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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샤프 위의 포뇨 Sep 29. 2019

걸그룹, 날라리가 되다

맞으면 뭐 어쩔건데?

 여름은 누가 뭐래도 걸그룹의 계절이다. 이번 여름에도 어김없이 수많은 걸그룹들이 저마다의 개성을 뽐낼 수 있는 곡으로 가요계를 화려하게 수놓았다. 그런데 예년과는 그 모습이 사뭇 다르다. 바다를 연상케하는 청량한 컨셉과 한 여름의 사랑 이야기는 어디가고, 짙은 화장으로 무장한 걸그룹들이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해'를 연신 외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걸그룹 공식 여름 의상이라 할 수 있는 흰 티에 짧은 청바지 대신, 힙합과 레트로가 2019 여름을 접수했다.


 걸크러쉬라는 말은 진부하다. 나쁜 남자에게 복수를 계획하는 노래는 2000년대부터 지겹도록 많았고, 여자가 먼저 당당하게 사랑을 고백하는 노래도 이제는 별로 놀라울 것이 못 된다. 드물지만 원더걸스의 'So hot'이나 2ne1의 '내가 제일 잘 나가'처럼 나르시시즘 가득한 노래도 있다. 이쯤되면 걸크러쉬라는 이름으로 나올만한 주제는 다 나온 것 같은데, 2019년 걸그룹은 새로운 컨셉으로 자신들의 한계를 부수며 새로운 도전을 주저하지 않는다.


https://youtu.be/ycYLPbtxU1Q

Uh-uh-oh 만지지 말고 저기 떨어져요 / 내게 뭐를 원하나요 다 똑같죠 너처럼
너 같은 거는 이제 전혀 모르겠네요 / Uh-uh-oh 나 변했나요 다 똑같죠 너처럼
베풀거나 내주거나 천사 같은 hello /  달콤하게 사탕 발린 말도
예의 없어 착한 척 말고 꺼져 / 이제 와 가식 따위 떨지 말아
맴돌거나 말 걸거나 박쥐 같은 follower / 내 성공을 점쳤다는 liar
어이없어 친한 척 말고 꺼져 / 널 위한 가식 따윈 기대 말아


 2019 걸크러쉬는 6월 26일 컴백한 여자아이들의 <Uh-Oh> 컴백과 동시에 시작되었다. 처음 노래를 들었을 때는 두 귀를 의심했다. 데뷔 때부터 청순하거나 섹시한 컨셉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세 번째 앨범만에 이렇게 강력한 가사와 컨셉으로 여자아이들만의 색깔을 공고히 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위의 가사는 <Uh-Oh>의 프리훅(Prehook)부터 훅(Hook) 사이만 발췌한 것인데, 노래의 화자가 굉장히 직접적으로 공격성을 드러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Uh-Oh>가 특별한 이유는 단순히 가사에서 공격성을 드러냈기 때문이 아니다. 물론 걸그룹 노래에 비속어를 사용한 것이 파격적인 시도임은 분명하지만, 그것만으로는 <Uh-Oh>의 컨셉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 화자가 공격하는 대상은 연인 관계에 있는/있었던 사람도, 자신들을 향해 온갖 나쁜 말을 쏟아내는 악플러도 아니다. <Uh-Oh>에서 화자가 공격하는 대상은 굉장히 구체적이다. 성공하니까 갑자기 친한 척하는 사람. 이는 기존의 걸그룹 노래에서 보기 힘들었던 새로운 관계 역학이며, 이를 향해 대놓고 '꺼져'를 외칠 수 있는 패기 또한 참신하다.


여자아이들의 <Uh-Oh> 앨범 커버


 여름임에도 불구하고 청량한 색의 의상보다는 검은색과 베이지 위주의 의상을 컨셉으로 잡은 것도 주목할 만한 점이다. 어두운 계열의 갈색립은 어두운 아이 메이크업과 대비되어 강렬하고 거친 느낌을 주며, 뮤직비디오와 앨범 아트의 배경이 된 사막은 이러한 컨셉을 더욱 부각한다. <Uh-Oh>의 장르는 힙합의 기초 장르 중 하나인 붐뱁으로, 안무 또한 장르에 어울리는 걸스 힙합으로 구성되어 있어 크고 역동적인 동작들이 여자아이들의 파워풀한 에너지를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여자아이들 이후 걸크러쉬 컨셉의 계보를 이은 그룹은 JYP의 괴물 신인, ITZY(잇지)다. ITZY는 이미 올해 초 '달라달라'로 소속사 선배 트와이스와는 전혀 다른 컨셉의 그룹임을 확실히 한 바 있다. ITZY의 첫 번째 미니앨범 타이틀곡 'ICY'는 '달라달라'에 이어 ITZY의 당돌함과 자신감을 보여주는 곡이다. 아래의 가사 역시 'ICY'의 프리훅에서 훅까지의 가사를 발췌한 것인데, 화자는 남들이 보기에는 도도하고 차가워 보이지만 속은 꿈을 향한 열정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이다. 자신감과 당당함으로 무장한 그들은 너의 틀에 맞출 생각 없느니 네가 뭐라던 신경쓰지 않는다고 말한다.


https://youtu.be/zndvqTc4P9I

Icy but I'm on fire 내 안에 있는 dream 난 자신 있어
날 봐 I'm not a liar 너의 틀에 날 맞출 맘은 없어 (dance)
다들 blah blah 참 말 많아 난 괜찮아 계속 blah blah
They keep talkin', I keep walkin'

 

 언뜻 보기에 'ICY'는 기존의 나르시시즘적인 걸그룹 노래들과 큰 차이가 없어보인다. 그러나 'ICY'의 화자는 꿈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노래들과 확연한 차이가 있다. 내가 예쁘고 잘났다는 얘기만 늘어놓는 것은 잘난 척에 불과하다. 심지어 걸그룹 나르시시즘이 대부분 '예쁘다'에 한정되는 것을 고려하면, 내면의 성정과 발전을 당당하게 얘기하는 'ICY'가 더욱 눈에 띌 수밖에 없다. 2절 시작 부분에서 이 노래가 결국 너의 Favorite song이 될 것이라고 말하는 가사를 통해 신인다운 ITZY의 열정과 가요계 재패라는 ITZY의 목표를 당당하게 드러낸다.


ITZY의 <ICY> 앨범 커버


 'ICY'의 전반적인 컨셉은 더운 여름을 시원하게 얼려 줄 얼음의 푸른 색을 주제로 하고 있지만, 청량한 이미지 대신 폭이 넓은 힙합 바지와 형광색 상의를 통해 레트로한 느낌과 더불어 강렬한 이미지를 선사한다. 특히 ITZY는 멤버 5명 모두 춤을 잘 추기로 유명한데, 'ICY'에서도 그들의 역량을 모두 보여주려는 듯 화려한 퍼포먼스가 인상적이다. 걸그룹 춤임에도 웨이브보다는 강약조절이 중요한 바운스와 락킹에 중점을 두어 ITZY의 파워풀함이 돋보이도록 했다. 여자아이들과 마찬가지로, 가사와 컨셉에 맞게 크고 역동적인 안무를 선택한 것이다.


 그리고 대망의 8월 27일, 솔로 여가수로 입지를 탄탄히 다지고 있는 선미가 파격적인 컨셉으로 컴백했다. 앨범 타이틀은 날라리. 선미만의 몽환적인 컨셉과 언어유희를 이용한 가사는 그대로지만 그는 이제 헤어진 연인이나 사랑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날라리'의 화자는 자신이 날라리는 아니지만, 분위기만 좋다면 가루가 되도록 털어도 괜찮다고 말한다. 자신을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강력한 한 방을 날리고 싶다면 자신이 얼마나 잘났고, 너네는 얼마나 못났는지 늘어놓는 것이 일반적이다. 아니면 억울한 소문에 대해 해명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날라리'의 화자는 다르다. 그녀의 훅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짧고 빠르게 들어온다.


https://youtu.be/LrggmyDhWBo

말해 뭐해 그랬니 어쨌니 / 또 입방아에 들썩 온종일 난리 법석
애써 아니라고 말하기도 애석 / 너만 빼고 다 아는데 너 그거 몰라 맞아 난 말이야
분위기가 좋아 그렇다면 Okay /가루가 되도록 터는 것도 Okay
뭐라고 뭘 하고 다녀도 You know I'm okay /알잖아요 난 Naughty but 아니에요 날라리
맞으면 뭐 어쩔 건데 / 날라라라라라라라라라라리 날라라라라라라라라라라리

 

 선미는 데뷔한지 벌써 10년이 훌쩍 넘었다. 아마 그녀는 오랫동안 연예계 생활을 하면서 어차피 한 번 색안경을 낀 사람한테 아무리 해명을 하고 억울함을 호소해봐야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유명 연예인이기에 견뎌야했던 대중의 압박과 터무니 없는 소문은 선미가 갑작스럽게 원더걸스를 탈퇴하면서 더욱 심해졌고, 솔로 가수로 완벽한 변신을 꾀한 뒤에도 체중에 관한 지나친 품평이 이어졌다. 물론 타이틀곡의 화자와 가수를 완전히 동일시할 수는 없겠지만 선미 본인이 직접 작사작곡에 참여한 만큼, 적어도 '날라리'는 선미가 대중의 불합리한 시선을 어떻게 마주하기로 결정했는지 그 방향성을 제시한다.


 '맞으면 뭐 어쩔건데?'. '날라리'를 관통하는 주제는 이 짧은 수사적 의문문에 축약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구차하게 내가 얼마나 잘났고 네가 얼마나 못났는지를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이 문장만으로 화자와 청자의 권력관계가 명확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화자가 이런 질문을 당당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청자가 뒤에서 수군거리는 것 외에는 '감히' 화자에게 별다른 행동을 취할 수 없을 것이 분명하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같은 진흙탕 싸움을 벌이지 않아도 화자는 말 한마디로 상대의 무력함을 드러내고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한다.  


<날라리> 뮤직비디오 속 나비가 된 선미


 '날라리'의 의상과 앨범아트에는 무수히 많은 꽃이 등장한다. 이번 의상 컨셉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뮤직비디오를 살펴봐야한다. 날라리 뮤직비디오에서 선미는 번데기로 표상되는 자신의 껍질, 즉 한계를 깨고 나와 끝없이 상승하는 나비가 된다. 나비인 그녀는 당연하게도 아름다운 꽃이 피어있는 의상을 입고, 자신의 본 모습을 상징하는 날라리를 맘껏 뽐낸다. 그런 의미에서 '날라리'는 자신을 향한 불합리한 시선(불량소년)을 이겨내고 즐거움(태평소)으로 승화하는 과정이다. 아직 20대 후반의 나이지만, 선미의 앨범은 성숙하고, 성숙한만큼 아름답다.


레드벨벳의 <짐살라빔> 앨범 커버


 이외에도 에버글로우의 'Adios', CLC의 'Devil' 등 2019년 여름은 걸크러쉬 컨셉이 큰 인기를 끌었다. 여자친구, 블랙핑크, 트와이스도 기존의 청순, 섹시 컨셉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도를 꾀하며 이미지 변신에 성공했다. 걸크러쉬 컨셉은 아니지만, 차세대 써머퀸으로 불리는 레드벨벳의 타이틀곡, '짐살라빔'도 눈여겨 볼만 하다. 다소 괴랄한 의상과 컨셉, 멜로디로 거부감을 보이는 사람도 적지 않지만, '짐살라빔'은 실험적인 음악적 시도를 통해 걸그룹 컨셉의 저변을 넓혔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덧붙여, 걸그룹이 청순함이나 섹시함을 강조한 의상이 아닌, 미학적 관점에서 아름답다고 보기 어려운 난해한 의상-게다가 뮤직비디오에서 조이는 레게 머리를 하고 나온다-을 입고 행복을 노래하는 것은 어쩌면 그 어떤 걸크러쉬 곡보다도 더 의미있는 발전일지 모른다. 내년 여름은 또 어떤 새로운 컨셉의 걸그룹이 나를 놀라게 할지, 벌써부터 내년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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