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작년까지만 해도 나는 '당신은 애니메이션을 즐겨 보십니까?'라는 항목에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아니요를 체크하는 사람이었고, 친구들이 달빛천사나 이누아샤 얘기를 꺼내면 대화에 끼지 못해 어색하게 웃고만 있는 사람이었다. 아주 가끔 미국 애니메이션이나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를 보기는 했지만 그것은 순전히 영상, 또는 영화에 대한 호기심에서 비롯된 것으로 독립적인 매체로서의 애니메이션과는 관련이 없었다.
처음 독립 애니메이션을 접한 곳은 EGMF였다. EGMF는 이화 그린 무비 페스티벌의 줄임말로, 매년 이화여대에서 진행되는 야외 영상/영화제를 말한다. 나는 운이 좋게도 제1회 EGMF 학술팀 스태프로 참여했는데 출품되는 수 십 개의 영상 및 영화들의 소개글을 작성하는 역할이었다.
이화여대에 영화과는 없지만 영상디자인과가 있다. 그래서 영화나 영상미술을 제외하고도 EGMF에는 뮤직비디오나 애니메이션 섹션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안타깝게도 나는 뮤직비디오에 배정을 받아 애니메이션 출품작을 미리 감상할 기회가 없었는데 애니메이션을 맡았던 스태프가 출품작들이 다 독특하고 재미있다며 영화제 때 직접 가서 보기를 강력히 추천했다. 정말 솔직히 말하자면, 그때까지만 해도 애니메이션 출품작에 그렇게 큰 기대를 하지는 않았다. 작품의 수준을 의심했다기보다는 나는 정말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The perfect jungle> by 김세영
애니메이션 하면 사람들이 떠올리는 이미지는 딱 두 가지다. 덕후의 본고장인 일본 아니메(Anime) 또는 할리우드 자본이 투입된 미국 애니메이션. 슬프게도 이것은 편견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로 사실에 가까운 편견이다. 제작비나 상영 횟수, 관객 수 등을 생각하면 애니메이션은 이 두 국가가 양분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EGMF에서 만났던 애니메이션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대자본 애니메이션과는 전혀 다른, 완전히 독립적인 장르의 애니메이션이었다. 바야흐로, 독립 애니메이션의 세계에 눈을 뜬 순간이었다.
모든 것이 대칭인 정글에 사는 쌍둥이의 이야기나 관객의 물리적인 움직임에 실시간으로 반응하는 인터렉티브 연작은 영상 미술과 영화, 그리고 애니메이션 사이에 애매하게 걸터앉아 관객들을 유혹했다. 이들은 단편 영화나 컴퓨터 그래픽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단순함과 역동성을 표현했고, 영상 미술이 갖지 못한 내러티브를 가지고 있었다. 동료 스태프의 추천으로 독립 애니메이션이 어떤 건지나 보려던 나는 처음 봤던 그 작품이 다시 시작될 때까지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하지만 EGMF 이후로는 독립 애니메이션을 볼 기회가 거의 없었다. 유튜브에서 독립 애니메이션들을 종종 찾아보곤 했지만 유튜브에 업로드된 것은 그 수가 적었고, 스마트폰으로 보다 보니 메신저 알람 등으로 집중력을 잃을 때도 많았다. 인디 애니페스트는 독립 애니메이션에 대한 조갈증을 해소할 흔치 않은 기회다. 중국, 일본뿐만 아니라 이란, 이스라엘 등 평소에 접하기 힘들었던 국가의 작품 또한 만나볼 수 있고, 짤막한 소개글 뒤에 감독들의 실제 창작 의도를 들어볼 수 있는 GV도 마련되어 있다.
또한, 인디 애니 페스트는 경쟁 영화제다. 말 그대로 경쟁을 통해 우수작을 선정하는 영화제라는 의미다. 총 5개 부문으로 구성된 인디애니페스트 2019는 3개의 경쟁부문과 2개의 초청부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3개의 경쟁부문은 기성 애니메이터들 작품 대상의 ‘독립보행(Independent Walk)’과 학생 애니메이터들이 경쟁을 펼치는 ‘새벽비행(First Flight)’으로 나뉘며, 아시아 지역의 작품을 대상으로 한 ‘아시아로(Asia Road)’부문도 있다. 국내 초청부문에는 로보트 태권브이, 태권동자 마루치 아라치 등 7-80년대 유명 애니메이션이 상영되며, 해외 초청부문에는 야마무라 코지, 보리스 라베 등 전 세계 독립 애니메이션 계를 선도하는 작가들의 작품이 상영된다.
다섯 개의 주요 부문을 제외하고도 알찬 프로그램들이 관람객을 기다리고 있다. 파노라마는 본래 영화제에서 거장들의 최신작을 소개하는 자리로, 인디 애니페스트에서는 아시아 각국의 작품들이 '외톨이/내 곁에 있어줘'라는 주제로 묶여 상영되며, 한국 파노라마 부문에는 장편 독립 애니메이션 '슈퍼문'이 상영될 예정이다. 올해로 10주년을 맞은 릴레이 애니메이션은 애니메이션의 다양한 가능성과 새로운 매체적 시도를 실험하는 협업 프로젝트로서, 2019년에는 음악과의 컬래버레이션을 통해 '뮤직 비디오'로 제작되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가장 기대하고 있는 프로그램은 인디 게임과 인디 애니메이션의 미래에 대해 논하는 스페셜 토크쇼 <덕업 상권: 인디 게임 X 인디 애니, 크로스!>다. 최근 들어 높은 그래픽을 갖춘 대형 게임만큼이나 2D 인디 게임의 인기도 높아지고 있다. 올해 초 서울 미술관에서는 <안 봐도 사는데 지장 없는 전시>의 메인 작품으로 인터렉티브 스토리 기반의 게임, 플로렌스를 선정했다. 플로렌스는 유저의 선택으로 주인공의 인생이 결정되는 스토리형 게임으로, 애니메이션과 게임 컬래버레이션의 대표적인 예다. 게임과 스토리, 영상 디자인을 공부하는 융합콘텐츠 학과 학생으로서, 게임과 애니메이션 산업의 미래를 엿보고 함께 논할 수 있는 자리가 생겼다는 것은 절대 놓칠 수 없는 소중한 기회다.
국내 유일 독립 애니메이션 영화제였던 인디 애니페스트는 이제 세계 유일의 아시아 애니메이션 영화제가 되었다. 벌써 14회를 맞은 인디 애니페스트가 올해는 또 어떤 실험적인 기법과 참신한 발상으로 관객들을 즐겁게 할지 벌써부터 개막일이 기다려진다. 출품작 대부분은 20분을 넘기지 않는 단편 애니메이션이지만, 그 안에 담긴 주제는 회화처럼 순간적이면서 심오하다. 관객들은 인디 애니페스트 동안 영상 예술과 회화, 영화의 경계에서 작지만 큰 영화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