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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샤프 위의 포뇨 Apr 22. 2019

<안 봐도 사는 데 지장 없는 전시>

현대인의 일상에서 예술이 차지하는 크기를 담다

  지상 세계를 시기한 지저(地底) 세계의 인류는 지상 세계를 파괴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지만, 그 힘을 사용하지 않는 조건으로 만 명의 지상 사람을 납치해 도시 하나 크기의 땅을 파면 다시 지상으로 돌려보내 준다고 약속한다. 하지만 납치된 사람들이 감내해야 하는 노동의 조건은 지옥이라 부르기도 민망하다. 그들은 제대로 된 식수가 없어 오줌을 받아 마셔야 하고, 매일 고된 노동에 시달리면서도 빵 한 조각 먹기가 힘들어 굶주린다. 누군가는 지상의 인류가 자신들을 구원해주길 기도하고 누군가는 힘을 합쳐 지저 세계의 인류에게 대항하지만 무엇하나 통하지 않자 사람들은 체념한다. 그렇게 분노도, 사랑도, 눈물도, 여유도 잃은 사람들은 점점 '회색'이 되어갔다.

인간이란 존재가 밑바닥까지 추락했을 때, 그들에게 문화란 하등 쓸모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어느 날, 한 여인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또 한 청년은 벽에 곡괭이로 그림을 그렸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조금이라도 더 많이, 더 빨리 땅을 파야 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행위는 모욕적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노래 부르는 여인의 뺨을 때리고 그림 그리는 청년에게 돌을 던졌다. 하지만 여인은 꿋꿋하게 노래를 부르고, 청년은 피를 흘리면서도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기적처럼,  사람들은 더는 여인이 노래를 불러도 화를 내지 않았다. 심지어는 그들이 그림을, 노래를, 글을 이어나갈 수 있게 자신의 피 같은 빵 덩어리를 나눴다.


여전히 사람들은 죽어 나갔고, 여전히 사람들은 배가 고팠다. 하지만 사람들은 더 이상 '회색'이 아니었다. 아무리 돌가루가 날리고 묻어도, 사람들은 회색이 아니었다.


 예술은, 그런 존재다.


 위의 이야기는 김동식 작가의 단편 소설, <회색 인간>을 요약한 것으로, 작가는 물질주의가 팽배한 사회에서 예술이 중요한 이유를 날카로운 상상력으로 그려낸다. <안 봐도 사는 데 지장 없는 전시>라는 제목을 보자마자 김동식 작가의 <회색 인간>이 떠올랐다면 너무 비약일까. 김동식 작가가 <회색 인간>에서 보여주었듯이, 그림이, 그리고 전시가 밥 먹여주거나 옷 입혀주는 것은 아니지만, 오로지 (먹고) 사는데만 집중한 삶은 척박하고 고루하다. <안 봐도 사는 데 지장 없는 전시>는 독특한 제목으로 관객들의 눈길을 끄는 것은 물론, 고도 경쟁사회에서 '살아남는 것'에 지친 현대인들에게 몰라도 먹고사는 데 지장 없는 예술이 역설적으로 삶을 얼마나 풍요롭게 할 수 있는지 일깨운다.


전시회의 인트로


 아침-낮-저녁-새벽으로 이어지는 <안 봐도 사는 데 지장 없는 전시>는 현대인의 일상을 주제로 한 회화, 사진, 영상, 설치, 조각 등 현대미술의 전 장르를 아우르며 무심코 지나쳤던 일상 속 예술의 아름다움을 반짝인다. 난해하고 어렵게만 느껴졌던 현대 미술은 우리의 일상과 만나 한층 살갑게 관객들을 반긴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작가는 아무래도 '배달의 민족'일 것이다. 배달 애플리케이션으로 친숙한 배달의 민족은 참신한 캐치프레이즈와 독특한 광고로 업계 1위를 달성했다. 매년 글씨체를 제작해 무료로 배포하는 것도 배달의 민족만의 연례행사다. 이번 전시에서 배달의 민족은 이미 대중들에게 익숙한 한글 글씨체인 '한나체'를 활용해, 관객과 관객 사이를 잇는 '배민 라이더스'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이번 전시에 게임을 출품한 스튜디오도 있다. 바로 비폭력 게임 제작을 지향하는 마운틴 스튜디오다. 마운틴 스튜디오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그린 게임, <플로렌스>를 통해 게임에 대한 부정적 고정관념을 깨고 유저들이 한 뼘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이번 전시에 참여했다. <플로렌스>는 전시회 한쪽에 놓인 태블릿 PC를 통해 직접 체험해 볼 수 있다.


 회화와 조각을 넘어, 폰트와 게임, 북디자인까지 받아들인 <안 봐도 사는 데 지장 없는 전시>는 일상과 예술의 경계를 허물고 관객들의 삶 속에 깊이 스며든다. 느슨해진 예술의 경계 속에서 관람객은 끊임없이 '예술이란 무엇인가?'를 자문하게 된다.


게임 플로렌스


  미술 전공자가 아닌 사람들에게 현대 미술이란 난해하고 때로는 고리타분하다. 딱딱한 문어체와 학술 용어들로 가득한 작품 해설은 관객들의 피로도를 더할 뿐이다. 이런 상황에 SNS까지 유행하면서, 전시회에 출품된 작품의 수준보다 SNS를 돋보일 사진을 얻을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해졌다. <안 봐도 사는 데 지장 없는 전시>는 '작품 감상'이라는 잃어버린 전시회의 목적을 되찾는 데 집중하면서도 기존 해석 매체를 벗어난 다양한 방식을 이용해 현대 미술의 문턱을 낮추고 관람객의 이해를 돕는다.


 오전 8시 10분, 곧 열차가 도착한다는 소리에 지하철 플랫폼을 향한 걸음을 재촉합니다. 이미 스크린 도어 앞에는 열차를 타려는 사람들로 줄이 길게 늘어섰지만 이번에 오는 열차를 타지 못하면 지각이기에 비좁은 사람들 틈 사이로 열심히 몸을 욱여넣어 봅니다. 여기저기 짜증의 목소리가 새어나오고, 밀고 밀리는 사람들 틈 사이에서 새삼 우리나라에 사람이 이렇게 많았나, 출근도 전에 피곤해집니다.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에세이나, 소설의 도입부에서 볼 법한 서정적인 문체의 설명문은 기존의 전시회에서는 보기 드문 파격적인 행보다. 작품의 정보전달보다는 관람객의 시선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품은 관객의 시선으로 그 이름을 불러줄 때,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그런 의미에서 관람객이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작품 설명은 온갖 어려운 단어로 포장된 문장들보다 작품의 본질에 집중한다. 관람객의 어제를 재현한 공간에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신의 어제를 다시 걸어보는, 기묘한 데자뷔는 <안 봐도 사는 데 지장 없는 전시>만이 줄 수 있는 선물이다.


아침-낮-저녁-새벽 중 저녁

 모든 예술은 일상의 사물을 평소와는 다른 시선에서 바라보는 것으로 시작한다. <안 봐도 사는 데 지장 없는 전시>의 리플릿이 여권 모양인 것은, 일상을 여행자의 눈으로 새롭게 재단하고 그 속에 담긴 예술의 의미를 발견해 보라는 깊은 뜻이 아닐까. 이번 주말에는 봄기운 가득한 석파정에서 일상의 예술을 찾아 떠나보고 싶다.


원문 출처: http://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41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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