가 많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확신한다. 아브라함이 보여준 믿음. 그 믿음 덕분에 기독교는 창시되었고, 신도 구원받았다. 그는 마땅히 믿음의 조상인 것이다!


그는 믿음으로 가나안 땅으로 이주했고, 믿음으로 이삭을 보았다. 그러나 앞선 사례에서 아브라함이 보여준 믿음은 단편적일 뿐이다. 그보다 더욱 충격적인 것, 즉 공포와 전율, 두려움과 떨림을 자아내는 것. 그것은 바로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고 했던 사례다.


유약한 신은 그 자신의 유약함을 또다시 증명하기 위해 아브라함에게 짓궂은 시련을 내린다. 이는 곧 세상의 기쁨이자, 유일한 낙인 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시련이다. 이 시련을 내렸을 때 신은 과연 무슨 생각을 품었을까? 아브라함에게 자신의 시련이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이며 잔혹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려 했을까? 아니면 이 변덕스러운 시련 앞에서 너는 내 말에 충실히 복종하라는, 그 자신의 수동적이고 유약한 면모를 강조하기 위해서 였을까? 그것은 콧대 높은 신이 아직도 응답하지 않기에 나는 잘 모른다. 이는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그 명령을 받았을 때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았다. 당당히 모리아 산으로 갔다. 이후 아브라함이 번제를 위한 불과 칼을 챙겼을 때, 이삭은 의문했다. "번제로 바칠 어린양은 어디에 있나요?" 이삭의 대응은 아주 적절했다. 설마, 자신의 아버지가 자신을 죽인다는, 그 광기에 가까운 명령에 순종하는 바보 같은 사람은 아닐 테니까. 그러나 아브라함은 달랐다. 그는 충실히 믿었다. 신의 광기와 비윤리성에도 그는 믿었다. 왜냐면 그는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이윽고 사건은 긴박해진다. 제단을 쌓고, 장작을 놓으며, 그 위에 이삭을 올려놓았을 때, 그 기괴하고도 공포스러운 분위기는 극에 달했다. 마침내 아브라함이 칼을 들고 자신의 사랑스러운 아들 이삭에게 칼을 내려치려는 그 순간! 신은 전율했다! 신은 두려워했다! 신은 떤 것이다. 자신의 유약함과는 정확히 정반대인 아브라함의 태도를, 그 머뭇거림이 없는 태도를, 당당하고 용기 있는 태도를 보고 벌벌 떤 것이다! 아브라함은 미세한 떨림도 없었다. 진동도 없었다. 망설이지 않고 담대하게, 제 아들을 죽이려고 했던 아브라함의 믿음 앞에 신은 공포와 전율로 괴로워한 것이다! 신은 결국 아브라함의 믿음 앞에 굴복했다. 그 믿음이 너무나도 자기와 정반대의 형태를 띠었기에, 자신이 참으로 못되고 악하며, 치졸하고 유치한 시련을 내린 존재임을 알았기에, 신은 두려워한 것이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아브라함의 그 담대함을.


결국 신은 아브라함에게 복종했다. 외형적으로는 아브라함이 신에게 믿음으로 순종한 것처럼 보이나, 그 실상은 신이 아브라함에게 복종한 것이다. 그 용기에, 그 담대함에 두려워하며. 아브라함은 그렇게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 아브라함은 '순종함으로써', 능히 신을 이겼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관용을 베푸는 자였다. 신이 쓰러졌음을 자랑하거나 기뻐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순종을 실천했다. 신과 함께 동행했다. 유약한 신이 제시한 변덕스러운 시련에 참된 믿음과 능동성을 지니고 대응했다. 그가 보여준 신에 대한 관용, 변덕스러운 신을 품는 포용력, 이러한 능동성은 칭찬받아 마땅하다. 그는 정말로 믿음의 용사였던 것이다.


#5-2. 야곱-이스라엘이라 칭함을 받다

믿음의 용사는 믿음의 후손을 낳는다. 그 인물은 바로 야곱. 그는 후에 이스라엘이 되었고, 이 과정에서 신과 씨름하며 당당히 승리한 자다. 야곱의 사례는 우리에게 믿음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의문하게 만들며 깨달음을 제공하게 한다. 야곱이 이스라엘이라 칭함을 얻은 믿음의 승리는 바로 브니엘에서 시작되었다. 브니엘.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을 가진 이 장소는 야곱과 신이 씨름한 곳이자, 용감한 야곱이 비로소 이스라엘이라 칭함을 받은 곳이다.


브니엘, 하나님의 얼굴. 그렇다면 얼굴이란 무엇인가? 얼굴은 단순한 시각적 형상이 아니다. 얼굴은 존재 자체이며, 타인에 대한 간곡한 요청과 호소가 담긴 메세지다. 얼굴은 말한다. "나를 죽이지 말라." "나를 괴롭히지 말라." 얼굴은 저항한다. "나를 단순한 도구로써 부리지 말아달라." "나를 존재 자체로 받아들여달라." 그렇다. 신은 호소하는 것이다. 야곱이여, 나를 존재 자체로 인정해주고, 함께 동행하자. 너의 능동성과 기쁨을 함께 나누자! 브니엘은 바로 이 윤리적 얼굴이 드러나는 공간이다. 야곱은 그 얼굴을 직면했다. 이에 야곱은 (기독교인이 종종 독단에 빠지며 자주 그러하듯이) 홀로 서는 존재가 아닌, 신과 함께하며 능동적이고 포용적인 주체가 되었다.


그런데 왜 야곱은 밤새 씨름을 해야했는가? 씨름 전의 상황을 보자. 야곱은 형 에서와의 화해를 앞두고 깊은 두려움과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야곱은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의 권한을 얻기 위해 능히 도전했고, 이에 실제로 장자의 축복을 받았음에도, 야곱은 인간적인 한계로 인해 괴로워했다. 형을 속이고 축복을 가로챘다고 생각한 죄책감, 고향을 떠나야했던 치욕감, 그리고 다시 형을 마주하면서 벌어질 끔찍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야곱을 짓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야곱의 씨름은 곧 인간적인 사투다. 야곱은 물리적 형상으로서 드러난 신과의 씨름에서 나아가, 자기 자신과의 씨름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기 자신의 한계를 직면하는 것. 그것은 너무나도 무섭고 두려우며, 불안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진정한 자신이 되기 위해, 참된 믿음을 갖추기 위해, 이러한 사투가 필수불가결하다.


얼굴과 존재적 사투의 메시지가 담긴 브니엘에서 야곱은 신과 씨름하여 승리했다. 그 과정은 야곱의 열세나 치열한 다툼 양상이 아니었다. 야곱은 압도적으로 승리했다! 신은 애초에 이길 수 없었다. 신은 야곱을 만났을 때부터 이미 두려움을 느꼈고, 축복을 베풀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왜 신은 축복을 줄 수밖에 없었는가? 이는 스스로에 대한 존재적 투쟁을 벌이고 있는 야곱에 비해 신이 아무런 경험도, 고뇌도 갖추지 않은 유약한 존재이기에 그러하다. 결국 신은 야곱의 능동성 앞에 겸손할 수밖에 없었다. 야곱의 끈질긴 (내면과의) 씨름, 포기하지 않으려는 강인함, 투쟁 의지에 신은 축복으로 화답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신과의 윤리적·존재적 소통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참된 믿음'의 여정일 것이다.


씨름 이후, 마침내 신은 야곱에게 새로운 이름을 부여한다. 이는 이스라엘, '신과 싸우는 자'라는 뜻이다. 신과 싸우려면 당당해야하고, 자신감을 갖추어야 한다. 신약 이후 우리는 이스라엘 안에 거하는 자들이다. 이스라엘의 뜻처럼, 믿음이란 신과 당당히 씨름하는 것이며, 그 과정에서 승리를 얻는 것이다. 그리고 승리 이후 패배자를 배척하는 것이 아닌, 포용하고 품는 것이다. 야곱이 자기 엉덩이 뼈를 내어주며, 패배자를 위해 영광의 흉터를 선사했듯이. 압도적인 힘을 가졌으나 상대를 품는 자. 그가 바로 야곱이자, 곧 이스라엘인 것이다.


야곱은 엉덩이 뼈가 어긋나 절뚝거리며 걸었다. 절뚝거림. 이는 신과 인간이 믿음으로서 대화했던 독대이자 만남이요, 스스로 존재하고자 하는 투쟁의 증거다. 야곱이 절뚝거렸다는 것은 그가 도전하지 않고 풀이 죽어있는, 예전처럼 유약한 야곱이 아님을 보여준다. 그는 신과 씨름하였고, 자신의 한계와 두려움을 극복한 자가 되었다. 그 상처는 약함의 표시가 아니고, 강함의 증거다! 성장하고 변화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징표다! 상처 가운데 더욱 용기가 깊어지고, 포용력 또한 갖춘 야곱. 이러한 자가 믿음의 용사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영광의 상흔을 지닌 채 자기 자신과 화해하고 신을 능히 품는 자. 그가 바로 믿음의 용사 야곱이다.


#5-3. 예수-신이 된 인간

아브라함-변덕스러운 신의 가혹한 시험 앞에서도 흔들림 없는 담대함으로 신마저 전율하게 만든 자. 그의 믿음은 신을 굴복시킬 정도의 힘을 가졌지만, 이를 폭력이 아닌 숭고한 결단으로 승화시킨 자.

야곱-자신의 내면과 치열하게 맞서 싸우며 성숙한 존재로 거듭났고, 타자를 능동적으로 품는 포용력을 갖춘 자. 절뚝거렸으나, 그것이 나약함의 표시가 아닌 영광스러운 성장통임을 자신 있게 밝힐 수 있는 자.


아브라함과 야곱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진정한 믿음이란 신과의 싸움에서 능히 이길 정도의 압도적인 힘을 갖추어야 하며, 동시에 그 힘을 폭력적으로 발휘하는 것이 아닌 능히 타인을 품는 깊은 포용력으로 전개되어야 한다. 즉 믿음이란 강력한 힘과, 깊은 포용력을 지녀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믿음의 모습은 궁극적으로 누구로부터 완성되는가? 그렇다. 바로 예수로부터 완성된다. 강자에게 강하고, 약자에게 약한 사람. 과부와 고아처럼 사회적 약자를 곧 자신으로 여기며 타인에게 깊이 공감해주는 사람. 거짓된 법칙과 규율, 원칙 등을 능히 깨부수며 참된 진리를 제공하는 사람. 이러한 현자가 누구였는가? 이러한 믿음을 갖춘 자가 누구였는가? 그가 바로 예수다. 예수의 믿음은 딱딱한 신의 율법에 수동적으로 순종하는 차원을 넘어, 생명과 사랑의 진리를 온몸으로 실천하는 삶 그 자체였다.


예수의 믿음은 아브라함과 야곱이 보여준 '신과 맞서는 능동성'을 한 차원 더 높은 단계로 끌어올렸다. 아브라함이 신의 명령에 담대히 순종함으로써 신을 굴복시켰고, 야곱이 신과 씨름하여 승리했다면, 예수는 아예 신의 영역을 인간의 차원으로 끌어내렸다. 그는 신과 맞서 싸우는 것을 넘어서, 신 자체가 되어버렸다.


예수가 보여준 믿음의 특징을 살펴보자. 그는 기존의 신적 권위와 율법에 담대하게 맞섰다. 성전에서 상인들을 내쫓을 때, 그는 신성한 공간이라는 기존 질서를 파괴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고 외치며 채찍을 휘둘렀을 때, 그는 신의 이름으로 신의 권위에 도전했다. 또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고,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다"고 선언했을 때, 간음한 여인 앞에서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지라"고 했을 때, 그는 기존의 율법을 뛰어넘는 새로운 능동적 윤리를 제시했다.


예수의 믿음에서 가장 주목할 점은, 그가 철저히 인간적이면서도 신과 인간의 경계를 완전히 해체했다는 것이다. 아브라함과 야곱이 여전히 '인간'으로서 신과 대결했다면, 예수는 인간의 모든 연약함을 안고서 신이 되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 잔을 내게서 옮겨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던 그의 얼굴을 떠올려본다. 그때 예수의 얼굴에는 어떤 표정이 서려있을까? 죽음에 대한 두려움? 아무도 자기와 같이 기도하지 않는다는 고독감? 그리고 제자들마저-심지어 그의 수제자 베드로는 더욱 심하게- 자신을 버릴 것이라는 절망감이 교차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인간적 연약함 속에서도 "그러나 내 뜻이 아닌 신의 뜻대로 하라"고 다짐하는 그의 결연함을 엿볼 수 있다.


또 그는 십자가 위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외치며 절규했다. 그 절규는 신에 대한 원망과 의심을 보여주며 동시에 깊은 애절함을 느낄 수 있다. 신이 자신을 버렸다는 절망적 깨달음, 그러나 동시에 그 신을 완전히 포기할 수 없는 간절함.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솔직한 모습이 아닌가? 이렇게 모든 인간적 고통이 끝나고 신마저 두려워하며 성전 지성소의 휘장이 찢어질 때, 그는 비로소 인간의 몸으로 신이 된 존재로서 완성된다.


예수의 인간적 감수성은 그의 믿음을 더욱 숭고하게 만든다. 그는 완벽한 신적 존재로서가 아니라, 우리와 같은 고통과 두려움을 경험하는 인간으로서 신과 맞섰다. 그의 눈물, 그의 분노, 그의 연민은 모두 실재했다. 과부와 고아를 보며 느꼈을 그의 애처로움, 제자들의 배신에 상처받은 그의 영혼, 군중들의 야만에 안타까워했을 심정 모두 그의 믿음을 구성하는 요소다. 바로 이러한 인간적 연약함을 통해 죽음을 극복하고 부활함으로써, 그는 인간이 신이 될 수 있음을 그의 삶 자체로서 증명한 것이다. 그의 신적 완성은 인간성의 포기가 아니라, 인간성의 극한적 실현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예수의 믿음은 아브라함과 야곱이 보여준 '신과 맞서는 능동적 믿음'의 완성체다. 그는 단순히 신을 굴복시키거나 신과 씨름하여 이기는 것을 넘어서, 인간 자체가 신적 존재가 될 수 있음을 몸소 보여준다. 그의 일생 전체가 곧 '참된 믿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살아있는 답변이었다. 믿음이란 신 앞에 엎드려 복종하는 것도, 신에게 무조건 반항하는 것도 아니다. 믿음이란 신과 당당히 맞서면서도 그를 포용하고, 나아가 스스로 신적 존재가 되어가는 역동적·극한적 과정인 것이다. 예수는 바로 이러한 믿음의 완전한 실현체였다.

#5-4. 예수에 대한 개인적 사견

기독교인들이라면 예수를 비유로서, 일화로서, 존재 자체로서 수백번도 넘게 공부한다. 다만 나는 예수의 삶을 상상하는 것이 참된 믿음의 지름길이라고 생각한다. 예컨대 성전에서 예수가 채찍질을 했던 순간, 그 순간 예수는 얼마나 결연한 얼굴이었을까? 채찍을 꽉 쥐고 휘두르는 순간, 그 순간 예수의 팔뚝은 얼마나 딴딴했을까? 그 채찍이 나에게로 향한 건 아니었을까? 예수 앞에서 나는 얼마나 오만했었을까.


나는 천국과 지옥 따위 등을 운운하며 벌벌 떨며 수군거리는 기독교인들에게는 별 관심이 없다. 자기가 얼마나 성경을 많이 읽었고, 교회 법규와 의례를 잘 준수하는지 떠드는 자들에 대해서도 무신경할 뿐이다. 심지어 (정작 본인도 조급함과 공포심을 숨기지 못한 채) 성서를 똑바로 읽으라며 협박하듯 말하는 이들에게서도 아무런 걱정이 들지 않는다. 나는 이제 나만의 철학을 확고히 세웠으니까.


다만 내가 관심있는 건, 바로 예수다. 예수의 일생에서 나는 그의 고통과 상처, 나아가 그의 진심과 애처로움을 느낀다. 그의 간절한 호소를 느낀다. 예수가 삶을 통해 나를 응시할 때, 나는 그 시선에서 얼마나 도망칠 수 있을까? 예수와 독대할 때 나는 그가 보여준 사랑의 능동성, 믿음의 주체성을 잘 실천했다고 과연 답변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계속 품을수록 두려워진다. 그 두려움은 구약 신이 주는 두려움과 차원이 다르다. 나를 행하게 만들고, 나를 겸손하게 만드는 원동력 그 자체다. 왜냐하면 예수는 삶을 통해 증명했기에, 그 삶을 너는 실천할 수 있는가 묻는 결연한 질문이기에 그러하다. 이 두려움 앞에서 천국도 지옥도 별로 중요한 게 아니다. 예수가 보여준 삶이 가장 중요한 것이니까. 은혜도, 은사도, 형식적인 믿음이라도 예수의 사랑 앞에선 모든 것이 무용하다. 예수의 삶을 실천하고 있는가가 기독교인에게는 가장 중요한 믿음의 단서일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내가 얼마나 예수를 닮아가고 있느냐의 문제다.


예수는 나에게 묻는다. "너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의 제자가 될 수 있겠는가?" 철학적 사변을 이어나가 나만의 믿음의 원칙을 세웠어도 이 질문에 쉽사리 답변하지 못하겠다. 나는 그저 인간적인 사람일 뿐이니까. 그러나 어쩌겠는가? 그가 보여준 삶을 나 또한 실천하도록 노력해야지. 그것이 바로 신앙 아니겠는가.



#6. 마무리하며

글을 읽으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불편했을까 모르겠다. (사실 아무도 그런 생각을 안 했을지도) 그러나 이 글을 쓰기까지의 과정에서 나는 신이라는 질료가 능동성, 기쁨, 사랑, 행복감과 같은 감성으로 의식되는 경우가 아닌, 굴복, 억압 등 부정적 감성으로만 의식되는 경우가 많았고, 이것이 내 철학을 방해하는 요소이자 내 일상을 침범하는 순간들이 너무나 많았기에 신을 비판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밝히고자 한다. 물론 신을 비판하는 것이 엄밀한 검증이 아닌(검증을 할 수 있는지도 불분명하지만), 개인적 호소와 사변 등으로만 이루어지기도 하였고, 나 자신이 신학적 소양이 부족하기에 신을 함부로 판단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밝히고자 하는 건, (부조리와, 공포, 두려움 등은 신의 여러 특성 중 하나일지도 모르겠지만) 신이 가한 가학적 억압이 인간에게 그렇게까지 중요한 의미로 다가와야만 하는 가다. 그러한 신에 의문을 제기하고, 신만이 제공하는 믿음이 아닌 나만이 오롯이 사유하여 설립한, 신과 소통하는 믿음이 올바른 믿음이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하고.


따라서 나는 신살자가 되어 내 철학을 방해하는 기존의 피동적인 믿음을 격파하고, 나만의 능동적인 신앙을 설립하는 것이 더 주요하다고 판단했다. 내 청소년 시기에서 신앙이란 피학적인 성격과 진배없었던 경우가 많이 있었으니까.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건 철저한 인지와 사유에서 비롯된다고도 믿는다. 이 과정은 계속 이어질 것이지만, 지금으로서는 이번 기회에 설립한 내 스스로의 믿음에 대한 정의에 흡족한다. 나뿐만이 아닌 기독교인이 늘 행하는 피학적 행동을 극복하고,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믿음을 확립하는 것이 일상에서 큰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확신도 한다. 결국 이 글의 목적은 기독교적 믿음이란 무엇인지를 정의내리기 위한 것이라기 보단, 개인적이고(나아가 보편적이기도 한) 철학적인 여정을 더욱 심화하는 과정 그 자체에 있었음을 밝히는 것이 맞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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