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포칼립스(AIpocalypse)는 인공지능(AI)과 종말(Apocalypse)의 영단어 합성어다. 이 합성어에는 우리가 만든 피조물이 우리를 집어삼킬지 모른다는 원초적 공포가 서려 있다.
AI 기업 경영자들은 기술적 낙관론과 지정학적 경쟁(중국)을 명분으로 AI 개발의 가속 페달을 밟고 있다. 다만 실리콘밸리 최전선의 연구자들조차 자기들이 만든 AI가 어떤 경로로 특정한 답에 도달하는지 완전히 설명하지 못한다. AI 기술은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지만 내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불투명성은 불안을 낳는다. AI는 인간 노동을 대체하고, 판단을 대신하며, 창작의 영역까지 침투한다. 수십년간 쌓아온 전문성이 하루아침에 무용지물이 된다. AI는 인간보다 뛰어난 지능으로 수백편의 논문을 제조한다.
문제는 지능의 우열이 아니다. 우리가 AI를 두려워하는 진짜 이유는 의미의 기반이 무너지고 있다는 감각에서 나온다. 인간이 순식간에 무력해질 수 있다는 감각은 인간 정체성을 흔든다.
“신은 죽었다”
19세기 말, 과학과 이성이 기존 종교 세계를 재편하는 가운데 철학자 니체는 이같이 선언했다. 니체의 선언은 단순히 종교의 몰락을 예고한 것만이 아니었다. 인간의 존엄과 삶의 방향을 제시해주던 절대적 기준이 사라졌다는 선언이었다.
코페르니쿠스는 인간이 우주의 중심이 아님을 밝혔다. 관측 기술의 발달과 찰스 다윈은 인간이 138억년의 시간 속에서 우연히 발생한 먼지 알갱이 위의 찰나와 같은 존재임을 드러냈다. 신이 죽은 자리에 허무가 찾아왔다.
AI 시대를 맞아 우리는 '두 번째 신의 죽음'을 경험하고 있다. 이번에 죽은 신은 '인간중심주의'라는 믿음이다.
그러나 니체는 그저 허무만을 주장하지 않았다. 니체는 허무 속에서 인간이 스스로 의미를 창출할 수 있는 자유를 보았다. 세상이 본질적으로 무의미하다면 의미를 부여하는 주체는 자신뿐이다. 인간은 스스로 의미를 찾고 삶을 정립할 수 있다.
삶의 목표가 행복이든, 종교적 진리 추구든, 풍요로운 부든, 심지어 자살이든 인간이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면 이 모든 것이 절대적 자유가 된다.
유신론적 실존주의자 키에르케고르도 주관성을 강조했다. 그는 객관적 진리와 주관적 진리를 구분했다. 과학이 다루는 것은 전자다. 제시한 가설과 사실이 논리적으로 일치하는지, 정당화할 수 있는지를 따지는 영역이 바로 이것이다.
하지만 “나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 "나는 무엇을 희망하는가"와 같은 질문은 객관적 검증을 벗어난다. 이는 개인이 자신의 총체적 삶을 걸고 결단해야 하는 문제다.
AI가 인류의 데이터를 학습하고 방대한 정보를 분석하더라도, 인간의 절대적 주관까지 대신할 수 없다. 희망은 통계나 연산에서 나오지 않는다. 각자가 자신의 삶을 어떻게 해석하고, 어떤 가치를 선택하느냐에 달려 있다.
AI 시대, 감히 예상하건대 인류는 파괴될 것이다. 인간 스스로가 창조한 피조물에 의해서. 그러나 인간은 파괴될지언정 패배하지 않는다.
인간은 무의미 속에서 의미를 길러내는 존재다. 스스로 가치를 창조하는 주체이자, 불확실성과 고통, 멸망조차 나만의 서사로 재해석해 아낌없이 끌어안을 수 있는 존재다. 의미를 창조하는 능력, 고통을 서사로 재해석하는 힘, 불확실성 속에서도 선택하는 용기. 이것들은 AI가 결코 모방할 수 없는 인간 고유의 영토다.
AI 시대, 인간은 무엇을 희망할 수 있는가. 희망은 객관적 진리에서 나오지 않는다. 스스로 삶의 주체가 되겠다는 결단 속에서, 절대적 주관을 세우는 인간의 강렬한 의지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 AI가 인간을 압도할지라도 인간은 의미를 창조하는 존재로 남는다.
의미의 투쟁을 지속하는 한, 인간은 결코 패배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